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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인류학

[동화인류학] 대지를 놀래키는 완두콩의 큰 웃음

by 북드라망 2020. 11. 9.

대지를 놀래키는 완두콩의 큰 웃음  



냉장고 앞에서 

    

내가 카프카의 시골 사람도 아닌데 냉장고 앞에서면 매번 「법 앞에서」라는 작품이 연출된다. 돈까스를 튀겨야 하는데 오늘은 고기가 없군. 달걀말이를 해야 하는데 오늘은 달걀이 없군. 된장을 지져야 하는데, 아흥! 된장밖에 없군. 냉장고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지금은 안 돼!” 우리는 지금에서만 살 수 있는데 시골사람에게 지금은 늘 ‘금지’만 작동하는 시공간이었다. 그런 난처한 상황에서 발버둥쳐야 하는 시골 사람처럼 나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항상 ‘지금은 만들 수 없는’ 요리만 떠오른다. 재료는 늘 없고, 재주는 원래 타고나질 못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존재는 저마다 타고난 능력을 누린다. 능력은 매순간 할 수 있는 만큼의 끝까지 자신을 표현한다. 거미는 내일 더 잘 치기 위해서 오늘 거미줄 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내년에 더 맛있는 열매를 보려고 이번 가을에는 좀 참고 서 있는 사과나무는 없다. 다들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아낌없이 다 표현하고 산다. 어쩌다 갑작스런 비나 뜻밖의 번개를 만나 좌절을 맛볼 수도 있겠으나 비나 번개도 제 능력을 다 썼을 뿐이다. 그렇다면  불평도 원망도 없을 수밖에. 정말 자연의 평면에서는 선악도 없고 성공이나 실패도 없다. 그런데 나는 왜 요리의 세계에서 이토록 깊은 좌절을 맛보고 있는가?

     

요리를 좀 못하기로 뭐가 문제야? 싶지만 아이들이 “맛 없어~” 하는 말도 자꾸 듣다 보면 어깨가 처진다. 냉장고에 뭘 채워 넣어도 불안하다. 조리대 앞에 설 때마다 시험을 보는 것 같다. 아 어떻게 나의 지금을 긍정하나? 힘이 드는 구나.   


   

우연 그리고 연대 

    

이럴수록 동화를 읽어야 한다. 동화야말로 긍정의 달인들이 누비는 세계 아닌가? 그들에게는 오직 지금밖에 없다. 오늘은 동화가 ‘지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두 작품을 먼저 읽어보자. 첫 번째 작품은 「지푸라기와 숯과 완두콩」이다. 이 이야기는 몸통 가운데 검은 금이 그어져 있는 서양 완두콩의 기원담이기도 한데, 이렇게 시작한다. 한 마을에 사는 가난한 할머니가 완두콩 요리를 하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불을 더 빨리 타오르게 하려고 지푸라기 한 줌에 불을 붙이면서 콩을 쏟아 부었다. 그때 콩 한 알이 튀어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지푸라기 한 올 옆에 톡 떨어졌다. 그러자 곧이어 아궁이에서 벌겋게 달구어진 숯 한 덩어리도 따라 떨어져 그 옆에 있게 되었다. 잉? 이제 어쩌지? 

    

이때 벌겋게 달아오른 숯이 거침없이 나서서 말한다. “우린 운 좋게 같이 죽을 고비에서 빠져 나왔으니 똘똘 뭉쳐 살아 보는 게 어때?” 할머니 뱃속을 구르느니 다른 살 길 찾아 어디로든 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숯은 그렇게 완두콩과 지푸라기를 독려해서 길을 나선다. 여기까지만 보면 불끈 하는 숯이 주인공 같다. 

    

함께 길을 떠난 세 친구는 어느새 작은 개울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나무다리도 징검다리도 보이지 않는다. 셋이서 머리를 싸맨 끝에 인내의 화신인 지푸라기가 나선다. 자기가 가로질러 누울 테니 건너가라는 것이다. 역시나 벌겋게 달아오른 숯이 급한 첫걸음을 내딛었는데, 이거 어쩌지? 갑자기 발밑에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겁이 난다. 그래서 우물쭈물이다. 결국 숯의 활활 타는 열기는 지푸라기의 은근과 끈기를 태우고 만다. 결국 지푸라기는 두 동강이 나 강물로 빠지고, 숯도 따라 떨어져 피시식 소리를 내며 숨을 거둔다.  

    

그런데 갑자기 이 모든 것을 강 이편에서 보고 있던 완두콩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아니? 얘는 의리도 없나? 자신을 할머니의 입으로부터 구해준 친구들이 죽는 것을 보고 박장대소를 하다니! 그렇다. 동화에는 한때 친구였느니, 가족이니가 하나도 안 중요하다. 의리니, 도리니, 다 내려놓고 보면 그저 웃긴 일이다. 사태파악 잘못한 숯과 지푸라기의 처지가 황당해서 배꼽을 잡고 웃는 완두콩이여 그대에게는 죄가 없노라.  

    

사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너무 크게 웃는 바람에 완두콩의 배가 쩍하고 갈라져 버린 것이다. 웃기기로 치자면 웃고 있는 본인의 상황이 더 웃기다. 그런데 지푸라기와 숯과는 달리 완두콩은 운이 좋다. 지나가던 친절한 재봉사가 배가 터져라 웃고 있는 완두콩을 발견하고는 바늘과 실을 꺼내 터진 배를 꿰매 주고 떠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재봉사가 그를 꿰맬 때 검은색 실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완두콩들은 한가운데 검은색 이음매를 지니게 되었다.” 

    

도대체 무엇을 중요한 일이랴? 완두콩이 우연히 할머니의 아궁이에서 튀어 나간 일? 아니면 성질 급한 숯의 비극? 검은색 이음매를 지닌 완두콩 형태의 유래? 여기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읽는 사람 마음이다. 정답이 없다. 숯, 지푸라기, 완두콩 이들 각각에게 잘잘못을 물을 수도 없고 어떤 대목을 칭찬할 수도 없다. 아무도 기획하지 않았으나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산다. 이처럼 「지푸라기와 숯과 완두콩」이야기가 말하는 ‘지금’은 그저 우연이 넘쳐나는 시공간일 뿐이다.  

    

삶이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을 감당하다니. 자기 웃음에 자기 배가 터지는 줄도 모르는 완두콩은 대단하다. 우연밖에 없다는 것은 길모퉁이마다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궁이에서 튀겨질 뻔 하고, 물에 빠질 뻔 하고, 배가 터져 죽을 뻔 하고. 지푸라기, 숯, 완두콩 등 그 누구의 입장에서 보아도 사활이 걸린 사건들뿐이다. 어떤 선험적 죄도 없고 어떤 보장된 미래도 없다. 그 누구도 우리 각자의 운명에 대해 책임져 주지 않는다. 그런데 완두콩은 죽기살기로 도망쳐도 이 우연의 무시무시함을 벗어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닫고 웃는다. 울지 않고 웃는다. 그렇기에 대단한 것이다. 

    

동화의 ‘지금’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이야기는 「이와 벼룩」이다. 요약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사물과 생물들이 나오는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 한 집에 이와 벼룩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달걀껍질에 맥주를 빚다가 그만 이가 그 속에 빠져 화상을 입고 말았다. 벼룩은 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작은 거실문이 말했다.

  “왜 울부짖는 거니, 벼룩아?”

  “이가 화상을 입었거든.”

  그러자 문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구석에 있던 작은 빗자루가 물었다.

  “왜 그렇게 삐걱거리니, 거실 문아?”

  “삐걱거리지 않을 수 있겠니? 이는 화상을 입었지, 벼룩은 울고 있지.”


(「이와 벼룩」, 김경연 옮김,『그림형제 민담집』(현암사), 189쪽)


‘울어라, 세상이 함께 울 것이다!’ 이가 화상에 빠진 것을 슬퍼하기 위해 정말이지 만물이 함께 우는데 그 끝에서 이런 장관이 펼쳐진다.  


□ “소녀야, 왜 물동이를 깨 버리니?”

  “물동이를 깨 버리지 않을 수 있겠어? 이는 화상을 입었지, 벼룩은 울고 있지, 문은 삐걱거리지, 빗자루는 쓸고 다니지, 수레는 달리지, 거름더미는 타오르지, 나무는 몸을 흔들지.”

  샘이 말했다.

  “아이 참, 그렇다면 난 밖으로 흐르기 시작해야지.”

  샘물은 깜짝 놀라 밖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모두 물속에 빠져죽고 말았다. 소녀, 나무, 거름더미, 수레, 빗자루, 문, 벼룩, 이, 모두 함께 말이다.


(「이와 벼룩」, 김경연 옮김,『그림형제 민담집』(현암사), 190쪽)


이의 화상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국 벼룩, 문, 빗자루, 수레, 거름더미, 나무, 소녀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슬픔으로 몰아 거대한 샘물 속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으로 끝난다. 존재와 존재는 각자의 처지를 뛰어 넘어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기에, 작아도 너무 작은이의 곤경이언만 대지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다. 닫혀 있던 문이 흔들리고, 멈추어 있던 수레가 달리고, 거름더미는 이유 없이 타 버리며 나뭇잎은 가을도 아닌데 잎을 다 떨어뜨린다. 소녀는 어쩌면 자기 살을 물어 뜯었을지도 모를 이의 화상인데도 길어 날라야 할 물동이를 깨 버린다. 이가 죽을 지경인데 어찌 내가 살 수 있는가 말이다. 동화의 지금에는 오직 ‘너와 함께인 나’만 있다.    

  

동화는 지금을 긍정한다. 그런데 이 말이 ‘지금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막연한 낙관과는 무관하다. 우연이 넘실댄다는 말은 사건의 발생에 작용하는 인과가 복잡함을 뜻한다. 완두콩의 가운데에 왜 금이 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이 이야기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완두콩 자신도 자신의 몸에 왜 금이 갈 수밖에 없는지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우리라. 지푸라기도 숯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왜 하필 이 강가에 와서 죽어야하는지는 너무나 복잡한 인과가 만드는 사건이라 완전히 파악이 불가능하다. 동화 속 인물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긍정하는 까닭은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갈지를 알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많은 인과 속에 자신이 들어가 있다는 점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은 나의 죽음을 타인의 죽음처럼 느끼고 타인의 삶을 내 삶처럼 느끼기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닥치는 모든 것을 감당한다. 



다른 새는 믿지 마세요

    

그 복잡한 인과를 충분히 파악할 수도 없는데 날더러 어떻게 살라하나? 어쩌다 보니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산다는 것을 깨닫는 완두콩의 큰 웃음도 있는가 하면 「쥐와 새와 소시지에 대하여」에서처럼 울지도 못할 비극도 있다. 

    

사건은 이렇다. 새는 숲에서 나뭇가지를 긁어모아 오고, 쥐는 불 때고 청소하고, 소시지는 자기 몸을 빠트려 요리를 하며 그럭저럭 잘 살아가던 사이가 있었다. “누구나 너무 잘 지내다 보면 언제나 새로운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동화는 이렇게 분명히 말한다. 안정이란 없다! 영원이란 없다! 백설공주도 신데렐라도 그 누구라도 한 자리에서는 가만히 못 있는다는 것이 동화의 통찰이다. 따라서 이들 사이도 너무 안정적이다 보니 균열을 욕망하는 기운이 그 안에서 생겨났을 뿐이다. 그랬건만 이 집의 새는 어쩌다 만난 ‘다른 새’가 ‘너는 왜 밖에서 그렇게 고생을 하냐? 쥐랑 소시지는 놀고 먹는데!’ 라고 하는 말에 무너져 버린다.  

    



다른 새란 지금 여기에는 없는 새를 뜻한다. 이 집 새는 쥐와 소시지가 아니라 다른 새의 말을 자기 생각의 거울로 삼아버렸다. 그래서 그동안 종노릇이나 했던 바보였다며 쥐와 소시지를 원망하고는 집안에 눌러 앉았다. 쥐도 소시지도 울며불며 말렸지만 불가불가. 결국 소시지가 나무 하러 나가고, 새가 불을 피우고, 쥐가 요리를 하게 된다. 결과는 비극일 수밖에. 길 위에서 개를 만난 소시지는 잡아 먹혀 버렸고, 쥐는 소시지처럼 국 단지에 몸을 던졌으나 살과 털이 타고 말았다. 식탁을 차리려던 새는 아무도 없자 당황하여 장작불을 몸에 붙이게 되었는데, 불끄려다가 우물에 빠졌지만 구해줄 이가 없었다.    

    

「쥐와 새와 소시지에 대하여」도 우연이 전부인 세계만을 보여준다. 모든 것은 어쩌다 일어났을 뿐이다. 그러나 이 우연의 평면을 긍정하지 못하면, 지금 여기를 부정하면 죽음의 연쇄가 일어난다. 지금 내 삶을 이루고 있는 일을 ‘다른 새’의 추상적 말로 판단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지! 다른 새의 말은 그저 관념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지금 여기에서 바라보지 않고 어디 멀리서 사태를 파악하려고 하면 우연의 무시무시한 압력에 눌려 죽으리라!  



현미경을 든 톨스토이 

    

톨스토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화가 줄곧 탐구하는 바 또한 우연의 바다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다. 소시지처럼 실수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지푸라기와 숯과 완두콩’이란 할머니 아궁이 밑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조합이다. 우연만이 출렁댄다고 하니 매 사건이 고유하다. 때문에 그 해결책 또한 매번 특별하다. 지푸라기와 숯과 완두콩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들 셋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다른 새’를 허락하지 않았다. “함께 똘똘 뭉쳐 살아 보는 게 어때?” 셋은 할머니를 탓하지도 않고 신의 자비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배고픈 할머니가 완두콩을 구워 먹지 왜 내버려 둬야 하는가? 그럴진대 신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당신은 당신의 하실 바를 행하시며 나도 내 살길을 찾고 있다, 끝!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정해져 있지 않기에 매순간 죽을 고비 앞에서 살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나를 구할 자는 나다.

    

그런데 따지자면, 국면국면마다 나를 살리는 것은 내가 아니다. 완두콩이 숯과 지푸라기를 살리기도 했고 인간이 완두콩을 수선해주기도 했다. 각자 자기 욕망을 발휘하다가 우연히 상생(相生)한다. 이렇듯 좋은 마주침의 장 안에서, 나는 그 순간 살 길을 얻는다. 그러므로 나를 구하는 자는 우리다. 

    

동화가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기 위해 가지고 오는 이야기들에는 대부분 많은 사물들, 동물들이 출현한다. 인간이 나오더라고 해도 그는 뭇 존재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더 특이한 점은 이들 출현진들이 실은 너무나도 작은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동화는 우연이 주는 살풍경함을 연대의 기예로 돌파하라고 하면서 숯 한 톨, 지푸라기 하나, 완두콩 한 알의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왜인가? 

    

이들의 공통점은 작다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체적이라는 데에 있다. 우연, 연대, 구체성은 어째서 함께 논의되어야 하는가? 사물을 추상적으로 본다는 것은 관념으로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뜻한다. 후지, 국광, 부사를 ‘사과’라는 관념으로 바라보면 모두 다 똑같이 보인다. 하지만 가을이라고 해도 9월부터 11월까지 하루하루가 다르고, 같은 한반도라고 해도 경남 밀양에서부터 전라도 장수에 이르기까지 한발 한발이 다르다. 1분 차이로 태어난 둥순이와 둥자는 내 눈에는 발가락 크기부터 콧구멍 모습까지 너무나 다르지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똑같아 보이는 여자 아이들에 지나지 않을 테다. 구체적인 것들은 추상의 껍데기를 벗을 때에만, 벗으려고 애쓸 때에만 보인다. 구체적인 것은 찾는 자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제1장을 ‘구체의 과학’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레비 스트로스는 미국 동북부와 캐나다 지방에 사는 인디언들(Montagnais, Naskapi, Micmac, Malecite, Penobscot)이 동식물학에 대해 얼마나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는지를 감탄하며 서술한다. 어떤 인디언들은 파충류 조사에 특히 열심인데 그들에게 파충류란 식용도 아니고 애용도 아닌 어떤 것에도 별다른 효용이 없는 생물이다.(특히 레비 스트로스,『야생의 사고』(한길사), 59쪽 참고) 레비 스트로스가 보기에 만물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지적 호기심)이 이들을 구체적인 것들의 과학자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인디언들은 필요를 먼저 따져서 대상을 판단하지 않는다. 무사무욕한 과학자의 입장을 갖고서 대상의 구석구석이 지닌 면모, 온갖 상황에서 그것이 보여주는 행태를 조사하려고 달려든다. 그렇게 해부학적이면서도 행동학적인 철저한 관찰 아래에서 한 마리 파충류는 지상 어디에도 없는 하나의 파충류가 된다. 

    



인디언들의 구체의 과학이 추상적인 앎을 지향하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그들은 자연의 압도적인 힘, 언제 어떻게 장마가 오고 기온에 큰 변화가 올지를 자신의 온몸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지금 여기에서 우선 내가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는 자기 눈앞에 있는 온갖 존재들의 살아가는 방식이 자연의 말씀으로 보인다. 자연을 더 폭넓고 깊게 이해할수록 살 길은 늘어난다. 세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할수록 곤경에서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많아진다. 그들은 가장 이기적인 욕망(내가 살아야 한다)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공할만한 노력으로 타자에게 다가간다. 그 과정에서 그 파충류가 살고 죽는 것이 자신의 살고 죽음과 관계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이다.



재봉사의 철학

    

레비 스트로스라면 지푸라기와 숯과 완두콩의 결합을 야생의 사고의 특징인 브리콜라주라고 했을 것이다. 브리콜라주는 손재주를 뜻한다. 신석기인들은 뗀석기, 간석기 하나를 가지고 온갖 목적에 활용했다. 그들의 눈에는 어느 것 하나 유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신석기인들의 사고방식을 생생하게 활용하는 인디언들은 오늘 하루 잘 살기 위해서 자기만의 안목으로 주변의 지형지물을 눈여겨보면서 그 이용가능성을 다각도로 성찰한다. 인디언들의 브리콜라주 기법에서는 사물을 단일한 목적을 지닌 정태적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물건들, 자연의 동식물들, 온갖 상상과 꿈의 이미지들은 현실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정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들이다. 브리꼴레르 즉 손재주꾼은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디 먼 곳에 손을 내밀지 않고 지금 눈앞에 주어진 것 전부를 활용해서 도구를 만든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은 없기 때문에, 사태는 계속 변해가기 때문에, 이 도구는 한번 밖에 쓸 수가 없다. 이 한번을 위해 브리꼴레르들은 매순간 구체의 과학에 도전한다. 그런데 잊지 말자. 바로 그 한 번에 생사가 결정된다.           

    

그림 형제가 수집한 민담에는 특히 재봉사들이 많이 나온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도 물레를 잣다가 바늘에 찔려 잠이 들고, 요정들은 신데렐라를 도와줄 때나 바느질 싫어하는 소녀를 도와줄 때나 솜씨 없는 구두장이 할아범을 도와줄 때나 실로써 주인공의 운명을 바꾼다. 완두콩의 터진 배를 이어준 이도 지나가던 재봉사가 아닌가. 왜 재봉일까? 

    

재봉사야말로 브리꼴레르이기 때문이다. 용감한 꼬마 재봉사는 배가 부르고 웃음이 터질 때마다 자기 바늘땀이 자꾸 커지는 것을 느낀다.(「용감한 꼬마 재봉사」) 그는 천 조각 하나로 파리 일곱을 때려잡으면서 영웅의 길을 걷게 시작하는데, ‘한 번에 일곱을 죽였노라!’ 큰소리치면서 거인과 재주도 겨루고 일각수의 뿔도 도끼로 찍어 내리며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꼬마 재봉사의 머릿속에는 원래 무서운 것, 원래 건드릴 수 없는 것, 원래 어떠어떠한 것이라고 하는 선험적 관념이 없다. 그는 어떤 추상적 척도에도 휘둘리지 않기에 괴물 앞에서도 구석구석 그 허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동화 속 재봉사들은 만물의 잠재성을 속속들이 발견한다. 까마귀가 된 일곱 오빠를 사람으로 돌리기 위해 막내 여동생은 맨손으로 가시옷을 짓는다. 그녀의 손길 아래에서 동물 거죽 안에 갇혀 있던 인간이 눈을 뜬다.    

    

냉장고가 비었다며 쇼핑 앱 깔고 장바구니를 채울 일이 아니다. 돈까스, 달걀말이, 된장국을 먹어야 식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다른 새’의 시선으로 냉장고 안을 바라보는 격이다. 냉장고라고 하는 그 한계 상황, 나에게 주어진 이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서 먹을 것을 만들어낼 일이다. 동화 속 톨스토이들처럼 말이다. 이제 나는 냉장고 앞에서 완두콩처럼 크게 웃는 엄마가 되리라. ㅋㅋ.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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