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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내인생의주역 시즌2

[내인생의주역시즌2] 36계 줄행랑의 도

by 북드라망 2021. 3. 10.

36계 줄행랑의 도

地水 師   ䷆

師, 貞, 丈人, 吉, 无咎.
사괘는 올바름을 굳게 지켜야 하니, 다른 사람들을 이끌 수 있어야 길하고 허물이 없다.

初六, 師出以律, 否, 臧, 凶.
초육효, 군사를 일으키는 데 규율로써 하니, 그렇지 않다면 승리하더라도 흉하다.

九二, 在師, 中吉, 无咎, 王三錫命.
구이효, 군사의 일에 있어서 중도를 지키면 길하고 허물이 없으니, 왕이 신임하여 세 번 명을 내린다.

六三, 師或輿尸, 凶.
육삼효, 군사의 일을 혹 여러 사람이 주장하면 흉하다.

六四, 師左次, 无咎.
육사효, 군사가 물러나 머무르니 허물이 없다.

六五, 田有禽, 利執言, 无咎, 長子帥師, 弟子輿尸, 貞, 凶.
육오효, 밭에 짐승이 들어오면 명령을 받들어 잡는 것이 이로우니 허물이 없다. 맏아들이 군사를 거느렸으니, 여러 동생들이 주장하게 하면 바르더라도 흉하리라.

上六, 大君有命, 開國承家, 小人勿用.
상육효, 위대한 군주가 명을 내리는 것이니, 제후를 봉하고 경대부를 삼을 때에 소인을 쓰지 말라.

 

 

회사를 그만뒀다. 늘 계약직을 전전하다가 얻은 정규직 자리였는데, 수습기간 세 달을 채우기도 전에 영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어 퇴사했다. 부모님은 난리가 나서 내 자취방으로 예고 없이 들이닥쳤고, “거기서 무조건 1년 채워라. 안 그러면 평생 니 얼굴 안 본다”는 말로 무시무시한 으름장까지 놓았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이미 정해진 내 퇴사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나는 다시 취업 사이트를 매일 기웃거리는 취준생 신분으로 되돌아왔다.

하여, 지금 주어진 이 지수사 괘는 아주 시의적절한 당위성을 가지고 내게 성큼 다가온다. 지수사(地水師), 땅 속에 감춰진 지하수가 흐르는(地中有水) 모습인데, 더러는 땅 밑에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많은 사람들을 상징한다고도 하고, 또 더러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군사를 숨겨두고 훈련시키는 모습을 나타낸다고도 한다. 괘상을 보면 두 번째 효가 유일한 양효이고 나머지 효들은 모두 음이다. 유능한 구이효가 장군이 되어 나머지 다섯 병졸들을 통솔하는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지수사 괘의 키워드는 전쟁-군사-조직-무리-군중으로 이어진다. 조직의 안에 있었을 때 지수사 괘를 만났었더라면, 무리를 통솔해야 하는 방법이나 자신보다 뛰어난 부하를 둔 리더의 처세, 성과보상 등을 말해주는 효들에게 더 끌렸을 것이다. 그러나 막 조직 밖으로 튀어나온 지금 내 눈에 가장 띄는 효는 바로 육사효다. 六四, 師左次, 无咎(육사, 사좌차, 무구). “군사가 물러나서 머무르니 허물이 없다.” 나는 늘 이 ‘좌차左次’라는 단어가 궁금했었다. 왼쪽의 ‘좌左’라는 말이 들어갔다면 그 반대편인 오른쪽의 ‘우차右次’도 있으려나? 찾아보니 우차와 좌차는 전쟁 용어로, 장기와 바둑을 둘 때도 종종 쓰이는 말이라고 한다. 왜 하필 ‘왼쪽에 진을 치다’는 뜻인 ‘좌차’가 물러남의 뜻이 되었을까?

우와 좌는 단순히 오른쪽과 왼쪽의 반대되는 방향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고 물러남을 상징하는 것이다. 양(陽)과 음(陰), 진(進)과 퇴(退), 열림(開)과 닫힘(閉), 구부러짐과 펴짐 등 주역에서 늘 말하는 상호관계가 이 ‘우’와 ‘좌’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른쪽이 강건한 양(陽)의 기운, 나아감, 과감히 결단하고 실행함을 상징한다면 왼쪽은 유순한 음(陰), 물러남, 잠시 멈추고 기거한다는 뜻을 지닌다. 동양 병법서의 고전, 손자병법에도 나오는 그 유명한 36계 줄행랑이 이 지수사괘의 육사효에서 비롯되었다. 36계 줄행랑이 정신없이 달아나는 단순한 도망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적과 나의 상황을 철저히 분석하고 어쩔 수 없이 밀리는 상황일 때는 자기 자신을 보전하는 것 또한 하나의 훌륭한 전략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회사 역시 전진과 승리를 위해 나아가야 하는 혹독한 전쟁터에 비유될 수 있다. 이 전쟁터에서 굳이 탈주병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 내가 왜 돌연 줄행랑을 친 건지, 무엇 때문에 승산이 없다 판단하고 물러난 것인지, 지수사 괘를 붙잡고 나름의 분석을 해볼 참이다.

이 회사에서는 정신줄 붙잡고 일하는 게 힘들 정도로 바빴다. 눈알이 팽팽 돌고 심장이 펑펑 뛰고 입 안이 바싹 마른다는 게 뭔지를 거기서 일하며 알았다. 일이 너무너무 많은데, 거기다 또 따로 시간을 내어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시스템 개선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될 만한 이 중요한 전쟁터에서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고, 그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일했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 밤 10시까지 일하고, 노트를 작성해서 인계된 업무를 계속 복습하고, 독서와 글쓰기는 미룰 수 있을 때까지 최대치로 미뤘다. ‘이 업무들을 얼른 능숙하게 해내서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자!’고 다짐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일을 제외한 독서와 공부, 집안일을 착실하게 해내며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자립하는 삶을 꾸려나가는 것. 그것이 내게 있어서 열심히 나아가야만 했던 이유였다. 그러나 회사가 커가면서 앞으로 일은 더욱 더 많아질 거라고 말하는 상사의 열정어린 선언을 듣는 순간, 나를 포함한 팀원 모두의 근무기록표에서 정시출퇴근은 거의 손에 꼽을만큼 드물다는 걸 발견한 순간, 이 회사에서는 업무 외에 내 일상을 이루는 조그만 영역도 확보할 수 없음을 알았다.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엄마는 나보고 ‘얘가 늘 계약직만 골라 다니며 회사 생활 편하게 하더니, 이제 정규직에 적응 못하는 비정상이 되어버렸다’며 속상해하셨다. 정말 나는 비정상이 되어 버린 것일까?

 

‘비정상’이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은 정말 무섭다. 그러나 육사효는 내게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되는 반대 관계가 아닌, ‘우와 좌’, 그저 나아가고 물러남의 때가 있을 뿐이라는 시절의 변화를 잠자코 알려준다. 주역은 그래서 A와 B가 서로 분리되는 치열한 정(正)-반(反)의 이분법이 아니라 A속에 B의 씨앗이 있어서 B가 A의 또 다른 변형(A’)이 될 수도 있음을 증명하는 순서들이 계속 나온다. 64괘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경계선들은 무너지고 하나의 괘는 다른 괘들과 끊임없이 연결되고 접합된다. 이런 변신의 과정을 보고 있자면 당최 무엇을 단번에 정의하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의문이 든다. 이토록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만 있을 뿐인데. 가장 안전한 자리를 박차고 나온 내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는 솔직히 나조차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비정상’이라는 단어가 ‘좌차’라는 한 시절인연을 뜻하는 단어로 변환될 때 내 숨통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느낌이 든다. 이러이러한 시절을 맞이했을 뿐이라는 말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를 침착하게 돌아보도록 하는 힘이 있다.

만약 내가 좌차의 스텝을 건너가고 있는 것이라면 우차의 시기도 필연적으로 올 것이다. 이는 좌차의 시련을 잘 견디면 우차라는 좋은 결과물이 도래할 것이라는 인과론이 아니다. 후퇴인 줄 알았는데 훗날 돌아보니 나아감의 과정 중 하나였음을, 또 똑바로 나아가는 줄 알았는데 멀고 먼 길을 맴돌았음을 알게 되는 장난 같은 깨달음이 늘 벌어지는 곳이 삶이니까. 나아감과 물러남은 반대가 아니라, 서로를 품고 있다. 나의 물러남은 또 어떤 나아감을 품고 있을 것인가? 또 나아감의 모든 순간들은 어떤 물러남을 만나게 할 것인가? 지난 4년간 나름대로 열심히 분투하며 계속 나아감을 멈추지 않았기에 물러남을 적절하게 맞이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 물러남의 시간을 보내며 이제껏 내가 생각해왔던, 승진을 하고 더 열심히 일하는 방식과는 다른 의미의 나아감을 만날 것이란 예감 역시 어렴풋이 든다.

좌차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성장과 보상으로 돌아가는 조직에서 열정적인 참전 용사가 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과감히 도망쳤다. 도망을 치되, 이후의 전략을 잘 짜야만 하지 않겠는가? 좌우의 개념을 빌려, 무엇이 열리고 닫혔는지를 관찰하는 과정이 있었다. 만약 정규직이 되어 얻는 것이 회사에 모든 정력과 시간을 쏟아 부어야만 하는 생활이라면 간헐적 백수가 되더라도 계약직이 차라리 더 낫지 않겠나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앞으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도 하나씩 써내려가며 정리했다. 좌차의 시기에 가장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 싶다. 이 시기를 주저앉아 후회하며 넋 놓고 보내지 않아야, 내가 거기서 줄행랑을 쳤던 것이 결코 충동적인 면피책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줄 테니까. 그리고 이런 자세야말로 우차와 좌차의 얽힘을 아는 군자의 태도일지도 모르니까. 싸우고 무리를 조직해야 하는 전쟁의 시기에 한 발 물러서는 퇴보를 감수해서라도 허물이 없으려면(無咎) 지금 내가 해야만 하는 성찰의 시간에 철저히, 그리고 깊게 몸 담궈 보는 수밖에 없다.

도망침에도 도가 있다. 도란, 모든 열림과 닫힘, 나아감과 물러남의 변화를 포착하고 그 흐름에 능동적으로 올라타는 것을 말하지 않을까? 지수사 괘를 곱씹으며 좌차의 시절을 맞이한 나를 본다.

 

글_오찬영 (감이당 장자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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