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연약하지만 강한 생명력, 을목

‘너머’로 나아가는 힘

김해완(남산강학원 Q&?)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그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들풀의 생명력. 그것은 아름답다. 조금의 흙만 있다면 어디서든 되살아나는 모습은 아름드리 나무 같은 포스는 없어도 은은한 감동을 준다. 시적인(?) 감동이라고 할까. 들풀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으면!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우리는 풀을 잡기 위해서 약을 뿌린다. 풀은 우리를 약 올리듯이 계속해서 고개를 쳐든다. 풀은 아름답기보다는 독하다. “물 한 방울 없”어도 “말없이 그 벽을 오르”는 생존본능, 한 스텝씩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재빠른 눈치와 계산능력, 하나로 안 되면 수천 개를 이끌고서라도 “결국 그 벽을 넘는” 집념. 풀. (난 독하면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프다*^^*) 할 수 있는 주위의 모든 환경을 이용하고, 살 수 있는 모든 곳을 감싸며 타고 올라간다. 그렇게 풀은 끈끈이주걱처럼 환경에 찰싹 달라붙는다. 벽돌 담장을 가득 덮고 있는 담쟁이의 모습에서는 살고자 하는 의지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원래 옛날부터 벽에는 담쟁이를 심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담쟁이는 잦은 풍파에도 견디는 벽을 타고 올라가 균열을 내고 결국에는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뒤집어보면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은 연약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부터 가장 밑바닥에 있는 백성들을 민초民草라고 불렀다. 힘도 무기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절대로 죽지는 않는 잡초 같은 존재들. 이게 바로 천간 중에서 두 번째 글자인 을목乙木의 모습이다. 갑목이 겨울의 언 땅을 돌파하기 위해 수직으로 상승하는 기운을 택했다면, 그와 달리 을목은 모든 곳으로 퍼져 나가기 위해 높이를 포기했다. 대신 어느 조건도 따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끈질긴 생명력을 얻었다. 을목은 생명력의 화신이지만 그것은 연약함과 강인함을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보여준다. 을목은 절대로 정면돌파 하지 않는다. 기둥이 있으면 휘감고, 바람이 불면 눕고, 바위가 있으면 타넘고, 척박한 곳이면 포기해버린다. 햇빛과 물 등 많은 것이 필요하기에 기회만 되면 다른 곳으로 튀어버린다. 어쩌면 풀은 한편으로는 유연하지만 한편으로는 약았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서는 힘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는 이런 모습이 줏대 없게 보여서 싫었다. ‘살기 위해서’라는 말에는 너무 많은 함정이 있는 게 아닐까? 다 함께 파업하고 투쟁하고 견디던 그 마음이 순식간에 내 집, 내 자식, 내 자동차로 돌아서기도 한다. 나만 살면 된다는 마음이다. 억척스럽게 농사지어서 자식들을 대학에 보낸 나의 할머니는 더 이상 돈을 벌 필요가 없는데도 몸을 부서뜨리면서 청소일을 계속 하신다. 살아야겠다는 것 외에는 없는 마음이다. 강인한 생존능력은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삶에 대한 집착이 되기도 한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내 목숨뿐이라면, 이것처럼 시시한 일은 없지 않을까. 스스로 설 수 없기에 벽 위를 기어야 하는 풀. 풀과 같은 인생은 오래 살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코 폼 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詩가 말한다. 담쟁이가 벽을 넘을 수 있는 까닭은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가기 때문이라고. 시는 우리에게 풀 하나의 ‘약음(?)’이 아니라 바로 집합성을 느끼게 해준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풀이 달랑 혼자 있는 것을 보았는가. 혼자 있는 풀은 밟히면 그대로 끝이지만, 하나가 아닌 여럿이 존재하는 풀밭에서는 끝이라는 말이 그 의미를 잃는다. 하나가 죽으면 다른 곳에서 두 개가 돋아나고 이곳에 약이 뿌려지면 저곳으로 씨를 퍼뜨리는 풀(들). 그들의 집합적 신체가 우리 눈에는 그냥 ‘독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풀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쇠심줄보다 질긴 그 끈기는, 약하기 때문에 살아남으려는 몸짓이 아니라 집합적 신체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자 표현이다. 내가 나 자신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것들과 네트워크를 이룰 때, 그 ‘네트워킹’을 멈추지 않고 계속될 때 우리는 최고의 끈기를 본다. 비바람? 안 무섭다, 오라고 하지. 그 속에서 또 다른 관계를 만들어내면 되니까! 이 세상에는 나 혼자 살아남는 것과 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구별되지 않는 차원이 존재한다. 그곳에서 시인은 담쟁이와 마주친 것일 테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고”서, 범람하는 녹빛으로 희망과 절망의 이분법을 무화시켜 버리는 풀.

사용자 삽입 이미지앞으로는 너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잊지 말고 다음의 원칙을 적용하라. "이것은 불운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을 용감하게 참고 견디는 것은 행운이다." -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중


시선을 좁히면 당장 여기에서의 생존밖에 보이지 않는다. 살기 위해서는 이 좁은 바닥에 매달리고 눈치를 봐야 할 것 같다. 그럴 때 우리는 벽 위를 기는 것과 같은 비참함을 느낀다. 하지만 을목의 힘을 잊지 말자. 생명의 힘은 개인 너머로, 한계 너머로, 벽 너머로 나아가 수많은 다른 것들과 만나는 데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늘 나를 살게끔 하는 다른 풀들 속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여기서 살고자 하는 몸짓은, 얼마든지 다른 것을 살게 하고 있으며 또한 이미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선을 확장시킬 때 우리는 삶에 대한 집착에 머무르지 않고 나를 비롯한 모두를 살리는 끈기를 알게 된다. 메마른 벽을 푸르게 덮는 담쟁이 잎들. 지구의 가장 밑바닥에서도 생명은 살아간다! 징한가? 아니, 그곳 역시 집합적 신체인 것이다(^^).

겨우내 언 땅을 뚫고 나온 갑목의 기운이 이제 사방팔방으로, 온 들판을 목의 기운으로 물들이면서 퍼져 나간다. 모든 것이 이 위에서 자라난다. 그렇게 계속 나아가다보면 어느 날 화려한 불꽃이 만개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오래 살고 볼 일 아닌가. 우리가 지금 당장 들이댈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바로 나의 생, 그 끈기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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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달집 2012.05.07 12:30 답글 | 수정/삭제 | ADDR

    담쟁이 벽에 詩를 얹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담쟁이는 詩를 타넘고
    詩는 담쟁이를 타넘고
    수많은 다른 것들과 만나지 않았을까.

    • 북드라망 2012.05.07 14:25 수정/삭제

      으음...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댓글이네욤. 홍홍홍;;
      시와 담쟁이, 또 다른 것들을 타넘을 수 있는 '을목스러움'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

  • 편집장 2012.07.12 14:11 답글 | 수정/삭제 | ADDR

    도종환 시인의 시를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모두 독한 걸까요.
    절망을 오르는 우리들의 의식도 어디서 독한 발을 내려놓고 있겠죠.
    요즘 더 독해져야 한다고 누군가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되는 세상, 그것을 견디기 위해서도....

    • 북드라망 2012.07.12 14:27 신고 수정/삭제

      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독해지는 것인지 독하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인지는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혹은 둘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지도요~ 쿨럭쿨럭;;;
      하지만 지금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가 생명을 움직이는 힘이 되겠지요.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저는 이 시에서 이 부분이 가장 감동이었어요. ㅠ_ㅠ)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