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아빠여서 읽은 책이라니?
‘책’으로 ‘육아’를 한다는, 이른바 ‘책육아’담론이 있다. 좋은 내용들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담론들을 마주할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담론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대부분 우리 아이의 ‘훌륭한 성장’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훌륭한 성장’이란, 사고력의 향상, 상상력의 확장, 끈기의 함양 같은 좋은 덕목들을 갖추며 자라는 것이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아이에게 그러한 것들을 갖추게끔 해주고 싶지 않겠나. 그런데 문제는, 그런 좋은 덕목들 속에 숨은 욕망이다. 어떻게하면 내 아이를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그 욕망 말이다. 이를테면 어릴 때부터 책을 읽어서 사고력을 키워놓으면 학교 공부를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좋은 이야기를 많이 읽어서 상상력을 키워놓으면 아이는 감성적이면서도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된다. 이 아이가 성장하면 어떻게 될까? 사회적으로도 남부럽지 않게 성공했는데, 문화 예술에도 조예가 있어서 말그대로 멋지게 성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쉽게 말해 이 욕망은 경쟁우위에 서게끔 해주고 싶은 욕망, 승자가 되게끔 해주고 싶은 욕망이다. 그 점 때문에, 나는 ‘책육아’로 통칭되는 그 담론이 어딘지 모르게 늘 불편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아이를 훌륭하게 만들어야 부모의 직성이 풀리는 걸까?
14살 여름방학 때, 웅진 위인전집 시리즈를 때 늦게 읽은 이래로 ‘책읽기’는 내 인생과 분리불가능한 행위였다. 이 세계가 너무 익숙해져서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느껴질 때나, 이 세계가 너무 낯설어서 친숙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질 때나 책들의 세계로 가면 어떤 형태로든, 잠정적이나마 답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책들 속에서 얻어온 답들은 많은 ‘책육아’담론들이 향하는 방향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책읽기 속에서 경쟁우위를 얻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거기서 내가 배운 것은 (심지어 우리 어머니의 기대와도 다르게) 경쟁에서 비켜서는 법이었고, 불가피한 경쟁 속에서 도태되더라도 덜 좌절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런 배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곳도 바로 거기, 책읽기의 공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읽었던 책들이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내가 익혔던 ‘새로운 지식’들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배웠다. 말하자면 흔히 말하는 사회적인 성공과 실패에 약간 거리를 두는 태도 말이다.
그건 내가 현재 시점에서 사회적으로 전혀, 거의 성공하지 못한 ‘남자’이자 ‘아빠’이기 때문에 그럴수도 있다. 그런데 또 그러면 어떤가? 나는, 낮에는 아이를 키우고, 아이가 잠들면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지금의 삶이 정말 좋다. 누군가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기꺼이 그러리라고 답할 수 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대단히 긍정적인 사람이어서 그런 건 아니라는 점이다. ‘대단히’ 긍정적이지는 않지만 적당히 긍정적인 사람이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바탕이 몹시 부정적인 사람이다. 사람이나 어떤 사태를 볼 때 안 좋은 것부터 보고, 세상이 이모양 이꼴인 걸 재확인 할 때마다 절망하고, 허무감에 사로잡히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더 나아가 나는 역사의 진보도 믿지 않으며 인간성에 대한 환상 또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우리가 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 또한 있다. 이율배반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진실로 그렇다. 부정적이고 어두운 바탕에서도 이럴 수 있는 건 순전히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 책과 책을 통해 만나온 스승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책읽기는 내 인생의 구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구원이 한가지 더 있는데, 그건 바로 내 딸이다. 우리 딸이 태어나기 전까지 세상에 아무련 미련이 없었다. 당장 죽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건 아니고, 뿌리없는 사람처럼 도처에서 허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세상 따위 어떻게 되는 내 알바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내 인생 아무 때나 끝나더라도 무슨 상관인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것들은 ‘생각’이라기 보다 사실 ‘태도’였다. 책을 읽어도, 글을 써도 지워지지 않는 허무감 같은 게 있었다. 나는 그걸 인생에 당연한 숙명이라 여기고 있었고, 그 때문에 당연하게도 매사에 냉소적이었다. 그런데 자식이 생기고부터 그럴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기도 했지만, 의식적으로도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눈 앞에 나 없이는 제가 싼 똥도 치우지 못하는 어린 자식이 있는데, 세상이 망해도 상관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여지껏 빚진 것 하나 없다고 생각한 세상에 묘한 책임감이 처음으로 생기는 순간이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 볼 때 나는 그렇다. 무조건적으로 나를 다 내어줄 수 있다거나 하는 그런 정의는 사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오히려 그런 것보다 자식을 대할 때면, 어쩐지 내가 좀 더 좋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느낀다. 내가 부모로서 갖는 의무감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그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나 싶다.
‘좋은 삶’이 어떤 삶인지는 나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명하듯 구체적으로 써나갈 수 없을 뿐 어렴풋한 짐작은 있다. 그럼 그 어렴풋한 짐작을 구체화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럴 계획은 없다. 생각하기에, ‘좋은 삶’은 말할 수 없고, 살아내면 알 수 있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기준에 비춰봤을 때, 나는 아직 그런 상태가 아니다. 여전히 마음 속에는 여러 원한들이 잠자고 있고, 여전히 이런 저런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으며,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행동해주길 바라는 마음 또한 있기 때문이다. 사는 동안 꽤 많은 책을 읽었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부족한 게 많다. 그래서 나는 계속 읽고, 쓰고, 산다.
회사에 들어가 돈 버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그걸 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다. 딸이 태어난 덕분에 바라오던대로 살게 되었다. 그러니까 딸과 먹고, 자고, 다투고, 치우고, 놀러다니고, 어린이집에 보내고, 함께 소아과에 다녀오고, 친가와 외가를 다니고, 감이당, 남산강학원, 문탁, 규문 등을 다니고 하는, 딸과 함께 보내는 이 일상이 바뀌어버린, 오늘의 내 현장이다. 이 현장에서 나는 자주 갈등하고, 우왕좌왕하고, 허둥댄다. 그래서 딸을 재우고 물러나 내 방으로 오면 그날을 돌아보며 고민하곤 한다. 그때 내가 그렇게 했던 게 좋은 일이었을까, 이렇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것들 말이다. 그래서, 그 현장의 고민들 때문에, 이 현장에서 살아가지 않았더라면 들춰보지 않았을 책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 책들이란, 『면역에 관하여』, 『아버지의 탄생』, 『어머니의 탄생』, 『아이들의 계급투쟁』, 『페미니스트 엄마와 초딩 아들의 성적 대화』,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다크룸』 같은 책들이다. 그뿐 아니다. 도대체 우리 딸이 어떤 세상을 살아가게 될지 궁금한 마음이 들어 만나게 된 『강한 인공지능과 인간』, 『그레타 툰베리의 금요일』, 『착취 도시 서울』같은 책들도 있다. 앞으로 나는 내가 읽은, 읽으려고 하는 이 책들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물론 언급한 목록에서 빠지는 책들도 있을 것이고, 추가되는 책들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하는 데까지 가보는 게 목표다.
굳이 말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책육아’란 이런 것이다. 아이가 책을 읽는 아이로 성장하든, 책 한자 읽지 않는 아이로 성장하든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아이가 훌륭한, 또는 성공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데에도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건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물론 나도 그렇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게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차라리 내가, 아버지로서 할 일은 딸이 세상을 만나는 통로로서 나를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오히려 내가 훌륭해지고 싶다. 훌륭한 통로가 되어서 우리 딸이 좋은 렌즈를 통해 세상을 만나길 바란다. 그것조차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부모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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