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형제, 메르헨을 발견하다
동화를 읽어 뭐하나
어떤 경험이 꼭 우리를 성숙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매순간이 다 드라마틱했지만 육아를 통해 내가 무엇을 얻고 있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된 지 십 년인데 도무지 내가 훌륭해졌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경력이 단절되는 것이 두렵고, 아이에게 도대체 뭘 해주고 있는지 정신도 없다. 애들도 잘 커야겠지만 나도 잘 자라야 하는데 매일 아침마다 어리둥절하다. 도대체 엄마란 어떤 존재일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일까?
어느새 저녁 8시다. 어디선가 풀썩 풀썩 둥둥 집이 울린다. 여기는 바닷속. 두 마리 해파리는 바다생물답게 이불 위에서 헤엄을 치는 중이다. 하지만 물고기도 밤에는 자야 하지. 자, 책을 읽고 잠을 청하자꾸나. 역시 동화는 재미있다. 푸른 수염 아저씨는 아이들을 잡아먹고 피리 부는 사나이를 속인 하멜른의 거짓말쟁이 어른들은 자식들이 쥐가 되어 마을을 빠져나가는 줄을 모른다. 무섭지만 너무나 재미있어! 해파리들은 웃다가 서서히 사람으로 돌아와서는 조용히 잠이 든다. 오늘 둥시는 꿈에서 피리 부는 사나이라도 만나지 않을까? 이 동화들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그리고 나에게는?
갑자기 궁금해진다. 도대체 누가, 어떤 사람들이 동화를 쓰는 것일까? 그들은 왜 아이가 주인공이고, 정답도 없는 이야기에 매료되는가? 그러고보니 그림 형제야말로 좀 이상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수집했다. 말 그대로 동화 듣기를 좋아했고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써서 모으고 편찬하기 위해 일생을 다 바쳤다. 안데르센(1805~1875) 같은 이웃의 동화작가는 직접 창작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왜 그랬을까? 동화를 읽는 경험은 형제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지금밖에 없는 이야기
야코프 그림(1785~1859)과 빌헬름 그림(1786~1863) 이 두 형제는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창작할 생각은 없었다. 형 야코프는 천성적으로 책읽기를 좋아했고, 청년시절에는 법학을 전공했을 정도로 현실의 사회문제나 정치에 관심이 깊었었다. 동화 수집이라는 작업만 빼고 보면 형제는 문헌학과 교수로, 나폴레옹이 휩쓸고 지나간 유럽의 외교적 파고를 넘나들었던 외교관으로 일생을 대학과 궁정을 오고가며 바쁘게 활동했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고 개혁가들이었다.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기도 해서 두 형제는 평생 남은 형제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형 야코프는 죽을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고, 빌헬름도 마흔이 넘어 결혼을 했다. 음. 형제가 특별히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이들에게는 동화를 수집하는 일이 다른 어떤 연구나 사업보다 중요했다. 왜?
야코프와 빌헬름의 일차적 관심은 ‘독일적인 것’에 있었다고 한다. 야고프와 빌헬름은 독일 문법서, 독일 민담집, 독일 전설집, 독일어 사전 등, 독일적 가치의 기틀을 만드는 데 평생을 보냈다. 그들이 청년기를 보낸 시대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자유, 평등, 박애가 유럽 전역에 새로운 가치로 등장한 때였다. 이웃 프랑스에서는 왕의 목이 효수된다지만 독일에서는 왕, 대공 등 여러 귀족들에게 권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프로이센 왕국, 작센 왕국을 비롯해서 헤센 대공국, 올덴부르크 대공국 등과 기타 공국, 후국, 그리고 자유도시 브레맨, 함부르크, 뤼백 등 여러 제후국으로 나뉘어져 있던 독일의 청년들에게는 왕권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서로가 평등한 관계에서 우애를 맺는 시민들이 된다는 것은 상당히 낯설게 다가오는 문제였다. 게다가 혁명 이후의 혼란기에 등장한 나폴레옹은 저 위대한 프랑스적 가치를 전유럽에 떨치기 위해 러시아 원정에까지 나서고 있었다. 혁명의 이웃인 독일에서도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에 매료된 사람들이 점점 나타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개인들에게 새로운 공동체적 상을 부여해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그림 형제는 포기를 모르는 집요한 열정으로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임했다.
그런데 어째서 동화를 수집하는 일이 이 과제를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동화에는 자유로운 존재들이 별로 없다. 폭정에 시달리는 민중이 나오지는 않지만 아이들은 마법에 걸려 꼼짝을 못하고 울고 있기가 일쑤이다. 뿐만 아니다. 어디서 평등을 찾는단 말인가? 하인리히는 주인 대신에 죽고, 고양이는 장화를 신고 주인을 위해 사기 행각을 벌인다. 마법과 운, 온갖 우연들이 인간의 행불행을 결정한다. 박애도 개구리 뒷다리 긁는 소리다. 큰형 작은 형 다 내 뒷통수를 때릴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지 않던가? 동화 속 아이들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지 않는다. 오직 제 살길 찾기에만 바빠 남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무엇보다 그림 동화는 독일적이라 할 만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숲이야 주구장창 나오지만 그 숲이 어떻게 생겼는지 열대 우림인지 툰드라인지 묘사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림 형제가 태어난 곳 하나우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위그노 출신의 사람들이 많았다. 프랑스에서 종교 박해를 받아 이웃 신교의 나라를 찾아온 이들은 많은 이야기도 함께 갖고 왔다. 그림형제는 이 이웃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들이 노래해준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이다. 형제는 어렸을 적 라퐁텐의 우화도 좋아했다고 한다. 형제가 채굴한 수많은 이야기에서 왕자와 공주들이 왕국을 찾아간다지만 그것이 독일의 어느 왕국을 말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문제는 동화에서 독일을 나타내주는 지표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이야기 자체가 주인공들이 어떤 정체성을 갖지 못하도록 진행되기 때문이다.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아이들과 씨름하는 매순간 내 온몸을 통과하는 온갖 정념들을 떠올려보면 나는 하루도 같은 내가 아닌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내가 나라고 하는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몇 가지 의식 조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시간이 균질적으로 흘러가야 하고 나 또한 그 속에서 연속하고 있어야 한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자리는 그때 그 자리와 본질적으로 같은 곳이어야 한다. 그래야 공간이라는 상수에 시간이라는 변수가 작동하는 좌표 위에서 나의 위치가 하나의 선분처럼 연결될 것이다. 그런데 그림 동화는 몇 년도, 어디에서 일어난 특정한 사건을 기술하고 있지 않다. 공주들 왕자들 이름도 고유명이 아니다. 주인공들이 자기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점은 그들이 온갖 간난신고 속에서도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다. 라푼젤을 구하려다 가시에 눈이 찔린 왕자를 떠올려보자. 그는 그저 팔자려니~ 한다. 백설 공주도 아셴푸텔도 어디 계모에게 원한을 품던가? 원한이란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이며, 상대도 어제나 오늘이나 같은 존재라고 전제할 때에만 품을 수 있는 감정이다.
동화는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지나가면 그 뿐이라는 태도를 취하지만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영리한 엘제」의 엘제는 마을 사람 누구나가 다 아는 똑순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미래를 알기 때문이다. 지하실의 맥주 창고에 걸려 있는 곡괭이를 보고 자신이 결혼을 하면 태어날 아기가 그 곡괭이에 맞아 죽게 될 거라며 운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되나?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칭송하고 멋진 신랑감 한스마저 그녀의 영리함을 높이 샀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엘제는 곡식을 베어야 할 때에 죽을 먹는다. 나중에 배 고플까봐 미리 먹고, 나중에 잠이 올까봐 미리 잠을 잔다. 이렇듯 그녀는 미래에만 산다. 결국 남편 한스는 들판에서 잠든 엘제에게 작은 방울들이 달린 새 잡는 그물을 친다. 그렇게 한 다음 집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근다. 잠에서 깬 엘제는 놀라서 두리번 거린다. 그러자 어두워진 주위에서 온통 딸랑 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문득 엘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난 나일까, 아닐까?” 엘제는 집으로 돌아가 한스에게도 물어 본다. “한스, 안에 엘제 있어요?” 그러자 한스의 답. “그래요, 엘제는 안에 있소.” 엘제는 깨닫는다. “오, 하느님, 그럼 난 내가 아니구나.”
엘제는 미래를 보고 미래에 맞추어 살아간다. 덕분에 지금 해야 할 모든 일을 놓친다. 그래서 한스는 그녀를 삶의 울타리 밖으로 쫓아내는 것이다. 마을에는 온몸에 딸랑거리는 방울 단 새 그물을 걸친 엘제를 집 안에 들여보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영리한 엘제」는 미래를 지금 끌어다 오는 감각을 거절한다. 지금이 전부라는 것이다. 자신을 집 밖으로 내쫓은 계모를 향한 복수를 꿈꾸기보다는 난처해진 상황을 도와줄 난쟁이를 찾거나(「백설공주」) 낯선 할머니라 할지라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받는다.(「열두 오빠」) 이 지점에서 ‘조실부모’야말로 동화 속 주인공의 자격이라는 점도 환기해볼 만하다. 동화에서는 친부모를 잃으면서 이야기가 시작하고 내 자식을 낳을 만하면 이야기가 끝난다. 부모-자식으로 이어지는 온갖 단선적 대물림에 동화는 관심이 없다.
공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동화는 특정한 장소를 지정하지 않는다. 공간의 산수를 묘사하는 일은 없다. 그림 동화에서 구체적인 지명이 나오는 작품은 두 개다. 하나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이고 다른 하나는 「브레멘 음악대」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하멜른은 배신의 고장이다. 브레멘 음악대는 더 문제적인데 사실 이 동화에서 브레멘은 나오지도 않는다. 은퇴한 당나귀, 사냥개, 고양이, 수탉은 음악하러 브레멘에 가던 길에 도둑들의 아지트를 털게 되고 결국 그곳에 머물러 여생을 즐겁게 보내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브레멘은 출발을 가능케 했지만 도달하지는 않는 장소이다. 이처럼 동화는 특정한 장소의 지형지세(地形地勢)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림 형제, 영혼을 발견하다
그림 형제가 독일 여러 지역의 옛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그 내용이 아니라 말들 즉, 다채로운 어휘와 표현 때문이었다. 당시까지도 문어생활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은 라틴어였고 궁정을 비롯해서 종교적이고 지적인 언어생활의 중심은 독일어가 아니었다. 독일어란 독일 민중들의 일상을 떠받치고는 있었으나 그것은 입말의 생기만 갖고 있었다. 그림 형제는 이 입말의 풍요로움을 글말로 전환시킴으로써 독일어의 형태를 확정하려고 했다. 형 야고프는 독일어 문법서 편찬을 위한 사전작업의 일환으로 항간(巷間)의 민담을 수집했다. 야코프는 1835년에는 엄청난 분량의 『독일 신화학』을 발간했고, 다시 1837년에는 『독일어 문법』을 출간했다. 당대 대문호 실러는 이렇게 극찬했다고 한다.
“야코프 그림의 《독일어 문법》은 지금까지 생각하는 일도, 시도하는 일도 없었던 저작이다. 거기에는 독일인의 언어의 혼이 살아 흐른다. 야코프처럼 언어의 본질을 꿰뚫은 사람은 없었고 언어의 비밀에 귀를 기울인 사람도 없었다.”(손관승,『그림 형제의 길』, 236쪽 재인용)
야코프의 마지막 작업은 『독일어 사전』이었다. 야코프는 다채로운 독일어의 어휘들을 모으면서 게르만 언어 변이체들의 문법을 정비했고 그것들의 의미를 확정함으로써 독일어의 표준을 만들었다. 야코프는 민담 속 어휘들이나 구문을 비교함으로써 독일어를 쓰는 여러 지방의 언어들이 방언적 차이를 지닌 같은 뿌리의 형제들임을 밝혀내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에 이어 그림 형제의 독일 동화집은 독일 지방의 언어를 하나의 뿌리를 가진 독일어로 다시 구현해낸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림 형제의 삶을 따라가도 여전히 궁금함이 남는다. 동화에서 표현되는 어휘들의 뿌리가 모두 같다는 것이 독일성을 밝히는데 도움을 준 것은 이해가 되지만 동화 자체는 독일적인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은가? 형제는 이 괴리를 어떻게 해소했을까?
독일어로 동화를 메르헨(märchen)이라고 한다. 이 말은 마르틴 루터가 말한 ‘복음(Gute neue Mär)’로부터 왔고 그림 형제 때문에 자리 잡은 말이다. 메르(Mär)는 짧은 이야기로서 전설이나 신화와는 다르다. 전설(Sage)은 구체적인 지형지물을 필요로 한다. 신화(Mythos)는 신성함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초월적인 존재가 이야기를 누빈다. 그림 형제는 땅에 완전히 붙들려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천상에 가 닿지도 않는 이야기를 따로 구분할 필요를 느꼈다. 그림 형제가 수집한 동화는 몇 차례 편집을 달리하고 내용을 조금 윤색하는 식으로 해서 점점 더 독일 전역에서 인기를 얻게 되는데 제3판에 형제는 이런 말을 남기고 있다.
“모든 동화에는 공통적으로 태곳적 신앙의 흔적, 즉 초자연적 사물의 형상 인식이 들어 있다. 이 신비는 웃자란 풀꽃들 아래 점점이 흩어져 있어서 밝은 눈에나 띄는 산산이 부서진 잘디잔 보석 파편과 같다. 신비의 의미는 오래 전에 사라졌으나, 지금도 여전히 감지되면서 동화의 내용이 되어 준다. 동화는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추구하는 우리의 타고난 욕구를 채워 준다. 동화가 알맹이 없는 상상력의 신기루인 적은 없었다.”(빌헬름 그림,『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 제3판 마지막 부분; 루돌프 마이어,『동화의 지혜』, 18쪽 재인용)
형제가 주목하는 것은 동화에서 발견되는 초자연적 사물의 형상 인식이다. 이 땅도 천상도 아닌 영역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이다. 하지만 신비와 경이는 주관적 경험이 아닌가? 그림 형제에게 동화는 처음부터 독일과 관련되어 있든 아니든 간에 객관적 실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을 촉발시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실러의 칭찬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실러는 동화에 독일어의 혼이 살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도대체 이들이 말하는 혼이란 뭘까?
그림 형제가 독일의 민담에 관심을 기울였던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노발리스(Novalis, Friedrich von Hardenberg; 1772~1801), 브렌타노(Clemens Brentano; 1778~1842) 등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자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서서히 고개 드는 산업화(1810년에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은 증기기관차를 발명했다)나 시민 혁명의 기운이 개개인의 삶 여러 차원에서 분열을 일으킨다는 점에 주목하고 그 극복의 길을 모색했다. 이들이 보기에 당대 독일 사람들은 자기 내부에서 다양한 욕구들이 충돌함을 느끼고 있었으며, 자기와 타자 사이에도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발견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자신과 자연 사이에도 깊은 심연을 보고 있었다. 이들 낭만주의자들은 ‘낭만’이라는 기치로 즉, 개인의 주관 그 중에서도 사랑을 절대시하면서 그것을 분열의 다른 축들과 합일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자기의 여러 욕망들을 미적으로 통합하고, 타자와는 자유로이 교제할 수 있는 공동체(국가)를 만들어 보고, 자연에 대해서는 생명이라는 관점을 통해 자신과 자연 모두를 그 안에 녹여내 보는 식으로 말이다(프레더릭 바이저,『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참고). 이들 낭만주의자들이 강조했던 사랑과 그림 형제가 포착한 영혼에 뭔가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이 있다. 그림 형제는 1812년 초판 동화집을 발간하면서 책의 제목을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날이야기’라고 했다. 독일어의 영혼이 가득한 이 책은 어린이와 어린이가 있는 가정의 몫이라는 뜻이다. 이런 취지를 살리고자 그림 형제는 친엄마가 자식을 죽이는 장면들을 계모가 그랬던 것으로 바꾸기도 하고, 아이들 보기에 잔인하다며 숲속 살해 현장을 모호하게 처리하는 등 아동의 눈높이에 맞게 조금씩 각색을 해나갔다. 그럼 영혼과 어린이는 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서유럽에서 어린이기의 역사성을 연구한 필립 아리에스에 따르면 아동은 근대와 함께 발견된 것이다. 그 이전에 생물학적으로 나이가 어린 존재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근대에 들어 갑자기 아동기라는 생애 주기가 부각되어서 타락한 어른과 대비되는 순수무결의 시기로 표상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다(필립 아리에스,『아동의 탄생』).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일본의 사상가는 근대 일본문학에서 내면이 출현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기쁨, 슬픔과 같은 정서적 상태로 스스로를 파악하는 개인관 역시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가라타니에 따르면 그런 식으로 개인이 자신의 마음을 응시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형식적 장치가 필요하다. 우리가 자기 바깥의 풍경을 무심한 눈을 가지고서 그러면서도 의미를 부여하면서 바라볼 때 비로소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의 상태가 인식된다는 것이다(가라타니 고진,『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사실 그림 형제가 영향을 받았던 노발리스 등 낭만주의자들에게서도 가장 중요했던 문제는 자기의식을 조화롭게 만들면서 세계 전체와 합일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합일의 시도를 사랑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핵심적인 사안은 부단한 쇄신을 통한 개인의 자기 창조 즉 성숙화였다.
가라타니 식으로 바꾸어 말해보자면 낭만주의자들에게도 ‘발전하는 개인’이라는 명제가 먼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관념을 구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낭만주의자들은 역으로 타자와 자연을 발견했다. 그들은 ‘나는 발전해야만 한다!’ 라고 하는 도식을 성립시키기 위해 내가 극복해야 할 대상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림 형제는 여러 독일 지방의 옛이야기가 신비롭다고 했고 그 신비는 아이에게 어울린다고 보았다. 그들은 요정과 마녀가 출몰하고 이성의 거친 논리로 재단할 수 없는 온갖 신비로 가득한 그 말의 세계를 문자로 가시화함으로써 아동의 독일어 학습물로 바꾸었다. 그렇게 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말하고 들으며 즐기던 민담은 메르헨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마 그림 형제가 이야기를 청해 듣던 독일 여기저기의 ‘옛사람들’에게는 헨젤과 그레텔의 굶주림이 전혀 신비롭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먹고 사는 일에 급급했기에 아이들을 버리기도 했을 테고 재투성이로 지내면서 쥐나 호박과 함께 뒹굴며 잠을 청하기도 했을 것이다.
근대 이전의 언어생활은 지금처럼 민족어 중심의 국어 생활이 아니었다. 남녀의 언어가 다르고, 대장장이와 소몰이꾼의 언어가 달랐다(이반 일리치,『그림자 노동』). 그림 형제는 교회에서, 시장에서, 물레방앗간에서, 꿈에서, 다 다르게 쓸 수 있었던 사람들을 독일어를 쓰고 있는 인간 즉 독일인으로 보았다. 그들의 언어가 집대성된 것이 메르헨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할까? 그림 형제의 앞에서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저 사람들은 아직 어린이나 다름없으며, 그들은 옛이야기 안에서 몽상을 즐기는 단계로부터 성숙하게 자기 영혼을 고양해 나가는 단계로 이제 걸음을 내딛어야만 한다.
그림 형제는 학문의 자유나 독일 시민들의 평등한 사회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왕국의 권위적인 질서나 구태의연한 신분제의 인습에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저작을 출간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진정 독일의 민담과 민속을 아꼈다. 그렇지만 그림 형제가 동화를 통해 발견한 것은 동화를 즐기던 사람들의 영혼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을 먼거리에서 바라보고 있는 자신들의 영혼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생각한 독일을 사랑하기 위해 어린이의 메르헨을 찾아내었다.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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