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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리포트

천국도 지옥도 아닌

by 북드라망 2020. 1. 28.

천국도 지옥도 아닌



아바나 의대생의 관람기

 

지난 편에도 썼지만, 지난 짧은 방학에 나는 한국에서 그렇게 떴다는 을 몰아보았다. 이 드라마를 건네준 한국 친구가 파일을 11편까지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서 완주는 못했지만, 이 작품이 어째서 그토록 인기몰이를 했는지 알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말로만 듣고, 개인적으로는 한 번도 몸 담가보지 않은 입시의 세계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입시 경쟁을 피해간다는 게 얼마나 특이한 일인지, 또 얼마나 행운의 일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극성’의 정도가 이 정도까지 갈 수 있다는 데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가도, 또 한 편으로는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현실이라고 납득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또 놀랐다. 외국 친구에게 을 추천해줬더니, 공감을 1도 할 수 없다며 고개를 내젓는다. 완전히 한국판 드라마인 것이다.

 

이 드라마를 감상하는 나의 관전 포인트는 입시 경쟁말고도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민들이 그토록 염원하는 명예의 전당이 법대도, 공대도, 아닌 의대라는 점이었다.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못이 박힐 것 같은 그 이름, ‘서울 의대.’ 예전 같았으면 의대를 무조건 최고로 치는 이 설정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나는 서울 의대가 아닌 아바나 의대에 몸 담고 있다. 졸업은 어렵지만 입학만큼은 모든 전공을 통틀어서 커트라인이 제일 낮고, 학급의 절반 이상이 낙제를 해도 쉬는 시간만 되면 모두들 희희낙낙하고, 자기가 1학년 때 낙제를 몇 번이나 했는지 아련하게 추억하는(?) 의사들이 있는 곳. 이런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젖어버렸는지, ‘서울 의대’라는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드라마 속 상황이 기괴하게 보였다. 저렇게까지 해야 들어갈 수 있는 게 의대란 말인가? 만약 내가 한국에서 의대를 갔다면 나는 수많은 ‘예서’들과 함께 공부하게 되었을까? (물론 ‘예서’가 과장된 캐릭터라는 것은 알고 있다.)

 

헙. 갑자기 아바나 의대에 대해서 달고 살았던 불만이 입 안으로 쏙 들어간다. 공부를 지지리도 안 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최소한 인성이 좋다. 남들이 자기보다 잘 한다고 부러워하기는 해도 저주하지는 않는다. 학년을 낙제하면 ‘의사 말고 다른 직업 찾지 뭐’ 라고 말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자퇴를 한다. 서로를 물고 뜯고 괴롭히는 저 <SKY캐슬>이 지옥이라면, 느긋하다 못해 늘어진 이곳 아바나 의과대학 캠퍼스는 과연 천국이다.

 



의료 천국의 나라에서


아마 세계 어디를 가도 이런 느긋한 의대 생활은 불가능할 것이다. 공부 양이 절대로 적은 게 아니건만, 그 속에서 ‘경쟁’이 사라지니 그래도 숨 쉬고 웃을 여유는 있다. 이런 비경쟁적인 의학 공부가 가능한 것은 의료 자체가 이 나라에서 사회화되었기 때문이다. 쿠바의 의료는 완전히 무료다. 즉, 그 누구의 사적 이익을 위한 게 아니다. 수능에서 1등을 하고 의대를 1등으로 졸업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명예와 직결될 뿐, 미래의 월급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누구는 이를 두고 실제로 ‘의료 천국’이라고 부른다.


 

천국이라니! 이 명칭은 툭 하면 미국에게 ‘악의 축’으로 까이는 쿠바의 사회주의 정책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감싸기 위해 발명된 것이다. 물론 이런 호의는 탄탄한 근거를 뒷받침하고 있다. 쿠바는 전 세계 어떤 나라도 쉽게 실천하지 못하는 무상 의료 제도와 무상 의료 교육을 몇 십 년 째 유지하고 있다. 매년 수많은 의사들을 배출하고 있고, 제한된 자본으로도 신약 개발을 멈추지 않으며, 어떤 나라보다도 활발하게 제3세계에 의료 봉사와 의료 인력 수출을 공급하는 것이 쿠바다. 다른 나라의 의대생들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쏟는 에너지를, 쿠바인들은 다른 곳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도, 자원도, 조력자도 없는 가난한 나라가 이런 새로운 실험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잠깐만 여기서 멈추고 다시 생각해보자. 현실은 언어에서 늘 미끄러진다. 언어가 제공하는 상(想)은 언제나 우리의 제한된 사고 속에서만 구축된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내용이 전부 객관적으로 사실이라고 해도,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우리가 상상해내는 쿠바의 이미지는 (그리고 그 이미지와 함께 저장될 우리의 감정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왜 ‘의료 무료’는 ‘의료 천국’처럼 여겨질까?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는 ‘한국의 의료 서비스’가 공짜인 상황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료란 한국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게 전부다. 그래서 쿠바 같은 설정은 우리의 욕구 불만을 자극한다. 꿈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여겼던 비싼 서비스들이 돈 한 푼 들지 않고 가능해진다고 상상해보라. 동전 한 푼 없이 대학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고, 보험 걱정 없이 암 치료를 언제든지 받을 수 있고, 쿠바처럼 집집마다 가정의가 배치되어서 전화 한 통이면 흰 가운의 엘리트 의사 선생님이 집으로 달려오고…… (아, 정말 써놓고 보니 천국 같이 느껴지긴 한다. )

 

그러나 쿠바는 한국이 아니다. 무료 의료 역시 이렇게 단순한 컨셉이 아니다. 의료 행위가 무료라는 것은 다음의 일련의 사실들과 함께 간다. 의료가 사회화 된다는 것, 의사가 공무원이 된다는 것, 의학 공부의 기회가 모든 학생에게 제공된다는 것, 의대가 지력이나 재력이 아니라 성실함과 봉사 정신을 바탕으로 굴러간다는 것, 결과적으로 쿠바에서는 어떤 환자도 지갑을 들고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의료’라는 개념과 행위를 둘러싼 모든 배치가 통째로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배치의 특징은 서비스의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환자는 돈을 낸다는 이유를 들어 의사에게 서비스 정신을 요구할 수 없다. 의사 역시 환자를 서비스를 판매해야 할 고객으로 취급할 수 없다. 이런 배치에서는 인간적인 관계만 남게 된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좌우하는 것은 보험 제도나 병원비가 아니다. 상호 간의 친밀함, 소명감, 캐릭터, 소통 방식, 기타 등등. 내가 환자로서 의사와 어떻게 소통하느냐, 혹은 내가 의사로서 환자를 어떤 마음 가짐으로 대하느냐에 따라서 의료 행위의 질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임산부가 아이를 낳기까지 매일 그 가정집을 방문해서 상황을 살폈던 가정의는 이 신생아의 대모가 되기도 하고, 자신을 죽기 전까지 보살폈던 의사에게 마지막으로 책상을 만들어서 선물한 후 세상을 떠난 환자의 이야기도 있다. 

 

물론 인간적인 관계라는 것은 그 미덕만큼이나 악덕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하기 싫어서 게으름 피우는 책임감 없는 의사나, 의사의 호의를 거꾸로 악용하는 환자 아닌 환자도 많다. (환자가 의사의 집을 사적으로 찾아가서 새벽 5시에 혈압을 재달라고 요구하는 에피소드는 예삿일도 아니다.) 또, 서비스 정신과 함께 덩달아 효율성도 사라진다. 병원에 사람이 많으면 2시간에서 3시간씩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고, 의사가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면 다음날이나 다다음날에 병원에 다시 돌아와야 하는 상황도 자주 벌어진다. 아픈 건 지금 당장인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치료가 지연될 때는 정말 화가 난다. 모두가 이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리지만, 이런 불편한 상황이 고쳐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의사들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적은 월급에 수많은 업무까지 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잔업을 더 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고, 환자 입장에서는 시스템이 바뀌기를 기다리느니 의사 친척이나 의사 친구의 권한을 활용하여 ‘새치기’를 하는 쪽이 더 편하다. 의사에게는 ‘환자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는 압박이 없고, 환자 역시 ‘의사의 근무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현재 쿠바 의료가 겪고 있는 대표적인 문제는 물자 부족이다. 의약품 부족의 첫 번째 원인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미국의 경제 봉쇄다. 두 번째 원인은 의약품을 자체 제작할 수 있는 인프라의 부족이다. 이 때문에 쿠바가 직접 개발한 신약이라도 실질적인 제조는 중국과 같은 외부 국가에서 진행되는데, 이 국가들에게 돈을 지불하지 못할 때도 약의 공급이 끊긴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내부의 구조적인 원인도 큰 몫을 한다. ‘사회화’라는 이름 하에 의료 체제의 모든 요소들을 묶어놓았는데, 정작 그 거대한 시스템이 통제가 안 되는 것이다. 유통 과정에서 많은 의약품이 블랙 마켓으로 빠져나가고, 더 비싼 값에 팔린다. 저렴하게 약을 살 수 있는 공식 약국에는 늘 약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들은 점점 더 많은 약을 ‘사재기’ 해놓으려고 하고, 약은 점점 부족해진다는 악순환이 계속 된다. 게다가 제도를 악용하는 환자들도 많다.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약을 먹어서 빨리 나으려는 환자나, 실제로는 멕시코나 미국에서 살지만, 쿠바를 방문할 때마다 의사에게 처방전을 받아서 싸게 약을 얻어가려는 부유한 쿠바인들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의사들은 분통을 터뜨린다. “왜 이 가난한 나라까지 와서 공짜로 약을 가져가는 거야? 멕시코에 살면 멕시코에서 약을 사라고! 물자가 풍부한 그곳에서!”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런 상시적인 물자 부족이 또 쿠바 의료의 독특한 개성으로 재탄생했다는 것이다. 누구는 이를 어려움 속에서 꽃 피운 ‘대체 의학’이라고 말하는데, 이건 좀 지나친 칭찬 같다. 그보다는 그때 그때 발휘되는 임기 응변에 더 가깝다. 목구멍을 들여다보는데 손전등이 없어서 스마트폰 불빛을 활용한다거나, 수납 공간이 부족해서 아이스크림 컵에 약품을 분류 및 정리하는 것은 양반이다. 의료 기기의 부족 탓에 촉진이 발달했으며, 의약품의 부족 탓에 가정의들은 각 가정의 상황에 걸맞는 치료법을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쿠바 의학은 때때로 정신 없고,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의학이 꼭 완벽하게 정돈되어야 한다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의학만큼 ‘임기 응변’의 능력이 필요한 학문은 없다. 이것이야말로 일상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학문이며, 일상은 사건 사고들이 매번 벌어지는 예측 불가의 현장이다. 이런 난리법석의 일상에 의료를 적용하는 작업은 대개 환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의사는 단지 진료와 처방만 할 뿐이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이 경계가 상대적으로 흐리다.

 

한마디로, 천국은 없다. 단지 쿠바가 있을 뿐이다. 세계 어느 곳과도 비교하기 힘든 독특한 (애증이 교차하고 또 교차하는) 의료 환경이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좋다 나쁘다,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지는 않으련다. 아직은 나 역시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다. 보다는 이곳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그런 캐슬에 사느니, 아바나의 허름한 집에서 낡은 책으로 공부하겠다고.

 

아, 그렇지만 이곳에도 나름 ‘지옥’은 존재한다. 서울 의대에 가기 위해서 밤낮으로 ‘공부, 공부, 공부’를 외쳐야하는 의 어린 학생들만큼 힘든 삶. 그것은 바로 가정의들의 근무 환경이다. 이들은 밤낮으로 ‘일, 일, 일’을 외치며 살아간다. 가정의, 혹은 MGI(Medicina General Integral) 의사라고 불리는 이들은 쿠바 의료 체제의 가장 핵심적인 단위를 담당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마을이다. 이들은 각 바리오(barrio : 마을)마다 배치되며, 의사 한 명 당 100에서 150가구 정도를 담당한다. 이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을 꼰술또리오(consultorio)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일차적인 ‘꼰술따(consulta)’, 즉 진찰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가정의라고 해서 전문의보다 일이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쿠바 의료 체제에서 이들만큼 일을 많이 하고, 이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자들이 없다. 가정의들의 임무는 각 동네 사람들의 일상적인 건강을 책임지는 것인데, 쿠바의 MGI 교과서에 따르면 건강이란 단순히 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 정신, 사회적 관계가 모두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뜻한다. 그리고 쿠바 정부는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가정의의 의무’로 전환시켰다. 덕분에 우리의 가정의들은 의사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심리상담가, 사회복지사, 관계 조율가가 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동네의 만능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다.

 

말처럼만 되면 그곳이 바로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러나 의사도 인간이다. 그 어떤 사람도 이렇게 많은 업무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없다. 쿠바 의학이 추구하는 ‘통합성’은 분명 그 방향은 옳지만, 의사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룩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이 통합성의 철학은 그것이 제도화되는 순간 깊이는 사라지고 ‘껍질’만 남게 된다. 가령, 가정의들은 가족들의 건강 뿐만 아니라 행복까지 보살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우리가 MGI 수업에서 배우는 ‘가족의 행복’이란 개념은 너무나 뻔한 소리여서 나로서는 콧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상적인’ 가족 구조,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이상적인’ 가정의 사이클. 하지만 도대체 이렇게 이상적으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그것도 이혼과 재혼과 외도를 밥 먹듯이 하는 쿠바 사회에서? 게다가 의사에게 무슨 자격이 있기에 타인의 행복을 함부로 측정한단 말인가? 가정의의 진찰서는 이런 수많은 질문을 담아내지 않는다. ‘가족의 행복’을 진찰하는 칸에는 딱 두 가지 옵션만 있을 뿐이다. 기능함(funcional) 혹은 기능하지 않음(disfuncional).

 

가정의를 짓누르는 것은 이런 과중하고 추상적인 사명 뿐만이 아니다. 관료적인 시스템 역시 이들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주범이다. 가령, 가정의들은 매일 16명의 환자를 의무적으로 봐야 한다. 어느 날은 환자가 적을 수도 있고 많을 수도 있지만, 관료 시스템은 이를 개의치 않는다. 무조건 16명이어야 한다. 또, 이들은 각 환자들에 대해서 보고서를 두 부씩 써야 한다. 하나는 보관용, 또 하나는 제출용이다. 그리고 물론 쿠바에는 컴퓨터나 프린터, 복사기가 꼰술또리오마다 존재하지 않는다. 가정의들은 모든 것을 손으로 쓴다. 그래서 가정의들은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 근무를 하고, 점심을 먹고, 오후 내내 꼰술또리오에 앉아서 32부의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것으로 끝이냐고? 아니다. 가정 방문도 빼먹을 수 없다. 가정의들은 매 년 자신이 담당하는 가족들을 최소한 두 번씩은 방문해야 한다.  임산부가 있는 가정은 심지어 매일(!!!) 방문해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점점 가정의가 되고 싶어하는 의대생들이 사라지고 있다. 나 같아도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그렇지만 쿠바가 완전한 천국이 아니듯, 꼰술또리오도 완전한 지옥은 아니다. 쿠바인들은 가정의들의 힘들고 값진 노동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꼰술또리오에 방문할 때마다 커피, 쌀, 고기, 채소 같은 작은 선물을 손에 들고 온다. (마치 그 옛날에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훈장님에게 부모들이 감사의 인사를 표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혹은 가정의들이 살면서 자잘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무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한다. 문고리를 고친다거나, 탁자를 만들어 준다거나, 혹은 최근 마을에서 가장 핫한 소문을 물어다준다거나, 기타 등등.  이런 사람의 온기가 꼰술또리오를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만든다. 마을의 모든 정보와 소문이 흘러들어오는 ‘아고라’ 광장으로 만든다. 마을의 최근 스캔들이 궁금하다면? 꼰술또리오에 가라.

 


우리 동네 꼰술또리오


나는 이런 정보를 다 어디에서 얻었을까? 물론 우리 동네 꼰술또리오에서다. 1학기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나는 꼰술또리오로 출근을 한다. 하는 일이라고는 별 거 없다. 가만히 서서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잡일들을 간간히 하면서 말이다. 이곳은 에 나오는 동네처럼 삐까뻔쩍하지도 않고, 거기 나오는 대학 병원처럼 근사하지도 않다. 손바닥만한 대기실과 손바닥만한 사무실이 전부다. 사무실 뒤쪽에는 간호사가 일하는 방이 따로 있는데, 간이 침대와 간이 수납장만 있다. 


꼰술또리오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이다. 두 분 다 육십 대 할머니다. 그러나 이들은 환자들의 유치한 일탈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과, 산더미처럼 쌓인 일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일하는 건실함을 갖췄다. 그렇다고 건조하게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와중에도 노래를 흥얼거리고, 마을의 최근 스캔들을 속닥거리고, 짜증나게 구는 상사 의사를 속이는 연기를 펼침으로써 자신들이 과연 ‘흥 많은 쿠바인’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이 두 할머니가 이뤄내는 개그 콤비는 가히 환상적이다. 잠이 부족해서 퀭한 얼굴로 앉아 있는 우리 학생들도 덩달아 빵빵 터지곤 한다. 아, 실로 이들은 쿠바 의료인의 아름다운 표본이다! (내 인복이 여기서도 작동한 모양이다. 다른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든 꼰술또리오의 의사와 간호사가 이렇게 헌신적이지는 않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은 무뚝뚝한 편이지만, 일단 친해지면 거짓 없이 속내를 다 보여주는 타입이다. 아직 1학년 햇병아리에 불과한 우리 학생들도 ‘의사 선생’이라고 부르며 존중해준다. 그리고 자기도 1학년 때 생화학을 낙제해서 재시험에 또 재시험까지 갔다던가, 자신도 의사지만 피 보고 수술하는 일은 질색이라던가, 이런 이야기들을 일체의 자의식 없이 해준다. 아기에게 예방 접종을 맞히는 일을 까먹는 철 없는 젊은 엄마나, 학교를 빼먹고 싶어서 일부러 발목을 접지르고는 약을 달라고 하는 어린 무용수를 상대할 때는 사정 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환자 앞에서도 지체 없이 담배를 뻑뻑 피우는 카리스마를 풍기지만, 아이들이 걸어 들어오면 얼굴 근육이 모두 풀어져서는 엄마 미소를 함박 짓는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의사 선생님 역시 환자라는 것이다. 그녀는 제대로 걷지 못한다.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는 전혀 눈치챌 수 없지만, 업무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오면 그녀는 남편과 지팡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중간에 화장실에 갈 때는 간호사의 도움을 받는다. 이렇게 남의 도움을 받는 것에도 그녀는 크게 자의식이 없어 보인다. 


간호사 선생님은 재기발랄한 소녀 같다. 그녀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의 진짜 나이를 잊게 만든다. 게다가 그냥 걸어다니는 법이 없다. 경쾌한 발걸음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그 걸음걸이로 좁은 꼰술또리오를 이리저리 쏘아다니며, 그녀는 도무지 일을 멈추지 않는다. 행주를 들고 구석구석 닦고, 종이를 잘라서 의사 선생님의 메모지를 만들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환자들에게 주사를 놓고, 캐비넷 안의 오래된 파일을 정리하고, 또 그 사이에 틈을 짜내어 커피를 만든다. 그리고 호출이 들어오면 다리가 불편한 의사 선생님 대신해서 가정 방문을 나가기도 한다. 인기가 많은 그녀는 때때로 다른 꼰술또리오에 가서 일을 도와주기도 한다.




그리고 환자들이 있다. 이들은 매번 다른 스토리를 들고 꼰술또리오를 방문한다. 이제는 내가 눈에 익었는지 반갑게 인사를 하기도 한다. 환자들이 떠나고 나면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은 어김없이 환자들에 대한 ‘악의 없는 뒷담화’를 살짜쿵 떤다. 그리고 다시, 우리의 작은 꼰술또리오는 잔잔한 침묵 속에 잠긴다. 나에게도 잠시 몽상에 잠길 여유가 주어진다. 이곳은 어디인가? 천국도, 지옥도 아니다. 바깥 세상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천천히 시간이 흐르는 나라, 달라질 것 없는 하루하루가 계속되는 일상, 그 가운데에서 똑같은 질병과 똑같은 잔소리가 반복되는 병원이다. 여기에 삶이 있다. 밥처럼 밋밋한 맛이 나는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나는 ‘캐슬’이 아니라 ‘꼰술또리오’에서 의학을 배울 수 있는 나의 행운에 감사한다. 이 감사하는 마음을 끝까지 잊지 않는 게 나의 숙제일 것이다.


글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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