‘쫓지 않음’으로 완성된다
水火 旣濟 ䷾
旣濟 亨小 利貞 初吉終亂.
기제괘는 작은 일에 형통하다. 올바름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로우니, 처음에는 길하고 끝에는 어지러워진다.
初九, 曳其輪 濡其尾 无咎.
수레바퀴를 뒤로 잡아당기고 여우가 그 꼬리를 적시면 허물이 없다.
六二, 婦喪其茀 勿逐 七日得.
부인이 그 가리개를 잃은 것이니, 쫓아가지 말라. 그러면 7일 만에 얻으리라.
九三, 高宗伐鬼方 三年克之 小人勿用.
고종이 귀방을 정벌하여 3년 만에야 이겼으니, 소인은 쓰지 말아야 한다.
六四, 繻(濡)有衣袽 終日戒.
배에 물이 스며들며 젖으니 헌옷가지를 마련하고 종일토록 경계하는 것이다.
九五, 東隣殺牛 不如西隣之禴祭 實受其福.
동쪽 이웃이 소를 잡아 성대하게 제사지내는 것이 서쪽 이웃이 간략한 제사를 올려 실제로 그 복을 받는 것만 못하다.
上六, 濡其首 厲.
머리까지 젖으니 위태롭다.
작년에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었는데, 힘든 부분이 있었다. 20대 후반에 쓴 니체의 책을 읽고 있자니, 내 안에서 자꾸 질문이 생겼다. 이 책은 니체가 28살이었을 때 쓴 것이었는데, 이후에는 그의 사상과 충돌되는 부분이 보였기 때문이다. 40대 중반의 니체는 이 책의 서문을 다시 쓰며, ‘지금의 나라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못을 박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비극의 탄생』은 당시 독일 문화에 통렬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때 니체의 멘토는 바그너였는데, 니체는 그를 보고 ‘신적인 것을 영접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경도되어 있었다.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을 보면 “예술이 이 삶의 최고의 과제이고 본래적인 행위라고 확신하는 바그너와 뜻을 함께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니체는 이때를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나의 사상을 완성했고, 그것을 함께 추동하는 멘토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니체의 행보를 보며, 기제괘(旣濟卦)를 떠올렸다. 기제(旣濟)는 ‘이미 완성했다’. ‘이미 성취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왜 니체는 계속해서 글을 썼을까? 어떤 사상적 정수를 맛보고 나면 그것에 따라 살면 될 것 같은데… 이것은 비단 니체만의 질문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를 완성했다고 생각한 이후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기제괘에서 답한다. 우리가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작게 성취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방점은 뒤에 찍혀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취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게 성취할 것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 말이다.
작게 성취할 것이 남아있다는 말은 무엇일까? 괘상으로 보면, 물이 불 위에 있는 것(水在火上)이 기제괘의 모습인데, 물과 불이 교류해서 각각 그 작용을 얻어 일들이 성취된 때를 말한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보고, 환난을 생각하여 미리 방비했다고 한다. 왜 모든 것이 성취된 이때에 환난과 해로움을 생각하는 것일까? “세상일은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나니, 하나로 고정된 이치는 없다. 모든 일이 성취된 끝에 나아가지 않고 그치지만, 항상 멈추어 있는 것은 없어서 쇠락과 혼란에 이르게 되기 때문”(정이천, 『주역』, 글항아리, 1215쪽)이다. 완성된 것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말하고 있다. 보통 완성을 ‘끝’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인간도 변한다. 그렇게 되면 완성된 것을 세상에 적용하기 어려워져 혼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요순 말고는 완성된 것을 온전히 지켜낸 경우가 없다고 했을까.
니체는 성취 이후 혼란을 경험했다.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변질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뜻을 함께했던 바그너는 성취와 동시에 대중에 영합하는 예술가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더 이상 니체를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나는 육이효에 놓여있는 니체를 발견했다. 육이효는 부인이 가리개를 잃은 상태로 표현할 수 있다. 부인이 ‘가리개’가 없으면 밖으로 외출할 수 없듯이, 활동을 잃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구오효와의 관계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구오는 ‘이미 성취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뜻을 함께했던 육이효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니체에게 바그너는 ‘가리개’였다. 니체는 자신이 세운 철학을 바그너가 예술로써 실현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행동할 수 있는, 그런 가리개 말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가리개를 잃은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육이효에서는 ‘쫓지 말라(勿逐)’고 한다. ‘쫓지 않는다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육오를 쫓던 그 마음을 점검하라는 뜻이다. 기제괘에서 구오는 이미 뜻이 궁색해진 것을 모르고 화려하고 과도한 제사를 지냄으로써 복을 비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성찰하지 않는 구오를 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관계를 포기하는 것, 바그너와의 관계에 미련을 갖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끊어내는 것이 필요한 때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대중의 욕망에 쉽게 변질되는 ‘예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 바그너와의 관계도 과감하게 끝을 냈다. 동시에 교수생활을 하던 대학도 떠났다. “나의 생명력이 가장 약했을 때, 나는 염세주의자이길 포기했다. 자기 회복의 본능이 궁핍과 의기소침의 철학을 금한 것이다”(니체, 『이 사람을 보라』, 1장 2절) 당시 니체의 결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되면, 7일 만에 다시 얻게 된다(七日得)고 한다. 구오의 마음을 다시 얻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중정의 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중정의 도는 다른 게 아니다. 본래 철학을 했던, 진리를 추구하던 그 마음을 뜻한다. 그래서 구오를 쫓지 않으면, 그 마음이 다른 데에 쓰이게 되는 때(時)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니체는 다시 ‘글쓰기’라는 본래의 작업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반시대적 고찰』, 『이 사람을 보라』 등이 줄줄이 출간된다. 바그너와의 작업도 냉철하게 바라보게 되고, 그렇게 깨닫게 된 것을 모두 글로 쓴다.
그런데, 질문이 생긴다. 어떻게 마음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하면 가리개를 잃고도 그것을 쫒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왕부지의 해석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왕부지는 기제괘의 괘사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형통하다. 소인이 이롭고 올곧으며, 처음에는 길하지만 끝내는 혼란해진다(旣濟 亨小 利貞 初吉終亂)”고. 여기서 ‘형통함’은 소인의 형통함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소인의 원리와 방식이다. 대인들은 애초에 ‘이루었다’고 해서 거기에 눌러앉지 않으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꼭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루었다는 생각조차 없고,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는 것, 그것이 대인의 태도다. 그렇기에 완성했다고 해서, 성취했다고 해서, 들뜨고 기뻐하는 것은 소인의 태도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왜 어떤 사상을 세상에 내놓고도 계속해서 철학을 할 수 있는지, 이루었다는 것에 도취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에 대해 실마리를 던져준다.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완성이란 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니체는 이후에도 사유의 여정을 놓치지 않았고, 계속 글을 썼다. 자신의 논리를 뒤집고, 수정하면서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다. 니체를 대표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디오니소스’라든지, ‘힘에의 의지’ 등은 『비극의 탄생』에서 이미 등장했다. 니체는 그 개념들을 죽기 전까지 사유했고, 수많은 변형을 거쳐 완성해 나갔다. 니체의 사유 과정을 보면, 성취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게 성취할 것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글_성승현(감이당 금요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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