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火 - 혁명가의 마음
김해완(남산강학원 Q&?)
먼저 전국에 계신 정화분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왜 앞의 천간들과 달리 이런 부정적인 시를 골랐는가! 정화에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느냐! 당연히 그렇지 않다(^^;). 오해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시를 고른 까닭은, 이 힘 없게 보이는 시가 거꾸로 정화의 뜨거움을 더 생생히 보여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찬찬히 읽어보자. 시인은 왜 이 시를 썼을까? 단순히 불이 싫었던 게 아니라면 여기에는 어떤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을까?
맨 처음 시를 보자마자 떠올랐던 것은 다름 아닌 혁명의 이미지였다. 새삼스러울 것 없이, 혁명과 불꽃은 오래 전부터 서로를 상징해주는 짝꿍들이다. 맹렬하게 타올라 금세 너도나도 사방으로 퍼지는 겉모습이 닮아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나는 이 둘의 관계에서 ‘따뜻한 마음’을 떠올린다. 언제부터인가 마음이 따뜻하지 않은 사람이 혁명에 뛰어들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헐벗은 자들에게 옷 한 가지라도 덮어주는 따스한 마음, 무자비하고 날카로운 폭력 앞에서 굴하지 않고 맞서는 뜨거운 용기. 이것은 이념으로 교육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개개인의 신체에서부터 먼저 반응하는 것들이다. 사회를 뒤집어엎을 만한 대사건은 소소해 보이는 이런 행동들이 하나하나 모일 때 비로소 발생한다. 작은 불씨에서 번지는 큰 불! 이렇게 불은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다. 신화 속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죽음을 무릅쓰고 인간에게 가져다준 선물도 바로 불이었다. 태양(丙火)의 빛이 저 멀리서 인간세상을 굽어 살피는 신과 같다면, 불꽃(丁火)은 살과 살을 맞대어 전해지는 체온처럼 바로 옆에서 열기를 불어넣고 무쇠를 제련해내는 인간의 기술이다.
그러나 내가 시에서 보았던 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혁명이 아니라 혁명이 끝나버린 후 착잡하게 가라앉은 세상의 풍경이었다. 문제는 불꽃이 금방 꺼져버린다는 것에 있다. “불꽃이 피어나면 / 얼마를 가리.” 혁명이 일어났으면 좋은 세상이 와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혁명 후에 찾아오는 것은 기이한 허무다. 사건의 소용돌이 가운데에 있을 때는 당장이라도 어마어마한 변화를 해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조급한 자신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 우격다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건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를 찾아가고, 마침내 우리는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깊은 간극이 우리를 절망에 빠뜨려 파멸의 길로 몰아가기도 한다. 68혁명 이후 많은 젊은이들이 마약에 빠지거나 자살하는 길을 택했던 모습, 3·1운동 이후 그 열기를 어찌할 바를 몰라 모두가 연애열풍으로 뛰어들었던 모습이 이와 같다. ‘화(火)의 시대’라 불리는 지금 이 시대, 우리 세대는 이 공허함을 더욱 격렬하게 체험하고 있다. 우리는 주로 소비에 열을 올리지만 그 결과는 지름신이 강림하셔서 통장잔고를 불태운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가장 화려하게 꽃피우는 시기이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감출 수 없는 헛헛함과 찌질함이 함께 한다는 것, 이게 청춘의 딜레마이자 자본의 함정이다.
이것은 불의 다른 측면이다. 불은 속이 텅 비어 있다. 제 살을 깎아먹으면서 타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못했다가는 내적 원동력을 갖지 못해 초라하게 사그라지거나, 분별없이 모든 것들을 시꺼먼 재로 만들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리고 시위나 청춘사업은 대부분 이런 최후로 막을 내린다. 시인은 한탄한다. “심청의 인당수 태우지 못하고 내 푸른 넋도 태우지 못해 / 타는 너.” 왜 혁명은 계속되지 못하는가? 혹은, 우리가 정작 태워야 할 대상을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정화는 주로 촛불에 비유된다. 정화는 흔들리는 촛불처럼 귀도 얇고 병화에 비해서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정화에게는 병화가 갖지 못하는 힘, ‘빛’이 아닌 ‘열’의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연예인 같은 화려함보다도 불꽃같은 인생을 보며 감동받고, 따뜻한 사람이 곁에 있어서 살만하다고 느낀다. 실제로 주위를 둘러보면 정화인 사람들은 참 심성이 따뜻하다. 그들은 응축된 열기로 옆사람들을 도와주고, 필요한 순간에는 불굴의 의지를 보인다. 겉으로 뽐내지 않는 대신 안으로는 더욱 야생적인 불길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화의 특성은 ‘급함’으로 이어진다. 정화는 병화보다도 더 급하다. 당장 자기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굉장히 열 받아 하거나, 주위를 충분히 돌아보지 못하고 마음을 불태우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상황이 악화되기도 한다. 혹은 마음을 너무 쉽게 돌려버린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모습과 바람 앞에서도 흔들리는 모습, 정화는 이 두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
“부질없어라 / 참숯이 되거라” 라는 시구는 갑작스러운 비약이다. 한바탕 불바다를 겪은 시인은 이제 불꽃을 부정하지도 않고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 경계를 껑충 뛰어넘어 다만 담담하게 그 가능성을 열어놓을 뿐이다. 하지만 이 담담함이 데일 것처럼 뜨겁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이 멘트에서 거꾸로 “포기하지 말라”는 시인의 메시지를 듣는다. 청춘의 열기는 급하게 달려들었다가 이른 실패에 급하게 좌절한다. 하지만 급격하게 타오른 불꽃이 급격하게 사그라지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의 수순이다. 혁명의 진정한 원동력은 겉에 있는 게 아니라 속에 있다. 우리가 꺼뜨리지 말고 계속 살려야 할 불씨는 혁명이라 불리는 대사건이 아니라, 내 안의 용기와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 지치지 않는 의지인 것이다. 이 불씨가 꺼지지 않는다면 혁명은 언제고 다시 타오를 수 있다. 촛불의 고고함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와중에 한 줌 빛으로 꿋꿋하게 주변을 밝히고 있는 데에서 나온다. 어떤 상황에서든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옆 사람에게 열기를 나누어주고 어디에 있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주변을 밝히는 것. 이거야말로 가장 뜨거운 온도다.
그러므로 정화는 연대할 때 가장 커다란 힘을 발휘한다. 연대는 정화의 불꽃을 오래오래 살릴 수 있는 힘이다. 사년 전 광장을 가득 메웠던 것은 다름 아닌 이 수많은 ‘촛불들’이었다. 하나의 촛불은 끌 수 있을지 몰라도 점점 수많은 촛불들로 번지는 불씨를 잡을 수는 없다. 하나하나의 촛불들은 오버하지 않고 그 불꽃을 조용히 간직하지만, 그것들 서로 함께 만들어내는 시너지 효과는 상상초월이다. 이게 바로 “참숯이 되라”는 시인의 메시지가 아닐까. 시인은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었다. 불꽃이 허무하게 되어버리지 않으려면, 그 열기를 가장 깊숙한 곳에 품어 금세 꺼뜨리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는 남을 위해 연탄재 한 장 되어본 적 있는가. 혁명은 잿더미 속 꺼지지 않는 불씨로 계속된다.
※ 7월 소서를 기점으로 정미월(丁未月)이 시작됩니다. 병오월보다 더 뜨거울 정미월의 간지데이도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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