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동화인류학] 대칭성의 회복을 위하여 「충성스런 요하네스」와 「장화신은 고양이」

대칭성의 회복을 위하여

「충성스런 요하네스」와 「장화신은 고양이」


자유가 아니라 이해다 

    

코로나는 2차 대 유행을 맞고 있다. 2주간의 방학이 끝나고 전일 등교할 수 있는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 다시 매주 일일 등교라는 원격수업의 2학기가 시작되었다. 정말이지 큰일이다. 코로나가 잠잠한 뒤로 장장 50여일을 넘는 장마가 전국을 강타했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태풍 바비가 시간당 30-50mm의 순간풍속 최대 60m의 강풍을 몰고 북상중이다. 눈뜨면 학교나 직장에 가고 사람들과 카페나 식당에서 놀고 일하던 시절이 언제쯤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일상으로의 복귀는 요원해 보인다. 정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와 기후 위기의 증상들을 앓고 있다. 고통과 두려움이 그 발걸음을 멈출 줄 모른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들은 어떻게 키워야 할까? 

    



프랑스의 알베르 카뮈가 『페스트』를 쓴 것은 1947년이다. 카뮈는 전작 『이방인』(1942)에서 사회적 제도나 거리의 도덕이 한 인간의 자유를 재단할 수 없다고 강변한 바 있다. 주인공 뫼르소는 자신의 자유를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그 누구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타인의 모든 자유를 허용한다. 심지어 타인이 자신을 살해할 자유까지도 말이다. 뫼르소가 정오의 해변에서 아랍인 청년을 총으로 쏘아 죽였던 것은 어떤 신(神)도(교회의 신, 국가의 신, 사법의 신) 인간과 인간이 자유로이 사랑하고 싸우는 것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뮈는 5년 뒤에 돌연 『페스트』를 쓴다. 여기에서 그는 이제 개인의 자유 같은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다고 선언한다.   

    

『이방인』을 읽다가 『페스트』를 펴들게 되면 즉각 세 가지가 낯설게 다가온다. 일단 주인공들이 갑자기 많아진다는 점이다. 의사, 신문기자, 사기꾼, 하급 공무원, 도시 경비원, 그러다가 판사, 신부, 노파와 아이 등. 오랑이라는 도시를 덮친 페스트에 맞서기 위해 카뮈는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들을 등장시킬 기세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연인과 부부가 모두 헤어진다는 점이다. 인간들은 자신의 짝과 갑작스레 이별하고 각자의 방이나 병실에 유폐된다. 고독한 인간들은 페스트 덕분에 자신들의 본질을 깨닫는다. 바로 죽어야 하는 존재로서의 한 인간. 그렇게 절대 평등한 지평에서 남녀노소, 신분과 부의 모든 차별은 사라진다. 세 번째 페스트로 고통받는 인간의 신체가 너무나도 자세히 그려지고 또 그려지고 한다는 점이다. 카뮈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세하게 죽음 앞에 선 인간의 고통을 직시한다. 

    

카뮈가 절대죽음을 거론한 까닭은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 보편의 운명을 논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카뮈는 이 죽음을 ‘페스트’라고 하기 때문이다. 페스트란 내가 누군가에게 감염이 되고 나도 누군가를 감염시키면서 자연의 죽음을 인위적인 죽음으로 바꾸는 상황을 뜻한다. 다시 말해 카뮈가 말하는 페스트는 인간이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상태를 뜻한다. 우연히 발견된 치료제 덕분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며 이야기의 화자는 씁쓸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도 없이 서로 꼭 껴안은 채 황홀한 얼굴로 걸어가는 그 쌍쌍의 남녀들이야말로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서 행복한 사람 특유의 의기양양함과 부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이제 페스트는 끝났다고, 공포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고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한때는 경험했던 저 어처구니없는 세계, 사람 하나 죽이는 것쯤은 파리 한 마리의 죽음 정도로 여겼던 그 무지의 세계, 저 뚜렷이 규정된 야만성, 저 계산된 광란, 현재가 아닌 모든 것 앞에서의 무시무시한 자유를 가져왔던 저 감금 상태, 제 풀에 죽어 넘어지지 않는 모든 자를 아연실색하게 하던 저 죽음의 냄새, 이런 것들을 그들은 태연하게, 자명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매일매일 어떤 사람들은 화장터의 아궁이에 켜켜이 쌓여져 이글거리는 연기가 되어서 증발해버리고, 한편 나머지 사람들은 무력함과 공포의 쇠사슬에 묶여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 어리벙벙한 민중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페스트』, 민음사, 395쪽)

   

페스트는 자기의 자유를 실현하고 자기의 소유를 붙들기 위해 ‘자기가 아닌 모든 것’ 즉 자연과 타인 전체를 도구처럼 다루는 이기적인 욕망, ‘계산된 광란’이다. 만물을 평등하게 만드는 죽음이 자기에게는 낫을 휘두르지 않으리라고 믿는 저 어리석음, 자기의 욕망만이 영원할 것이라고 보는 저 어리벙벙함. 그렇게 무지한 자들이 ‘자기’ 애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면서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걸어간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기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한 인간들이 돌아다니는 한 페스트는 사라지지 않는다. 또 돌아온다. 

     

자유를 논할 때는 ‘뫼르소’ 한 사람이면 충분했는데 페스트를 막아서기 위해서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것일까? 카뮈는 삶과 죽음 사이에 어떤 비대칭이 발생했다고 보았다. 나카자와 신이치라는 인류학자는 뉴욕에서 발생한 9.11 테러나 광우병 사태를 두고 미국 중심의, 인간 중심의 세계 해석이 낳은 비대칭적 상황이라고 말한 바 있다.(나카자와 신이치,『대칭성 인류학』) 자연은 존재를 죽이고 살리지만 늘 균형을 맞춘다. 하지만 ‘내 인생에 죽음이란 없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의해 죽음의 추가 삶 추보다 무거워져버렸다. 카뮈는 이 비대칭을 맞추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인간을 모았던 것이다. 

    

그럼 이 인간들에게는 특별히 어떤 특징이 있는가? 이들은 직업도 다르고 각자의 이해관계도 다르지만 오직 한 가지 같은 생각을 한다. 자신이야말로 타인의 삶을 위협하는 페스트 보균자라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에게 일상을 되돌려줄 치료제를 기대하지 않고, 집 안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대신에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물론 치료제가 없으니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우 죽어가는 환자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 그 옆에서 함께 신음하는 것이다. 내가 의사라며 자기 말을 믿으라고 소리치지도 않고, 겨우 감염된 환자 수를 조사하고 다닌다며 자기를 비하하지도 않는다. 다만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게 하려고 어떤 일이라도 한다. 이들의 무기는 감염되어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 카뮈는 『이방인』의 두 배가 넘는 분량으로 어리석은 자들과 이해하려는 자들 각자가 느끼는 극도의 피로를 쓴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그렇습니다, 리유. 아시다시피 나는 인생 만사를 다 알고 있지요),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피고 있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리유.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 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 그러나 페스트 환자 노릇을 그만 하려고 애쓰는 몇몇 사람들이, 죽음 이외에는 그들을 해방시켜 줄 것 같지 않은 극도의 피로를 체험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앞의 책, 339쪽)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개발해준 치료제만을 기다리기보다는 이 비대해진 고통에 균형을 잡을 방법을 찾고 싶다. 나 자신이야말로 이 공포스러운 상황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통감한다.       



충직한 하인리히와 게임의 법칙   

    

동화의 세계도 직접적으로 죽음을 직면하고 있다. 주인공들을 하나같이 죽을 위험을 코앞에서 겪으며 제 자리를 찾아간다. 그런데 『페스트』에 나오는 의사나 잡역부들처럼 자신의 생사가 아니라 남의 일에 목숨을 거는 존재가 적지 않다. 「개구리 왕자」는 뜬금없이 왕자의 마법이 풀린 하인리히가 크게 기뻐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야기의 본 줄거리에는 등장조차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또 저 유명한 장화신은 고양이가 있다. 이들은 자기 운명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고 다만 남의 행복만을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이 착해서라든가, 내가 주인에게 빚을 져서라든가 하는 이유를 따로 대지 않는다. 그냥 타인의 운명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간다. 이런 동화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논리는 무엇일까?  

    



먼저 읽어볼 작품은 「충성스런 요하네스」이다. 그림 동화 속 하인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옛날 옛적 한 늙은 왕이 있었다. 죽어가면서 어린 왕자를 걱정한 왕은 충성스런 신하 요하네스에게 아들을 부탁한다. 왕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왕자가 왕국의 온갖 보물을 다 누리게 하되 긴 복도 끝에 있는 마지막 방만은 보여주지 말라. 하지만 동화이니만큼 말 안듣는 이 왕자는 당연히 그 방을 보여 달라고 하인리히를 조르고, 결국 방 안에서 황금 궁전 공주의 초상화를 보고는 상사병에 걸린다. 요하네스는 왕자를 위해 결국 대신 황금 공주를 꼬드겨 왕자와 결혼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때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공짜 점심은 없는 법! 어찌 황금을 거저 얻을 것인가? 사실 요하네스에게는 까마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재주가 있다. 가만히 듣자하니 까마귀들이 말한다. 왕이 황금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적갈색 말을 타게 될 텐데 그러면 말은 왕을 태우고 허공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물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왕 대신에 말에 올라타 말을 쏘아 죽이면 왕을 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사연을 ‘말하는 자’는 발끝에서 무릎까지 돌이 될 것이다. 

    

까마귀들은 계속 말한다. 어찌어찌 말이 죽는다 해도 황금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왕자가 예복을 입는 순간, 금실과 은실로 짠 것처럼 보이는 예복은 실은 유황과 역청으로 지어진 탓에 왕은 불길에 휩싸여 뼈까지 녹아버리게 된다. 물론 이 위협으로부터도 왕을 살릴 방법은 있다. 누군가 장갑을 끼고 그 옷을 집어 불 속에 던져 버린다면 젊은 왕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전후사정을 왕에게 전하게 되면 그는 무릎에서 가슴까지 몸 절반이 돌이 되어 버릴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이러저러하게 신랑 옷을 태워 버린다 해도 결혼식이 끝나고 무도회가 시작되면 춤을 추던 왕비가 죽어버릴 듯 쓰러질 것이다. 이때 왕비의 가슴에서 세 방울의 피를 빨아내 뱉어 버리면 그녀는 살 수 있다. 하지만 역시나 이 사실을 누설하는 사람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돌이 될 것이다. 

    

왕자를 너무나 걱정했던 요하네스는 세 번의 위험 모두를 막기는 하지만 대신 자신이 죽게 될 처지에 처한다. 처음 두 번은 요하네스의 충성을 믿었던 왕자가 세 번째에 이르러 왕비의 가슴에서 피를 뽑는 그를 보고 격노하여 사형을 선고하기 때문이다. 요하네스는 억울해 하며 형장에서 목이 잘리기 전에 사형수의 권리로 말을 하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까마귀에게 들은 사실을 고하는데 그 순간 온 몸이 돌이 된다. 

    

독자들이여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다. ^^ 세월이 흘러 왕과 왕비는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 어느날 충신을 잊지 못하는 왕이 요하네스의 석상을 붙들고 ‘너를 살리고 싶노라’라는 고백을 한다. 그러자 석상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폐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면 자신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가장 소중한 것이란 무엇일까? 그렇다, 내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존재 바로 쌍둥이 아들이다. 왕은 충성스런 요하네스를 되돌리기 위해 즉시 왕자들의 머리를 베어 석상에 피를 바르고 요하네스를 살린다. 그러자 살아낸 요하네스는 왕의 신의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두 아이의 머리를 몸 위에 얹고 상처에 그들의 피를 바르고 왕자들을 살린다. 여기까지가 끝이냐고? 아직 아니다. 왕은 아들들이 죽었다 살아난 사태를 모르고 있는 왕비에게 다가간다. 왕자가 죽는다 해도 요하네스를 살릴 것이냐? 오브 코오스! 왕비도 즉각 그것을 원한다고 대답하자 모두가 튀어나와 기뻐하며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게 된다.  

    

즉각적으로 보면 자기 일 아닌 일에 목숨을 걸고, 자식을 죽이고 남을 살린다는 이 모티프에 공감을 하기란 어렵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도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저 일어난 사건, 반복되는 문제가 무엇인지만 두고 한번 읽어보자. 이야기의 기본적인 설정은 황금을 얻기 위해서는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금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간단하다. 물질적인 부임과 동시에 쌍둥이 아들이라고 하는 생명이다. 즉 삶이다. 그런데 까마귀들은 이 삶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동화의 후반부를 보면 왕자에게 생명을 준 요하네스가 죽고, 요하네스가 죽자 쌍둥이 아이들이 태어나고, 쌍둥이가 죽자 요하네스가 돌아오고 한다. 마치 생명과 죽음에는 총량의 법칙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동화의 결론은 쌍둥이도 요하네스도 다 사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처음에 요하네스가 돌아온 것은 쌍둥이 아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쌍둥이 아들이 살기 위해서는 요하네스의 마법에 더하여 하나의 장치가 더 필요하다. 바로 왕비가 선고하는 아들의 죽음이다. 왕비가 아들을 말로 죽였기 때문에 직전에 아버지에 의해 죽고 요하네스에 의해 반쯤 살아났던 쌍둥이들은 비로소 현실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충성스런 요하네스」는 삶과 죽음 사이에 대칭적 관계를 만드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고양이 장화의 비밀 


삶과 죽음의 비대칭을 조절하는 일을 왜 충신 요하네스가 맡는가? 여기서 요하네스의 설정값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하인이다. 그리고 까마귀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 돌이 되기도 하고, 돌인 채 인간의 말을 하기도 한다. 요하네스는 인간과 조류, 광물의 영역을 넘나들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세계에 속하기 위해서 까마귀의 말을 듣고도 못 듣는 척 해야 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분류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삶과 죽음 사이에 비대칭을 만들 수도 있고 그것을 회복시킬 수도 있다. 

    

그림 동화 속에는 요하네스 말고도 많은 하인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철의 사나이 한스」가 이 요하네스를 닮았다. 한스는 몸이 철로 된 거인인데 이야기에서는 ‘숲의 야만인’으로 나온다. 왕이 한스를 위협적으로 느껴 감금하지만 왕자가 그를 풀어주자 한스는 왕자를 데리고 신비로운 정령의 숲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나중에는 왕자가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서 그를 돕는다. 이때 한스는 특히 군대를 동원하는 능력으로 왕자를 도와 그가 적을 무찌르고 다시 왕이 되도록 돕는다. 

    

한스가 철인이라는 것은 그의 도구적 본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연구에 따르면 예부터 신화 속 광물질은 지모(地母)의 신성성을 나누어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야금술이 발달했던 고대 문화의 사람들은 광석도 태아와 똑같이 대지라는 모태 속에서 ‘성장’한다고 보았다. 야금술은 광석의 성장 리듬을 가속화시키면서 자연이 ‘보다 빨리 출산하도록’ 돕는 산과학(産科學)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미르치아 엘리아데,『대장장이와 연금술사』) 철인 한스는 인간도 자연도 아닌 중간자적 존재이며 대지로부터 에너지를 뽑아내고 증식시킴으로써 인간에게 힘을 가져다 준다. 한스는 이러한 능력으로 비천한 지경에 빠진 왕자를 원래 자리로 되돌릴 수 있었다.    

    



「장화 신은 고양이」도 한번 보자. 물레방앗간 주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죽으면서 이 아버지는 막내에게 고양이 하나만을 남긴다. 그런데 이 고양이가 주인에게 장화 한 켤레만 만들어달라고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결론은 우리가 다 알 듯이 고양이의 온갖 재치로 빈털터리 막내가 부귀를 누리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첫째 아들이 아니라 셋째 아들에게 고양이가 주어진다는 사실에서부터 위계와 부의 비대칭을 조절하기 위해 동화에서 고양이가 요청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양이는 바로 인간을 도울 수가 없다. 그는 장화를 받아야 한다. 장화란 무엇인가? 발에 신는 것. 그런 점에서 재투성이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와 같은 것이다. 유리구두도 장화도 존재가 처한 비대칭적 상황을 회복하게 해주는 도구이다. 

    

충성스런 요하네스의 이야기는 이러한 도구적 존재의 역할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도구는 자연으로부터 그 힘을 빌려온다. 요하네스는 까마귀의 이야기를 듣는 능력이 있었을 뿐이다. 까마귀가 알려주지 않으면 그도 왕자를 살릴 수 없다. 그렇게 자연의 힘을 빌린 도구는 문명사회가 가진 힘의 양을 증대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위험한 것이다. 인간과 그 바깥의 것들, 문명과 자연, 삶과 죽음 사이에 비대칭을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왕자도 요하네스도 계속 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던가. 도구는 오히려 문명과 자연 사이에 계속해서 발생하는 비대칭성을 회복하기 위해 쓰여야 한다. 



공부를 왜 하나?

    

올해 초 까지만 해도 둥순이 둥자에게 어떤 재주가 있는지, 개성을 잘 살려주려면 뭘 해야 할지 이런 생각들을 했었는데 이제는 그저 건강하기만을 바란다. 어디서 어떻게 감염되는지 알 수도 없고 갑자기 또 어떤 날벼락이 하늘에서 떨어질지도 모르겠는데 일신의 영달을 꿈꾸는 것은 이상하다. 누군가 어디서 아프고 다치는 일에 내 가슴이 철렁철렁한다. 내가 걱정해주고 보살펴 줄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어선 문제가 당장 아이들 코앞에 닥쳐 있기에 아이들도 일일 확진자 현황이나 재해 피해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요즘은 셋이서 ebs보다 뉴스를 더 많이 본다.  

    

동화에는 왜 인간이 동식물들과 그토록 쉽게 대화하는 것일까? 어린이들의 무사무욕한 시선에 만물이 다 똑같이 중요해보일 것이므로? 글쎄. 그림 동화가 채집된 것은 19세기이지만 그 민담들은 모두 오래전부터 어쩌면 신석기시대부터 유럽 여기저기를 떠돌던 이야기들이다. 동화 속에는 인간이 감히 자연과 대결한다는 생각조차 못하던 때부터의 상상력이 깊이 박혀 작동하고 있다. 인간이 생물의 대표자도 아니고 새나 풀들과 똑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을 때, 사람들은 만물이라면 모름지기 저 막대한 생멸의 카오스 안에서 보다 잘 살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믿었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아니라 동식물들을, 자연의 온갖 법칙들을 이해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공부다. 알아야 할 것은 내 욕망이 아니라 아프고 힘든 많은 삶들이다. 그런 이해를 통해 이 비대칭의 시대에 회복의 지혜를 찾도록 해야 한다.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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