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 자식의 행복은 자식의 일
‘자식’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집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면(사실 그럴 틈이 잘 없지만),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저 녀석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저기 앉아서 나와 아내에게 뭘 내놓아라, 무엇을 해달라, 같이 놀아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갑자기 나타나서 어른 둘의 일상에 끼어들더니 그것도 모자라서 일상의 거의 전부를 자신에게 바치도록 만드는 저 녀석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우리가 언제 양육에 관한 계약서를 쓰기를 했나, 하다못해 구두 합의를 보기라도 했나. 저 녀석은 그저 태어났고 당연한 듯 자신의 편의에 따른 요구를 해 온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원래 그렇게 ‘당연한 것’들로 엮여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간혹 그런 ‘당연함’이 낯설게 느껴지곤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문득 아이가 새삼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거야 이놈’ 하며 와락 껴안을 때의 감정도 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그 자식이 나와 닮기까지 했다면 그 낯설음의 강도가 더해진다. 여느 자식이든 부모와 닮게 마련이지만, 우리 아이의 경우엔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찍은 사진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나와 닮았다. 그렇게 닮은 덕에 아이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그런 닮음에 따른 것으로 해석하게 된다. 나도 어릴 때 저랬지, 이렇게 하는 걸 보면 진짜 나랑 닮은 모양이네 같은 식이다. 세상에 그렇게 나와 똑같은, 흔히 하는 말처럼 나의 일부가 나의 ‘바깥’에서 독자적인 생명활동을 하고 있다니!
바로 거기에 부모가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다. 말하자면, 부모는 자신과 꼭 닮은 아이를 자기 밖에서 살고 있는 자신으로 이(오)해하기 너무 쉬운 조건 속에 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예 주객이 전도되어 버릴 수도 있다. 자신을 기준으로 놓고 아이에게 더 닮을 것을 요구하거나, 자신이 이루지 못한 성취를 이루라 강요하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가 프란츠 카프카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말이다.
카프카의 아버지, 카프카, 편지
카프카는 1883년에 태어나 1924년에 죽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정도의 시차가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시차가 그다지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대부분, 특히 생활양식과 그로 인해 형성되는 심성적 부분이 바로 그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핵가족과 도시화, 임금노동, 근대국가체제, 상품생산양식과 소비양식까지, 근대적 삶의 토대가 바로 거기에 있다.
카프카는 대개 「변신」, 『성』, 『소송』 같은 소설작품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는 그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글을 썼다. 그 자신의 말대로 그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학으로 이루어진 사람’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편지광’이기도 했는데, 한국어판 전집을 기준으로 ‘편지’가 실린 책이 전체 열 권 중에 세 권이다.(나머지 여섯 권 중 한권은 엽서다.) 분량만 보아도 질릴 정도다.
여하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그가 남긴 ‘편지’ 중에서 아주 중요한 텍스트로 꼽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오늘 이야기할 일명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로 알려진, 수진자(아버지)에게는 전달되지 않은 1919년의 텍스트다. 카프카를 읽는데 이 텍스트가 중요한 이유는 카프카가 직접 쓴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점과 이른바 그의 소설 전체의 핵심 주제라고 알려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몹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라는 점 때문이다. 물론 그런 건 카프카의 다른 작품들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에게나 중요하다. 다만, 나는 그런 이유(카프카 전작 도전)가 아니어도 이 텍스트를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꼭 한 번씩 읽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말한 것처럼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은 현대인의 ‘심성’이 형성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다른 모든 걸 떠나서 도시화와 그에 따라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핵가족화의 모델이 막 태어난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카프카의 가정도 그러했다. 왕래하는 여러 친척들이 있었지만 생활을 이루었던 것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식들이었다. 카프카는 그 집의 장남이었는데, 자수성가하여 안정적인 생활기반을 만들어낸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바랐던 것은 명예로운 사회적 성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프카가 자신을 닮길 바랐다.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자수성가로 성공한 사람 특유의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고, 그에 따르는 무자비함마저 가진 캐릭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타까운 건 카프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카프카는 조용하고, 조용해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두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원래 그렇게 태어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자질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렇게 되었으리라. 최소한 아버지가 방아쇠를 당긴 것만은 분명하다.
“아버지가(어머니인 경우도 마찬가지지) 아이를 기를 때, 그는 예컨대 그 자신이 벌써부터 증오해왔거나 극복할 수 없었으며 지금까지도 꼭 극복했으면 하고 희망하는 자기 내부의 것들을 아이에게서 발견해. 어린아이는 약하니까 아버지 자신에게서보다 그런 요소의 위력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마련이지. 그래서 아버지는 아이가 성장하기를 진득이 기다리지 못하고 덮어놓고 노발대발하여 형성되어 가는 도중인 인간을 움켜잡는 거야.”
- 「카프카가 누이동생에게 보낸 편지」, 클라우스 바겐바하, 『프라하의 이방인, 카프카』, 한길사, 재인용, 40쪽,
이 글은 카프카가 여동생 엘리에게 아들(카프카의 조카)을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보내라며 충고하는 편지에 쓴 구절이다. 이 구절엔 당연히 그 자신의 경험이 투영되어 있는데, 이를통해 그가 느꼈던 구체적인 스트레스를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카프카의 아버지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을 아이를 통해 극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부모가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부모’로서 읽다보면 문득문득 섬뜩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문장 전체를 인용하지는 않더라도 그렇다. 이를테면 ‘아버님께서는 그 모든 것이 제 잘못인 양’, ‘신기하게도 아버님께서는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를 어떻게든 짐작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저는 그 이후로 말을 잘 듣는 아이가 되었지만’, ‘애당초 저와 무관한 일로만 저를 격려해 주신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같은 말들이다. 이 구절들이 끼어있는 텍스트들을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예언서를 읽어나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 구절들은 거의 보편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부모의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 ‘욕망’이란 어떤 모델에 따라, 그에 맞춰 자식을 성장시키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아이가 레고 블록을 가지고 놀 때였다. 간단한 벽을 만드는 방법을 아이에게 알려주고 있었는데, 내 눈에 몹시 간단해 보이는 그것을 아이가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겨우 한국 나이 네 살이 된 아이가 두 칸짜리 블록을 서로 맞물리게 짜서 벽을 만드는 일을 능숙하게 할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아이가 몇 번 해보지도 않고 블록을 지마음대로 맞추는 것이 아닌가? 물론 나도 안다. 아이에게는 아빠가 알려주는 블록으로 벽 만들기 따위에 발휘할 ‘끈기’가 없다는 걸.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에 나 혼자 열정적이 되어서, 왜 그러냐, 이렇게 쉽게 포기하면 안 된다, 아빠가 하는 걸 잘 봐라, 이렇게 조금 하다가 그냥 안 해버리면 결국 못하게 된다 따위의 말들을 아이에게 쏟아 붓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 그러니까 나는 그 순간에 아이에게 ‘나’를 투영했다. 대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들에 재능은 있지만 끈기가 없어서 어느 것 하나 이렇다하게 성취한 게 없는 ‘나’ 말이다. 지금이라도 마음속에 ‘끈기’를 배양해서 어느 일에든 달려들어도 늦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하고 싶지 않아서 시간을 녹이고 있는 ‘나’ 말이다. 그런 나를 아이에게서 보고 아이를 ‘움켜잡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내가 아이와 나 사이에 있는 ‘경계’를 넘어섰다. 아마 많은 부모들이 그러는 줄 모르고 매일 같이 그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반복될 때, 또는 오래도록 지속될 때, 나는 아이에게 상처가 쌓인다고 생각한다. 상처가 쌓인 아이는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하거나, 어느 한 부분이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한다고까지 생각한다. 이건 각자 스스로를 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다.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육아를 하면서 내가 가장 크게 느끼는 바는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미성숙한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누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동으로 성인이 되고, 그 사이에 겪은 인생의 여러 가지 일들 속에서 경력이 붙는다. 인간이라면 예외 없이 겪게 되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서른을 넘기면 자기 자신에게나 인생에 대해서나 어느 정도의 교만을 갖게 된다. 말하자면 세상사가 자신의 경력과 습관에 맞게 금방금방 해석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게 심해지면 실제 사태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해석기계에 맞는 모양으로 실제를 깔끔하게 판단하고 만다. 그렇지만, 그 시점에서는 자신의 생각이 다 맞는 것 같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세상사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나는 그런 점에서 ‘부모’들이 큰 행운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것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아이’의 존재야말로 세상사가 원래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음을, ‘해석’조차도 쉽게 되지 않는 깜깜한 암흑이었음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걸 알 수 있는 기회는 그렇게 흔하지가 않다. 예전엔 정말 싫어하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진짜로 그렇다고 믿는 말, ‘아이를 낳아봐야 안다’는 그 말의 의미도 아마 이게 아니었을까?
우리 아이는 이제 고작 네 살(만 40개월)이다. 겨우 네 살 밖에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를 통해 나의 심연을 몇 차례 경험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런 인간이 되었는지, 나의 어느 부분이 왜 여전히 성장하지 않고 어린 아이에 머물러 있는지 하는 것들을 아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마도 아이가 자라면 자랄수록 그런 일이 더 잦아지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내가 그 사이에 여러 차례의 성장을 거듭해서 훨씬 수월하게 아이의 성장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되기도 한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는 ‘부모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의문의 답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대할 때 많은 부모들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자신을 ‘완성된 인간’으로 가정하곤 하는데, 다들 알다시피 그렇지가 않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서’ 같은 말들이 자주 눈에 띄는 건 모두들 자신이 ‘완성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길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부모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일까? 결국엔 모든 인간의 진짜 모습이 그렇듯 ‘과정 속의 인간’이다. 아이의 정신적 미성숙함이나 낮은 신체의 발달 상태를 매일 대하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성숙한 자신이 그렇게나 부족한 인간이라는 걸 쉽게 잊곤 하는데,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과정 속’에 있고 여전히 배울 게 많은 인간이라는 걸 자각한다면 부모와 아이 사이에 넘지 말아야 하는 어떤 경계를 넘어가는 일이 훨씬 드물어진다. 말하자면 자신에 대한 평가가 낮아지고, 아이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면서 인간적인 성숙도 면에서 아이와의 거리가 줄어드는 것이다. 이건 일종의 ‘태도’에 관한 문제인데,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끈기 있게 해 봐야지’라는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경계를 넘지 않을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카프카의 텍스트는 그런 점에서 보자면 정말 중요한, 가장 극단적인 ‘실패 사례’일지도 모른다. 카프카는 대단한 작가였지만 생전엔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고, 작품 외적인 면, 생애사적인 면에서 보자면 그다지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대개 부모라면 자식이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가가 되기를 바라겠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행복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부모가 원하는 자식의 ‘행복’은 대개 자식이 행복해지는 걸 막곤 한다. 카프카의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카프카가 명망 높은 법률가가 되고, 하다못해 가족의 사업을 물려받아 더욱 성장시키는, 아버지 자신의 행복에 따라 카프카의 행복을 규정했다. 카프카의 인생에서 불행한 점이 있었다면 바로 그 점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이 그러길 바랐다는 점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안간힘을 쓸 생각이다. 어떻게 해서든 아이의 행복은 아이에게 맡길 수 있는 부모가 되는 일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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