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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리포트

[쿠바리포트] 당(糖) 이야기

by 북드라망 2020. 2. 25.

당(糖) 이야기



‘아쑤깔’의 나라


쿠바에 와서 크게 변한 것 중 하나는 요리 습관이다. 설탕을 팍팍 넣는다. 야채 볶음에도 한 숟가락, 스파게티에도 한 숟가락, 국에도 한 숟가락씩 들어간다. 하지만 설탕이라니, 예전 같았으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양념 아닌가? 어린 시절을 더듬어봐도 어머니가 부엌에서 설탕을 사용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연구실에서 주방 당번을 하면서 요리를 익힐 때도 단맛이 필요하면 올리고당을 조금 사용하라고 배웠을 뿐이다. 그 덕분에 뉴욕에서 본격적으로 내가 살림을 꾸리게 되었을 때도 설탕은 언제나 찬밥 신세였다. 부엌 구석자리에 밀어넣고서, 커피를 마실 때나 가끔씩 꺼내서 한 스푼 뜨는 게 다였다.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가 되었다. 커피를 마실 때만 설탕을 쓰지 않을 뿐(달달하고 쓰디쓴 쿠바 커피에 질려버렸다), 그 외에 경우 설탕은 거의 언제나 소환된다. 내가 쿠바 생활에 스트레스 받는 것과 정비례하여 설탕통의 높이는 팍팍 줄어든다. 오예, 아쑤깔(azúcar : 설탕)!




내가 이런 변화를 겪게 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첫째, 쿠바에는 먹을 게 별로 없다. 전후(戰後) 상황처럼 음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은 아니고, 다만 그 버라이어티가 부족할 따름이다. 여기서는 늘 입이 심심하다. 그래서 먹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버티기 힘든 나라다. 식상 고립에 간식 먹는 습관도 거의 없는 나조차 설탕을 찾으니…… (거꾸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간식을 통해서 알게 모르게 섭취하는 설탕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소리다.) 둘째, 쿠바에는 양념도 별로 없다. 소금, 설탕, 식초가 다다. 한국에서 양념을 공수해가더라도 맛을 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렇게 저렇게 요리해봐도 맛은 여전히 심심하다. 그래서 종국에는 설탕을 한 움큼 집어넣고 ‘음, 그래, 이 맛이지’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셋째, 없는 게 있는 것보다 많고, 오늘 물건이 있어도 내일이면 사라지는 이 불안정한 나라에서, 설탕만큼은 언제나 차고 넘친다. 보데가(Bodega)에 가면 설탕이 몇 포대기 씩 쌓여 있다. 아, 게다가 이 싸디싼 가격이란! 500원이면 큰 설탕통을 다 채울 수 있다.


이런 나의 근황을 공유하면 다들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더라도 식습관은 지켜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충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쿠바에 1년 이상 머문 외국인들은 말 없이, 격하게 공감하면서 내 이야기를 듣는다. (다들 사는 꼴이 비슷한 거다.) 이런 상황은 지난 400년 동안 스페인의 설탕 농장으로 존재해온 쿠바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가 끝난 지 100년, 혁명이 일어난 지 60년이 지나도 ‘설탕’이라는 식민지 식품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우리 발로 쿠바에 걸어들어온 것을. 이곳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마법의 물질, 당(糖)


설탕 섭취양을 줄여야 한다는 말은 의사가 아니라 꼬꼬마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건강 상식이다. 설탕은 21세기 ‘건강의 적’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런, 나 이러다가 의사가 되기 전에 환자부터 되는 게 아닐까? 그렇지만 이런 낙인은 설탕에게 너무한 짓이다. 설탕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 잘못은커녕, 설탕은 ‘몸’이라는 생태계가 존재하고 또 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생각해보라 , 왜 우리는 연애 앞에 ‘달달하다(sweet)’는 수식어를 붙일까? 연애의 순간에 혀를 갖다대고 맛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은 연인과 함께 있을 때의 기분이 설탕을 먹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있다는 기분, 힘이 솟구치는 기분, 호흡과 혈류가 빨라지는 기분, 청춘의 펄떡거리는 신진대사에 연료가 팍팍 때워지는 기분. 이 모든 것은 설탕의 실질적인 힘이다. 우리의 뇌가 괜히 달달한 맛을 좋아하도록 훈련된 게 아닌 것이다.


우리가 ‘설탕’이라고 부르는 물질은 자당(蔗糖) 혹은 수크로오스(sacrose/sacarosa)라는 분자덩어리다. 이 고분자를 두 개로 쪼개면 화학적으로 동질한 분자 하나가 나온다. 이게 바로 포도당(葡萄糖), 혹은 글루코스(glucose/glucosa)다. 이 당은 밥이나 빵 같은 탄수화물을 분해해도 얻어지는데, 대신 이 친구들은 이당류인 설탕보다 분자 크기가 훨씬 더 거대한 다당류다. 이런 당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바로 에너지원이다.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 사실 분자의 세계에서 당은 지나치게 단순한 친구들이다. 단백질이나 지방 같은 애들에 비해서 다양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고 정교한 맛도 없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친구들이 구현해내는 메커니즘은 아주 심플하면서도 효율적이다. 음, 단순함의 미학이랄까? 그 모습이 너무 신통방통한지라, 마치 당이 애초부터 ‘생명의 에너지원’이 되기 위하여 존재한 마법의 물질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런 인과 관계는 사실이 아니다. 그 누가 생명의 기원을 알 수 있겠느냐마는, 최소한 이것은 어떤 내재성도 거부하는 현대 과학의 세계관에는 맞지 않는다. 자연계에서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영양소가 당이다. 이 풍성한 물질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다가, 어느 날 우연의 일치로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신진대사 경로’를 구성했더니, 거기에 더 많은 우연의 호의가 덧입혀져서 생명이라는 희귀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리라. 아, 그러나 이는 말하기는 쉬워도 진심으로 믿기는 어려운 이야기다. 우리가 어쩌다 손에 거머쥐게 된 ‘존재함’이라는 행운의 카드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낯선 탓이다. 이런 아연함은 당 뿐만 아니라 단백질 이야기에서도, 지방 이야기에서도, 신경 이야기에서도 느껴질 것이다.


여하튼,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포도당이 에너지원이라는 말에는 다들 별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밥(설탕)을 먹으면 힘이 난다’는 것은 우리가 숨을 쉴 때부터 익혀온 진리니까.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삼시세끼 거르지 말아라, 이런 주옥 같은 말들도 다 일상의 과학에서 나온 것이다. (쿠바에 있으니 더욱 빛나는 구절들이다. 한국 밥이 그립다!) 그렇지만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건 엄밀히 말해서 포도당이 아니다. 포도당은 에너지를 생성해내는 ‘기계’를 굴리는 연료다. 그렇다면 그 기계는 어디 있을까? 바로 세포 속에 있다. 이곳이 바로 우리의 밥과 디저트가 도착하는 최종역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잠시만 세포 이야기로 빠지겠다. 당과 직결되는 건 아니지만, 이것도 빠뜨리면 섭섭할만큼 아연한 이야기니까.


 

살아있는 발전소, 세포


세포는 살아있다. 이 문장을 읽고도 별 느낌이 없이 지나칠 게 뻔하다. 그러니까 다시 읽어보시라. 세포는, 살아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모습도 벌레처럼 생긴 이 친구를 하나의 인격체로 느끼기는 힘들겠지만, 사실 엄밀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생명의 권리를 운운할 때 거기에는 세포도 포함되어야 맞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다양체라는 명제는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의 몸은 이 수많은 ‘세포-생명체’를 아주 촘촘하게 수용하고 있는 생태계니까.) 아닌 게 아니라, 세포는 정말 우리처럼 밥도 먹고 숨도 쉬고 똥도 싼다. 협업도 하고 소통도 하고 죽음도 맞이한다. 이런 다양한 활동 중에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호흡이다. 세포 안에 있는 미토콘드리아는 폐에 비교될 수 있는 세포 기관인데, 폐처럼 산소를 들이쉬고 이산화탄소를 뱉어낸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에너지가 생겨난다.


에너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이것을 기(氣)라고 부르든, 물리학에서처럼 E라고 표기하든, 우리는 그것을 느끼기만 할 뿐이다. 에너지는 자연이 살아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가장 직감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힘이다. 그러니까, 내가 위에서 쓴 ‘에너지가 만들어진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다. 에너지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자연 도처에 언제나 존재한다. 문제는 이 에너지의 흐름을 절단 및 채취하여 원하는 방식으로 ‘재활용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가령 전기는 자연 현상이지만, 인간은 발전소에서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일부러 일으키고 각 가정집으로 송전하여 집에서도 핸드폰을 충전할 수 있도록 한다.미토콘드리아가 하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그냥 두면 이리저리 흩어질 에너지를, 몸의 적재적소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특수한 분자에 가둬놓는 것이다. 일종의 에너지 캡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분자는 바로 ATP(adenosine triphosphate/adenosίn trifosfato)라는 친구다. 아데노신이라는 합성물에 인산염 세 개가 단단히 붙어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이 결합이 어찌나 센 지, 결합이 분해되어서ATP가 인산염 하나를 잃어버리고 인산염이 두 개밖에 없는 ADP로 변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방출된다. 미토콘드리아는 바로 이 점을 노린다. ADP를 ATP로 만들어서 몸 속 구석구석으로 보내면, 필요할 때마다 결합을 끊어내고 거기서 방출되는 에너지를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세포 호흡의 정수다. ADP를 ATP로 만드는 것 말이다. 소모되는 산소도, 방출되는 이산화탄소도, 모두 그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데노신과 인산염을 연결하는 결합이 그토록 단단하다면, ADP에 인산염을 하나 더 붙여서 ATP로 변환시키는데 에너지가 더 드는 것 아닐까? 아니다. 세포 호흡이 진행되는 과정은 정말 기가 막히게 정교해서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는다! 세포 호흡을 일으키는 미토콘드리아의 기계는 세 가지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단 크렙 회로(cycle of Kreb/ciclo de Kreb)가 있다. 이것은 아세틸 조효소(Acetyl CoA/Acetil CoA)라는 물질을 8단계에 거쳐 분해하는 회로인데, 이 과정에서 NAD+와 FAD+ 라는 두 종류의 물질에 수소 분자가(H)가 탑재된다. 이 둘은 두 번째 메터니즘으로 수소 분자를 옮기는 교통수단과 같다. 이렇게 옮겨진 수소 분자는 수소 이온이 되어(H+) 전자 운송자(transporter of electrons/transportador de electrones)라고 불리는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서 이동한다. 이 벨트의 끝에는 산소가 버티고 서서 수소 분자를 강력하게 끌어당기는데, 이 힘으로 벨트가 움직인다고 보면 된다. (이래서 호흡에는 산소가 필요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벨트의 작동 과정에서 미토콘트리아 내부에 있는 다른 수소들이 미토콘드리아 막(膜) 밖으로 밀려난다는 것이다. 막 밖에는 이미 수소의 농도가 짙은 터라, 쫓겨난 수소들은 다시 막 내부로 되돌아 오려고 한다. 이때 이 수소들이 재진입하는 곳이 바로 세 번째 메커니즘이 벌어지는 장소, ATP합성 효소라는 단백질이다. 수소 분자들이 들어올 때마다 ATP 효소는 뱅글뱅글 돌아가기 시작한다. 잘 상상이 안 된다면 물레방아를 떠올려보라. 물이 떨어질 때마다 회전하고, 바로 그 힘으로 방아를 찢지 않는가? ATP 효소도 마찬가지다. 효소가 한 바퀴 회전할 때마다 그 힘으로 세 개의 ADP가 세 개의 ATP로 변환된다. 미션 컴플리트, ATP 생성 완료! 그러니까 세포는 외부 에너지 없이도 필요한 물질만 있으면 알아서 가동되는 셀프-발전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우리의 포도당은 도대체 왜 에너지원이라고 불리는 걸까? 당을 분해하고 또 분해하면 나오는 게 바로 아세틸 조효소이기 때문이다. 아세틸 조효소는 이 모든 메커니즘에 시동을 거는 최초의 물질이다. 포도당이 없으면 아세틸 조효소도 없고, 아세틸 조효소가 없으면 크렙 회로가 돌아가지 않는다. 크렙 회로가 작동하지 않으면 도미노 효과처럼 전자 운송자도, ATP 합성 효소도 모두 작동을 멈춘다. 셀프-발전소가 정지하는 것이다. 결과는? 에너지 부족, 배터리 방전이다. 그리고 우리 몸은 핸드폰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 배터리가 방전되면 다시는 전원이 켜지지 않는다.


세포 호흡은 생명의 근원이다. 왜 숨이 막히면 죽음이 가깝게 느껴질까? 산소가 사라지면서 전자 운송자의 컨베이어 벨트가 멈추고, 덩달아 모든 세포 호흡이 멈추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포 호흡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포도당은 산소만큼이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질이다. 자, 이제 설탕에 억울하게 씌인 오명을 씻을 수 있게 되었다. 당이 없으면 호흡도 없고, 호흡이 없으면 삶도 없다. 달달한 연애 없는 청춘이 진정한 청춘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과 같이!



마법에는 컨트롤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단 음식에 환장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몸 구석구석에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데 어찌 이 달콤한 물질을 싫어할 수 있을까? 진한 초콜렛 시럽이 뿌려진 케이크가 눈 앞에 있다고 상상해보자. 우리의 반응은 불 보듯 뻔하다. 정신줄을 놓아버린다, 흡입한다,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신다. 이야기 끝!


하지만 우리의 몸은 우리의 정신보다 더 강한지라, 이렇게 쉽게 자제력을 잃지 않는다. 몸은 24시간 내내 컨트롤 시스템을 가동시켜서 피 속에 녹아있는 포도당의 농도(혈당치)를 일정하게 조절한다. 그리고 이 조절의 범위는 몹시 좁다. 우리가 낮에 초콜렛 케이크를 세 조각을 해치울 때나, 밤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공복에 8시간 수면을 취할 때나, 우리 피에 녹아 있는 포도당의 농도에는 큰 차이가 없다.




왜 몸은 포도당의 존재에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까? 포도당은 세포의 존재를 가능케 한 마법의 물질이지만, 이 마법은 철두철미한 컨트롤 아래 놓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힘에 역으로 당하게 된다. 혈당치가 높다면 그것은 당이 세포 속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흡수가 안 되는 것이다. 피 속에 남아도는 당은 독(毒)이 되어 온 몸으로 퍼진다. 기관을 상하게 하고, 신경계를 공격하고, 시력을 잃게 한다. 반대로 혈당치가 낮다면 이는 말 그대로 온 몸에 당이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사지에 힘이 빠지고 사리판단이 흐려진다. (뇌는 포도당 대식가다. 포도당의 20%가 모두 뇌로 몰린다.) 에너지를 만드는 세포 호흡이 비상사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러니 우리의 몸은 늘 포도당 농도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간은 우리 몸에서 포도당의 컨트롤 타워를 맡고 있다. 그리고 이 컨트롤 타워에 신호를 보내는 것은 췌장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은 직후에는 혈당치가 확 높아지는데, 그러면 이를 감지한 췌장에서 호르몬 인슐린을 분비한다. 인슐린은 호르몬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탁월한 멀티태스커다. 근육 세포와 지방 세포에서는 포도당을 흡수할 수 있게 도와주고, 다른 세포들에서는 포도당을 분해해서 세포 호흡을 더 빨라지도록 하며, 간에서는 포도당을 사슬처럼 줄줄이 연결해서 글루코겐(glucogen/glucόgeno)으로 변신시킨다(포도당을 저장하는 방법이다).


이 모든 일들이 혈당치를 정상으로 되돌리는데 도움을 준다. 이와 반대로 공복 상태에서 혈당치가 낮아지면 췌장에서는 또 다른 호르몬인 글루카곤(glucagon/glucagόn)이 된다. 글루카곤은 인슐린과 달리 곧바로 간으로 직행한다. 그리고 아까 생성되었던 글루코겐을 분해하면서 포도당 덩어리들을 풀어놓는다. 자유로워진 포도당들은 피를 타고 자신을 필요로 한 곳으로 몸 구석 구석 흘러간다. 낮았던 혈당치도 원상복구가 된다. 포도당에서 글루코겐으로, 또 글루코겐에서 다시 포도당으로 물질의 형태가 변화하는 이 과정은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 이는 당이 단순한 구조의 분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마디로, 종종 우리가 정신줄을 놓고 단 음식을 왕창 흡입하더라도 포도당의 마법에 당하지 않는 까닭은 몸의 자제력 덕분이다. 허리 숙여 감사해야 할 일이댜. 그렇다고 해서 이 능력을 너무 믿고만 있으면 안 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몸의 지혜에 협력하지 않는다면, 지나치게 혹사당한 간과 췌장이 파업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결과는 당뇨병!) 그러니까 설탕을 악마의 음식으로 지탄할 것이 아니라, 그 섭취양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내 생활 습관을 바라봐야 한다. 환경의 온갖 변화에도 불구하고 혈당치를 칼 같이 조절해내는 몸의 노고를 안다면, 쉽게 그 노력을 배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당(糖)의 연금술사


당 섭취를 자제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우리 몸은 당을 분해하고 조절하는 능력 뿐만 아니라, 당을 창조해내는 능력도 있다. 단백질 쪼가리(아미노산)과 지방 쪼가리(글리세롤)를 가지고서 정말로 전혀 다른 물질인 포도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창조 행위는 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특수한 상황에 처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무산소 운동과 단식이다. 이 얼마나 신기한가. 둘 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권장되는 활동이다!


모두가 당의 연금술사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토록 설탕에 집착하는 것일까? 옛날에야 못 먹고 살았다손 치더라도, 오늘날에는 음식이 넘쳐난다. 음식이 넘쳐난다 뿐만 아니라 집중적으로 설탕 섭취를 부추기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해보면 만인의 신체에 에너지가 과잉으로 저장된다는 뜻이다. 이 넘쳐 흐르는 에너지가 어디로 가는지 관찰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것은 자본의 흐름과 함께 흐른다. 온라인 게임으로, 쇼핑으로, 일 중독으로…… 모두 설탕이 만들어낸 ATP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우리가 무산소 운동과 단식을 통해서 당을 생성해 낸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자본의 흐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해서 형성되는 당은 피 속에 축적되지 않고 순환의 고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무산소 운동이 간을 통해 만들어낸 포도당은 다시 근육으로 되돌아가서 에너지원이 된다.




능동적인 삶을 바란다면 능동적인 정신을 갖춰야 한다. 능동적인 정신은 물론 능동적인 몸에 깃든다. 그리고 이때 ‘능동적인 몸’이란 추상적으로 이해될 말이 아니다. 이는 몸의 능력을 실제로 100% 끌어내서 쓴다는 뜻이다. 가령, 설탕을 먹는 대신 운동과 단식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간식을 먹고도 여전히 단 게 땡긴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운동복을 입어라. 또 다른 ‘달달한’ 세계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설탕의 나라에서


오늘도 나는 저녁 식탁에 설탕을 뿌린다. 설탕을 예전보다 두 배는 더 섭취하면서도 내가 별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까닭은, 내 피에 혈당치를 더 높여야 한다는 몸의 욕구 때문이다. 예전보다 군것질도 훨씬 적게 하는 데다가, 공부 때문에 뇌세포가 포도당 섭취를 더 활발하게 하고 있다. 게다가, 설탕을 아무리 많이 뿌려 봤자 나의 식탁은 여전히 한국의 풍경이다. 밥과 채소, 국이 있다. 설탕이 뿌려진 바나나 튀김이나 혀를 얼얼하게 할만큼 달달한 쿠바 디저트는 없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풍경은 다르다. 사람들은 중년만 넘어가면 지나치게 푸짐한 몸집을 자랑한다. 비만, 당뇨병, 고혈당증처럼 선진국에서 보기 쉬운 질병이 만연하다. 의사가 아닌 평범한 쿠바인들도 이것이 모두 설탕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고쳐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 몇 백 년 간 뿌리 내린 식습관이 하루 아침에 바뀔 리가 없다. 현대에 와서 설탕 섭취가 전 세계적으로 권장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설탕은 쿠바의 땅에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곳에서 정제된 에너지원은 전 세계로 뻗어나갔고, 식민지 제국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혁명을 일으키는 힘이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지금, 병으로 남았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식민지 과거의 저주일지도 모른다. 정신보다도 몸에 더 깊숙이 남아 있는, 이미 정체성이 되어버린 흔적. 그러나 병이 있는 이상 치료도 있다. 살아가는 이상 방법은 있다. 쿠바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녹아 있는 이 달콤한 물질을 이곳에서 뿌리 뽑을 수 없다면, 운동하라는 끊임없는 잔소리만이 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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