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쿠바리포트

[쿠바리포트] 새로운 집, 새로운 모험

by 북드라망 2019. 12. 24.

새로운 집, 새로운 모험


 

새로운 집으로 이사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이 한 달의 시간에 ‘모험’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글을 다 읽고 이렇게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서 무슨 모험을 했다고 할 수 있느냐고 시비를 걸 수도 있다. 아, 물론이다. 지난 한 달 간 내가 사는 아바나에서는 혁명도 일어나지 않았고, 게릴라군도 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일상을 모험이라고 부르련다. 우리가 사소하다고 치부하는 것들은 실제로 사소한 것들이 아니다. 일상의 기본을 책임지는 디딤돌이다. 이 요소들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을 때, 일상은 곧바로 재난이 된다. 쿠바는 이런 소소한 재난의 천국(?)이다. 도대체가 ‘이런 게’ 내 인생을 괴롭히는 주적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할 때마다 나는 아직도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속에서 활활 끓어오르는 화를 달래느라 애를 쓴다. 여전히 철이 덜 든 거다. 철 없는 김해완아, 이런 것들을 공짜로 누렸던 너의 지난 27년의 인생에 감사해라. 그리고 쿠바 리포트에 써먹을 이야깃거리가 생긴 것에 즐거워해라! 이제 쿠바 리포트 이번 편을 시작하도록 한다.



핑크하우스를 찾다


새 집에는 어떻게 인연이 닿게 되었을까? 12월 초, 나의 절친한 중국 친구가 내게 연락을 했다. 급하게 집을 찾고 있는데, 혹시 아는 곳 없느냐고. 그녀는 원래 남자친구의 회사가 제공하는 사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애인이 회사를 정리하게 되면서 그 집도 나와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발품을 팔면서 값싼 집들을 알아보았다. 이웃들에게도 돈 없는 학생들이 장기로 머물만한 집을 아느냐고 말을 흘렸다. 회사에 다닐 때야 수영장 딸린 빌딩에서 회사 차를 몰며 살았다지만, 이제는 백수가 되었으니 그들이 예전처럼 값비싼 주거 환경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철저히 내 기우였다. 내가 적당한 집을 찾아서 친구에게 다시 연락했을 때, 이 젊은 커플은 이미 아바나 베다도 중심지에 방 세 개가 딸린 널찍한 집을 찾아서 계약한 후였다. 헐~. (예산이 이렇게 많은 줄 알았다면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었을 거다.) 이왕 이렇게 집을 찾게 된 거, 나는 내가 이사를 가버리기로 결심했다. 내 옛 집은 지난 편에도 서술했듯이 물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집은 내가 와이파이 카드를 구매하는 가게의 옆 건물 2층에 있었다. 나 역시 길거리를 오고 가며 이 집을 눈여 겨 보곤 했다. 외관이 훌륭해서가 아니었다. 색깔 때문이었다. 100m 밖에서도 식별이 가능한 강렬한 핑크! 그것도 은은한 베이지색이 깔린 복숭아빛 분홍색이 아니라, 쿠바인의 정열을 상징하는 선명한 핫핑크!!! 집주인 아줌마는 내게 집을 소개해주던 첫 날, 자신은 이 집을 ‘핑크하우스’라고 부른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나를 집 안으로 들였다. 집 내부는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줌마는 원래 여기 벽도 핑크색이었는데, 예전에 이 집에 세들어 살던 앙골라인 가족이 자신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벽을 흰 색으로 칠해버렸다고 불평했다. 참으로 고마운 가족이 아닌가.

 



핑크하우스에 대한 내 첫인상은 집이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방 두 칸, 화장실 하나, 그리고 부엌. 방들은 크기가 넉넉 했지만, 침대며 소파며 텔레비전 같은 (내게는 별 쓸모 없는) 가구로 꽉꽉 차 있었다. 그리고 거실이 없었다. 만약 내가 룸메이트를 들이지 않는다면 두 번째 방의 가구를 비우고 거실 겸 서재로 쓰면 될 터였지만, 집주인 아줌마는 자기 집에도 가구를 놓을 공간이 없다며 내 제안을 곧바로 거절했다. 집 자체는 결코 작은 게 아닌데도 내 물건을 정리할 곳이 안 보여서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핑크하우스에는 이를 무마할 만한 장점이 있었다. 바로 물, 내가 한(悢)을 품게 된 물이었다. 쿠바의 상수도 시설은 열악하기 때문에 집을 찾을 때 반드시 다음의 세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독립된 물탱크를 사용할 수 있는가의 여부, 물 탱크의 크기, 그리고 물탱크의 위치. 일단 물탱크는 다른 집과 공유해서는 안 된다. 안 그러면 물은 반드시 바닥나게 되어 있다. 물탱크의 크기가 작아서도 안 된다. 쿠바에서는 모든 동네가 24시간 물을 공급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물 없는 날을 버틸 수 있을 만큼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큰 탱크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물탱크의 위치. 반드시 지붕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수압이 세다. 물탱크의 위치가 샤워기를 위치보다 더 낮다면 (내 예전 집이 그랬다) 물이 있어도 물을 못 쓰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물이 들어오는 파이프는 땅 밑에 묻혀 있는데, 어떻게 물탱크를 지붕에 위치시킨단 말인가? 그래서 물을 바닥에서 지붕까지 올려주는 전기 터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터빈은 결코 집집마다 갖춰져 있는 ‘기본 옵션’이 아니다. 이를 마련해서 설치하는 것은 순전히 집주인의 재량이다.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한다면, 온수 시설이 되겠다. 온수 시설 역시 터빈과 마찬가지로 기본 옵션이 아니기 때문에, 집주인에 따라서 뜨거운 물을 쓰는 방법도 천차만별이다. 누구는 순간 온수기를, 누구는 미니 보일러를, 누구는 가스통을 마련한다. 또 누구는 그냥 수동으로 물을 끓여서 양동이에 찬물과 섞어서 쓴다.


핑크하우스는 위의 네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다. 독립된 물탱크가 있었고, 크기도 예전 집의 거의 두 배에 달했으며, 전기 터빈이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본 집 가운데에서 수압이 가장 세고 안정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성능 좋고 안전한 온수기가 있었다. 손잡이만 돌리면 머리가 데일 것처럼 뜨거운 물이 흘렀다! (너무나 행복했다!) 그 다음으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통풍과 햇볕이었다. 방마다 창문이 크게 나 있어서 바람도 잘 통했고, 볕도 잘 들었다. 오케이, 기본 조건 통과다. 기본이 제대로 갖춰져 있다면 나 더 이상 불평하지 않으리라. 나는 집을 계약했다. 집 가격과 룸메이트 여부를 두고 집주인과 약간의 실랑이가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첫 두 달 동안 $210를 내기로 합의를 보았다. 세 번째 달부터는 혼자 $250을 지불하던지 아니면 두 명이 함께 살면서 $300을 지불하던지 해야 한다.


1월 초, 싱가폴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이사를 했다. 옛날에 살던 집에서 고작 두 블럭 떨어져 있는 곳이어서 걸 어서 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3주 동안 시험 공부에 올인했다. 아직 다 풀지 못한 짐, 방치되어 있는 가구, 속이 엉망진 창인 냉장고 사이에서 말이다.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핑크하우스 개조 프로젝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난 가구 배치를 요리조리 바꾸는 일을 엄청 좋아한다. 크크성 매니저였던 과거 전적 때문일까?) 필요 없는 소파는 두 번째 방에 밀어넣었고, 쓸모 없는 두 대의 텔레비전 역시 소파 구석에 놓고 천으로 덮어놓았다. 대신 작은 서랍장 하나를 남겨놓고 여기에 약통과 치료 기구, 침을 배치했다. 이곳을 ‘약방’으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 방이 이렇게 정리되자, 내 방에도 드디어 여유 공간이 생겼다. 높은 서랍장과 거울을 함께 배치해 간이 화장대로 변신시켰고, 내가 운동할 때 쓰곤 하는 놀이방 바닥 타일로 박스를 만들어서 간이 책꽂이로 활용했다. 그 다음으로 내가 신경 쓴 것은 빛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구해온 벽붙이 전구 선을 서랍장 뒤쪽마다 배치했고, 여기에 노란 전구를 달았다. 노란 빛 덕분에 방은 별도의 가구 없이도 아늑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또, 거실의 부재에 대해서는 아예 새로운 공간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현관문 앞에 있는 테라스였다. 길거리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탁 트인 위치에, 앉아서 쉴 수 있는 소파도 놓여 있었다. 이 테라스를 일종의 ‘야외 거실’이라고 생각하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냈다. 여기에 빨래줄을 걸을 수 있는 못까지 박았다. 아, 이 정도면 훌륭하다. 한 달만의 핑크하우스는 ‘나의 집’이 되었다.



바퀴벌레의 습격


그러나 역시, 쿠바에서 쉬운 일은 없다. 나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맞닥뜨렸고, 이 문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 문제란 바로 바퀴벌레다. 짐을 풀고 있는데 뽈뽈뽈, 어디선가 바퀴벌레가 기어나왔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계속 기어나왔다. 나는 숨을 훅, 들이키고 발을 구르며 바퀴벌레를 쫓아냈다. 나는 벌레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다. 이 정도로 침착하게 대응을 하는 것도 뉴욕에서 많은 바퀴벌레들과 씨름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집의 바퀴벌레들은 내공이 한층 더 높았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발을 구르면 도망가는 척 하다가, 또 금세 돌아와서 영역 탐색을 했다. 내가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으면 그 밑을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침착했던 나도 점점 히스테리컬해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좁은 집에 바퀴벌레 네 마리와 함께 있어야 하다니, 게다가 도망가지도 않는다니! 결국 나는 슬리퍼와 빗자루를 들고 이들을 쫓기 시작했다. 컵 하나를 깨고 장식품 하나를 희생한 끝에야 두 마리를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바퀴벌레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계속된다. 어느 날 친구가 놀러왔다. 친구는 집에 물 문제가 생겨서 며칠째 제대로 샤워를 하지 못한 상태였고, 내게 샤워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물론 괜찮다고 허락했다. (물로 인한 고통을 나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장실에서 새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혹시 바퀴벌레라도 나타났느냐고 농담을 했다. 그러자 화장실 문 너머, 친구가 대답했다. “맞아! 바퀴벌레야! 얘 미친 거 아냐? 내 쪽으로 돌진하고 있어!” 헐… 정말로 바퀴벌레? 나 역시 덩달아 비장해졌다. 그리고 외쳤다. “꾸보(Cubo : 양동이를 의미하는 스페인어)로 죽여! 절대 놓치지마! 죽여야 해!” 우당탕탕, 한바탕 샴푸통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방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물소리가 다시 들렸다. 한참 뒤, 샤워를 마친 친구는 나와서 내게 말했다. “임무 완수했어. 그리고 나 너네 집에서 이제 샤워 안 할래.” 나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욕조 안에는 묵직한 1.5리터 플라스틱 물병(내가 변기 물이 부족하면 사용하려고 미리 수돗물을 채워두었다)과, 그 아래로 아른거리는 검은 물체, 그리고 삐쭉 튀어나온 더듬이가 보였다.

 

또 어떤 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샤워를 하려고 하는데 온수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집주인에게 전화를 하니, 물탱크 가 절반 이상이 비면 수압이 떨어져서 온수기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탱크를 채우려면 1층으로 내려가서 계단 밑에 숨겨져 있는 터빈을 작동시키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제야 나는 이사 온지 처음으로 터빈과 연결되어 있는 지하 물탱크를 확인하게 되었다. 땅에 붙어 있는 철문을 드는 순간, 헉, 숨이 멎었다. 거기에는 그득하게 찬 물과, 그 위에 죽은 바퀴벌레 시체가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폭, 쉬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플라스틱 물병의 절반을 칼로 잘라서 ‘일회용 국자’를 만든 후, 이미 고인이 된 바퀴벌레를 조심 조심 걷어내었다. 그리고 개미밥이 되도록 정원 구석에 내버려 두었다. 이 일회용 국자는 그 후로도 종종 물탱크에 숨어드는 바퀴벌레를 쫓아내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

 

바퀴벌레와의 사투는 내가 낮잠을 잘 때 하이라이트를 찍었다. 그 날은 1학기의 마지막 수업이 있었던 날이었다. 싱가폴 여행 이후로 시차 적응을 아직 다 마치지 못한 나는 집에 돌아와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졌을 때야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노란 전구가 어스름하게 비추는 방 천장에, 뭔가가 있었다. 검은 게 있었다.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내 직감이 ‘저게’ 뭔지 말해주고 있었다. 안경을 끼자, 그 정체가 날아다니는 바퀴벌레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내가 환기를 위해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당장 부엌으로 달려 나가서는 바퀴벌레 약을 들고 왔다. 그러나 그 30초 밖에 되지 않는 시간에 ‘손님’은 위험을 감지했는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 하늘을 나는 바퀴벌레는 전부 알을 품은 암컷이라던데. 부디 그녀가 우리 집에 둥지를 틀지 않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ᅲᅲ.

 


토네이도의 방문


또 다른 모험은 지난 주에 펼쳐졌다. 아바나는 주구장창 비가 오고 있었다. 우기도 아직 아닌데 뭐 이렇게 비가 많이 오나 싶었다. 쿠바 날씨가 오락가락하는 게 하루 이틀인가, 하고 그냥 넘기려니 바람이 심하게 부는 게 심상치 않았다. 온도는 10도로 떨어지면서 밤에는 내복을 입지 않으면 버티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던 일요일 밤, 또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쏟아졌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나 싶을 정도로, 누군가 거대한 양동이로 끊임없이 물을 들이붓는다고 상상할 정도로, 몇 시간 내내 미친 듯이 비가 내렸다. 그리고 팟, 정전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누워서 조용히 기다려보았지만 전기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창 밖을 보니 비단 우리 집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동네 전체가 암흑 속에 잠겨 있었다. 현우에게 전화가 왔는데, 길거리에 나무들이 쓰러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밖 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했다. 그리고 식수를 미리 사놓은 것에 감사하며, 기억을 더듬어 장롱 속에서 초를 찾았다. 그리고 부엌으로 나가서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핸드폰 빛을 활용할 수도 있었지만, 전기가 언제 다시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배터리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초를 키자 부엌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가관이었다. 비가 새고 있었던 것이다. 비가 새는 곳은 다름 아닌 형광등이었 다. 형광등이 천장과 연결되어 있는 부분에서부터 비가 새면서 형광등의 가장자리까지 흘러내렸던 것이다. 물은 맹렬하게 떨어 지고 있었다. 똑똑똑똑똑똑똑똑똑……. 식탁과 바닥에는 이미 물이 흥건했다. 나는 다용도실에서 양동이를 꺼내오기로 결심했다. 뒷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가면 다용도실이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강렬한 비바람이 몰아치며 내 몸을 밀어냈다. 오, 제길. 나는 조심스럽게 움직였고, 양동이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빗물이 새는 곳 아래에 두었다. 이제부터는 비가 그치고 날이 밝을 때까지 내 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고, 다행히 전기가 돌아와 있었다. 핸드폰 데이터를 켰더니 몇몇 친구들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아바나에 토네이도가 왔다는데, 너는 괜찮은 거야?” 엥? 이게 무슨 소리인가. 토네이도라니? 심지어 4명이 죽고, 170여명이 부상을 당했단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던 소식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양상이 영 심상치 않더라니, 그게 토네이도의 여파였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우리 동네로 가까이 오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어제 양동이를 꺼내러 밖으로 나갔던 순간에 날아갔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죽은 4명 중 한 명은 그 때 말레꼰을 따라서 자전거를 타고 귀가를 하다가 그대로 휩쓸려 바다로 날아갔다고 한다.) 

 



천만 다행으로 토네이도는 나를 비껴갔지만, 우리 집에 흔적을 남기기는 했다. 그 날 이후로 비가 샜던 형광등 주위에서 페인트 조각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날이 화창해지면 습기가 날아가서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다. 계속 떨어진다. 떨어지는 위치는 내가 양동이를 놓았던 딱 그 자리다. 이 자리에는 때로는 내 머리가 있기도 하고, 밥상이 차려져 있기도 한다. 머리에 붙은 흰 가루를 털어낼 때면 심란해진다.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 문제도 해결해야 할 것이다.



현관문의 반란


그러나 근 한 달 간 내게 정신적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현관문의 반란이었다. 아직도 이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오랜만에 홈리스 의사 친구가 아바나에 방문을 했고, 나는 그에게 나의 손님방을 내어주었다. (그렇다, 이 친구 아직도 쿠바를 못 떴다. 아직도 그의 서류는 ‘처리 중’이다.) 한참 수다를 떨던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디저트를 만족스럽게 끝마친 후, 나는 그에게 집열쇠를 건네주었다. 나는 또 다른 친구와의 저녁 약속 때문에 센트로 아바나에 가야 했고, 친구는 내 집으로 먼저 돌아가서 쉬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는 예상보다 길어졌고, 구아구아 버스는 도통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무 버스나 잡아탄 후에 집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려서 50분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때는 이미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나는 친구에게 부재중 전화가 3통이나 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게 전화를 다시 걸어보았지만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살짝 불안해졌다. 이게 무슨 일일까? 피곤해서 잠이 들었나? 밖에서 바라본 핑크하우스의 불은 꺼져 있었다. 증폭하는 불안감을 달래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현관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나는 어둠 속에서 커다란 물체를 보았다. 헐… 현관문 앞 테라스 소파에서 친구가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를 흔들어 깨웠다. 열쇠까지 줬더니 너 여기서 뭐하고 있니? 눈을 뜬 친구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문 좀 열어봐…..뭔가가 잘못 되었어……” 나는 더욱 더 큰 혼란에 빠졌다. 뭐지? 집 안에 거대한 바퀴벌레가 있나? 아니면 살인 현장이 벌어졌나? 그러나 나는 이 문장이 말 그대로 ‘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열쇠는 정상적으로 꽂혔고, 역시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는 마치 문과 열쇠구멍 사이의 견고한 유대관계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과 같았다.

 

그제야 나는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 문이 고장났다. 열쇠가 있어도 문을 열 수가 없다. 그리고 문 밖의 테라스에는 통닭 박스, 여기저기 흩어진 닭뼈들, 소파에 몸을 구겨넣고 떨고 있는 인간 한 명이 있다. 우리가 헤어진 게 7시쯤이었으니, 이 친구가 집 안에 돌아가지 못한 채 밖에서 나를 기다린 게 벌써 다섯 시간 째라는 뜻이었다. 통닭은 배가 고파서 저녁 대신으로 사먹은 것일 테고, 흩어진 닭뼈는 고양이가 왔다 간 흔적이었다. 아바나는 토네이도가 지나간 직후라 여전히 추웠고, 친구는 얇은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벌써 자정이 넘었다. 집주인에게 연락할 수도 없고, 열쇠공을 부를 수도 없다. (쿠바에 24시간 출장 서비스 같은 게 있을리 만무하다.) 나 혼자라면 다른 친구네 집에 가서 신세를 지겠지만, 지금 나는 이 의사 친구를 돌보고 있는 입장이다. 게다가 이 친구는 추워서 이미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다. 결국 나는 가장 빠르고 비싼 방법을 택했다. 이 동네 빈 까사 아무데나 들어가서 밤을 새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집주인에게 문자를 넣어서 날이 밝자마자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했다.

 

까사에 도착하자, 친구는 자기가 다섯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설명해주었다. 그는 자기 잘못 때문에 문이 망가졌다고 생각했고, 겁에 질렸다고 한다. 그래서 고심한 끝에 뒷문으로 진입하기로 결심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집은 2층에 있다. 뒷문과 그와 연결된 다용도실도 2층 높이에 위치해 있고, 여기에는 1층과 통하는 계단이 없다. 즉, 이 친구는 나무를 타는 원숭이처럼 파이프를 잡고 벽을 타서 ‘그’ 다용도실까지 기어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뒷문을 더듬어 열쇠구멍을 찾았다. 그런데 아뿔싸, 뒷문에는 열쇠구멍이 없었다! 이 문은 안쪽에서만 잠글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쿠바의 문은 쿠바만큼이나 예측불가능하다.) 친구는 다시금 절망에 잠겼다. 그리고 1층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다가 더 큰 난관에 봉착했다. 그 사이에 해가 져서 길거리가 완전히 어둠 속에 잠긴 것이다. 그는 어디로 뛰어내려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잘못했다가는 다리가 부러지게 생겼다.

 

유일한 방법은 옆집 지붕으로 뛰어내린 다음에, 다시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것 뿐이었다. 문제는 옆집이 송아지만큼 큰 시베리안 허스키를 키운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하필 때는 허스키의 저녁시간이었다. 이 거대한 개는 정원에 당당하게 앉아서 밥을 먹으며, 잠재적 침입자인 내 친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친구도 중얼중얼거리면서 개를 빤히 쳐다보았다. 제발 가라, 제발 가라, 제발, 제발 꺼져라…… 그의 간절한 주문이 통했는지, 30분 후 개는 마침내 자리를 떴다. 그렇다, 바로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친구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쏜살같이 지붕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개가 떠나기만을 기다린 그 시간이 무색하게, 그가 지붕에 발을 디딘 순간 온 동네가 떠나갈만큼 큰 소리가 났다. 쿠쿠쿠궁! 그리고 곧바로 그 집에서 한 소년이 총알처럼 뛰어나왔다. 이 소년은 자기 집 지붕 위에 엉거주춤 서 있는 ‘치노’를 보았고, 충격에 입을 떡 벌린 채 할 말을 잃었다. 친구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음의 한 마디를 남겼다. “음… 부에나스 노체스. (Buenas noches : 좋은 밤. 영어로 ‘굿 나잇’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담을 넘어서 훌쩍 사라졌다.

 

나중에 친구는 소년의 집을 방문에 사정을 설명했다고 한다. 다행히 그가 ‘도둑’으로 오해받는 일은 없을 터였다. 이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갈아 입을 옷도 없고 칫솔도 없이 난민처럼 자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실컷 웃고 나니 기분은 좀 나아졌다. 그렇게 괴롭고도 웃긴 밤이 지나갔고, 아침 일찍 집주인에게 (마침내) 전화가 왔다. 자신도 문을 열 수 없다고. 그러나 자기는 출근을 해야 한다고. 자신의 친구인 열쇠공에게 말을 해놓을 테니, 그쪽에 가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하라고. 그녀의 무책임한 행동에 화가 났지만, 다른 수가 없었던 우리는 다섯 블록을 걸어서 열쇠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줘야 할 열쇠공은 그날따라 아바나 밖으로 출장을 간 상황이었다. 또 다른 열쇠공은 점심 때까지는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며, 우리보고 12시까지 집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렸다. 물도 없이, 음식도 없이, 돈도 없이. ‘절망’이라는 단어를 비로소 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칠 때 즈음, 드디어 열쇠공이 왔다. 그는 문을 잠시 살피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문고리가 낡아서 고장난 듯한데, 여기에는 어떤 해결책도 없다는 것이다. 문고리 자체를 부숴서 문을 여는 것밖에는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제부터 문을 부술 거라고 통보를 했다. 그와 동시에 나의 친구는 망설임 없이 문에 몸통 박치기를 시전했다. 발로 차고, 어깨로 치고, 손으로 밀고…… 부스스, 벽에서 돌이 떨어지면서 마침내 문이 열렸다.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19시간 만에 돌아온 집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열쇠공에게는 고장난 문고리를 대체할 새로운 문고리가 없었다. 그는 우리보고 새 문고리를 사오라고 했다. 그러면 설치를 해주겠다는 것이다. 아, 안 돼…… 쿠바에서 ‘문고리’ 같은 공산품을 구하는 것은 참으로 까다로운 문제다. 공식 매장에서는 도통 팔지를 않기 때문이다. 친구가 집을 봐주는 사이, 나는 쉬지도 못하고 아바나 이곳저곳을 쏘아다니며 문고리를 찾아다녔다. 발품을 판 끝에 두 개의 문고리를 발견했지만, 불행히도 우리 집 문과는 사이즈가 맞지 않았다. 나는 집주인에게 전화를 다시 걸었다. 집주인은 오늘은 바쁘니 내일 오겠다고, 오늘 밤은 불안하겠지만 1층 문을 잠그면 2층 문이 열려 있더라도 별 문제 없을 거라고 말했다. 하!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밖에서 밤을 지새우고 결국 문까지 부수고 집에 들어간 것을 이제 온 동네가 아는데,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 줄 어떻게 아는가? 지난 밤도 불편하게 보냈는데 오늘 밤도 불안하게 보내라는 말인가? 그것도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말이다. 그러나 별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테라스 소파를 집 안으로 들여서 문 뒤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리고 뒤척이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문제가 발생한 지 40시간 만에 집주인이 납셨다. 그녀는 자기도 문고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발뺌을 하더니, 결국 나를 데리고 아는 사람이 하는 가게에 가서 문고리를 샀다. 처음에는 내가 돈을 지불하게 하려고 하더니, 내가 화를 내자 그제야 말을 바꿨다. 자기는 현재 수중에 돈이 없으니 일단 내가 돈을 내라고. 지금 지불한 돈은 월세에서 깎아주겠다고. (오호라, 돈이 없단다. 문은 내가 월세를 지불한 바로 다음 날에 고장났는데.) 수리공은 오후 5시에 도착했다. 한 시간의 작업 끝에 내 현관문은 새로운 문고리를 갖게 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48시간 만의 일이었다.


이렇게 나의 모험은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또 어떤 모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열쇠를 멀쩡히 가지고도 집에 못 들어가기도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사건이 닥쳐올 때마다 재빠르게 해결하고, 한바탕 웃어넘기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이처럼 쿠바에서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 모험의 연속이다. 체 게바라처럼 시에라 몬따냐를 휘젓고 다니는 모험은 아닐지언정, 이웃집 지붕으로 뛰어내리고 개와 눈싸움을 하는 모험 정도는 되는 것이다. 나의 일상을 모험으로 변신시켜주는 이 놀라운 공간에, 경의를 표한다!


글_김해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