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엄마의 탄생』 - ‘엄마’를 해체할 수는 없을까?

『엄마의 탄생』 - ‘엄마’를 해체할 수는 없을까?



엄마는 철인도 아니고 슈퍼우먼도 아니다. 엄마는 감정이 있고, 한정된 시간과 돈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게다가 이러한 엄마 노릇을 그나마 실천할 수 있는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시간적 재정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 전업주부 여성들 뿐이다.

- 김보성, 김향수, 안미선 지음, 『엄마의 탄생』, 오월의 봄, 36쪽


고장난 시스템, ‘엄마’


아이를 돌보는 데 있어서 아빠인 나는 가끔씩 어떤 정서적 한계 같은 게 있다고 느낀다. 아이가 분명 아빠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감정이 격해지거나, (내가 보기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아이에겐 심각한) 극한 상황에서 아이는 제 엄마를 찾기도 하거니와 마치 엄마와는 언어적이거나 표현적인 것 이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이 행동한다. 그럴 때면 아빠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아이와 엄마 사이의 영역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아빠로서 딱히 할 수 있는 정서적인 역할이 없다. 최선의 대안은 스스로를 좀더 기능적으로 바꾸는 것인데, 설거지나 청소, 빨래 같은 해도해도 끝이 나지 않아서 언제든 하려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집안일을 하거나 그마저도 없을 땐 그냥 소파나 식탁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다. 언젠가 그런 순간에 다른 방으로 도망가려고 할 때 아내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당신이 당장 애를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 있는 게 나를 도와주는거야’ 같은 식의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 순간에 나는 내가 이 가족에서 ‘아빠’(라는 역할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다. 




사실 우리 집 아이의 ‘주양육자’로서 나는 ‘아빠’라는 정체성에 대해 항상 고민하곤 한다. 지금까지 보고 들어온 ‘아빠’의 삶이라는 게 집안일은 몽땅 아내(엄마)에게 맡기고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참고할만한 레퍼런스가 딱히 없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나는 ‘아빠’로서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를 것이며, 내 인생은 또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 하는 고민 말이다. 고민을 해보기는 했지만, 딱히 이렇다할 명쾌한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고민이 사실은 대부분의 ‘엄마’들이 하고 있는 고민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 ‘아빠’로서 내가 하는 고민이나, ‘엄마’로서 다른 여성들이 하는 고민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다. 과거처럼 ‘여성’에게 전업주부로 사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던 시절에야 아이는 먹이고 입히고 재우면 되고, 내 인생은 그 일을 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물론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제 세상이 바뀌어서 가족구성원 중에 돈 벌 수 있는자는 모두 돈을 벌어야 하고, 그게 아니어도 어떻게든 ‘내 인생’에 나름의 의미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절이 되고 말았다. 


시절이 이렇게 되었다는 건, 과거엔 알맞았던 체제가 더는 알맞지 않다는 의미다. 나는 직접 ‘양육자’가 되어보기 전까지는 그걸 몰랐다. 알려고 했는데 알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예 저 바깥에 있는 것처럼 머릿속의 어떤 부분에서도 고려할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아마 대부분의 육아하지 않는, 해보지 못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건, 지금까지 인생에서 겪어던 그 어떤 사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상한 사태다. 그건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가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하려는 초유의 사태이며, 그 엉망진창인 상황에서도 그 아이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 정말로 이상한 사태다. 그리고 그런 일을 매일매일 수백, 수천일을 겪어야 하는,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아이의 주양육자가 되면서부터 그런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왔는데, 처음엔 이런 일을 오로지 한 사람이 할 수 있다는 데에 놀랐다. 우리 집이야 운이 좋은 편이어서 서로가 균형을 맞춰가며 아이를 돌보고 있지만, 주변의 내 친구들만 떠올려보아도 아이를 보는 건 거의 전적으로 ‘엄마’들의 몫이었는데, 어떻게 그걸 할 수 있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보조양육자가 없다면 ‘육아’는 극기훈련이 되고 만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엄마’로 사는 일은 정말 힘이 든다. 보조양육자가 있더라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 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아이를 가진 엄마에게 자동으로 붙는 ‘맘충’이라는 멸칭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예전보다 몸은 더 편해졌을테지만,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견뎌야 하는 일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탓이다. 『엄마의 탄생』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은 후에 들었던 생각은 ‘엄마’라는 이름이 붙은, 오랜 시간 동안 어떤 식으로든 ‘가족 체제’를 유지해 오던 이 시스템이 이제 한계에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과거의 엄마들이 오래도록 무리하여 결국엔 마모되어 버렸다면, 오늘날의 ‘엄마’는 어딘가 엉키고, 부러져 고장나고 있는 느낌이다. 



‘엄마’는 돈이 된다


『엄마의 탄생』의 부제는 ‘대한민국에서 엄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이다. 그렇다. ‘엄마’는 보통 생각하듯이 아이가 생기면 자동으로 되는 그런 게 전혀 아니다. 그건 ‘만들어’ 진다. 직관적으로 보자면 우리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와, 우리 어머니가 나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아내가 우리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이 세 사람을 ‘엄마’라는 한 범주에 묶을 수 있는건가 싶을 정도로 많이 다르다. 이건 한 사회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 이야기는 언제가 다루게될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이나 게른스하임의 『모성애의 발명』에서 더 자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엄마’라고 해서 아이를 돌보는 데 필요한 공통의 요소를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는 점만 확인하면 된다. 차라리 그건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고, 각 개인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장착되는 것에 가깝다. 말하자면 이른바 ‘모성’이라고 묶이는 그것은 사회적으로 생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20세기 초의 ‘엄마’와 21세기의 ‘엄마’는 생산된 방식도 수행하는 역할도 기능도 모두 다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엄마의 탄생』은 오늘날의 ‘엄마’가 어떤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지, 그들을 둘러싼 조건들은 어떠한지, 그리고 그 시스템이 ‘엄마’를 어떻게 고장내고 있는지를 다루는 보고서다.


아이를 기르다 보면 매순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지 모를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를테면 아이가 어디가 가렵다고 할 때 거기에 어떤 연고를 발라야 하는지, 자고 싶다고 할 때 재워야 할지 조금 버티다 재워야 할지, 대근육 소근육 발달에 도움이 될만한 놀이가 무엇이 있는지, 나가서 놀건지 집에서 놀건지 등등, 이 모든 일이 알게 모르게 아이의 발달에 영향을 미치고, 양육자인 내 결정의 결과는 고스란히 아이에게 반영되는 식이다. 이미 망가질만큼 망가진 나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그게 내 자식에 관한 것이라면 고민이 안 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부모가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 그런 순간에 기가막히게 끼어드는 게 있으니 바로 ‘상품’이다. 이걸 바르면 아토피가 낫는다, 이걸 가지고 놀면 뇌발달에 좋다, 이걸 먹으면 뼈가 튼튼해지고 키가 큰다, 달지만 설탕이 들어 있지 않은 간식을 먹여라 등등. 가끔은 그들의 열정에 놀랄 정도다. 무언가 애매한 상황에서 그걸 해결해줄 솔루션을 찾아보면 그게 있다. 심지어 상상도 하지 못할만큼 활성화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들을 조금씩 겪다가 문득, 부모로서 내가 어떤 판단을 내려야할 때 느끼는 모종의 불안감이 만들어진 게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반대로 상품들이 개발되고, 그 상품의 마케팅 활동 속에서 불안감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우리는 산후조리원을 이용하지 않아서 구체적인 걸 알지 못했지만, 책을 통해 내가 생각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임신부터 출산, 산후조리, 본격 육아의 과정 속에서 ‘엄마’들은 매번 지출과 불안 사이를 오가야 한다. 이 과정은 ‘여성’을 ‘엄마’로 재탄생시키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엄마’인게 아니고, 이 무수한 선택을 감당하기 때문에 ‘엄마’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아이가 생기면 가입할 수 있는 태아 보험 상품, 원활한 출산을 돕는 운동 프로그램, 각종 용품들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육아 박람회까지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아이를 위한 온갖 형태의 상품이 ‘엄마’를 포위하고 있다. 엄마들은 그 모든 것들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한국 같은 치열하다 못해 잔혹한 경쟁 사회에서 자랄 자신의 아이가 ‘남들 다 하는 걸’ 못해서 뒤쳐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불안하다. 그러니까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렇다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다음에는 그 압박이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지는 않는다. ‘과학’의 이름으로 홍보되는 유사 과학에 가까운 아기용품들(3장 전문적으로 키우고 있나요?), 아이가 평생 가지고 갈 ‘추억’이라는 딱지가 붙은 가족 서사(6장 아기는 언제나 이벤트 중), 그리고 이 분야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사교육 상품들(7장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늦어요)까지. ‘엄마’에게 결정과 감수 요구하고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온갖 형태의 상품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경쟁에서의 승리’를 원해서 그런 것들이 생겨난 게 아니다. 차라리 누구도 뒤쳐지는 걸 자식에게 경험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100년 전의 어머니나 50년 전의 어머니들에게는 ‘그게 뭐야’ 싶은 이 모든 것들이 이렇게 생겨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이 세상은 이미 뒤쳐지면 끝장 날 것 같은 불안에 사로잡힌 사회가 되었다. 그런 사회에서 ‘여성’을 ‘엄마’로 재탄생시키는 일은 돈이 된다. 세상이 이렇게나 바뀐 와중에도 끊임없이 ‘내 아이를 생각하는 엄마의 선택’ 같은, 이걸 선택하지 않는 엄마는 내 아이를 생각하지 않는 엄마라 말하는, 말 같지도 않는 광고들이 판을 치는 이유다. 



‘아빠’는 여전히 야근 중


정말 이상한 것은, 그런 사회를 인정하고,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한다고 쳐도, 여전히 그 선택의 중압감이 ‘엄마’에게 고스란히 걸려있다는 점이다. 세상이 이렇게나 변했는데 ‘아빠’들은 여전히 아빠는 돈 벌고 엄마는 애보고, 애들은 공부 열심히 하는 ‘근대 가족 체제’에 머물고 싶어한다. 왜그럴까?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재택근무를 하고 있지만, 나에게도 아이가 있기 전 직장생활에 열심이던 시절이 있었다. 첫 직장부터 야근에 길들여졌던 내 몸뚱이는 ‘중독’이라고 불러도 될만큼 일을 쫓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힘들면서도 꽤나 짜릿한 시절이었다. ‘일’이라는 것의 속성이 그렇다. 아무리 몸이 피곤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더라고 무언가 ‘완결’을 보는 일이 주는 쾌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아’는 어떤가? 그건 빡센 야근이나 철야에 비할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 분야에서는 어떤 일도 ‘끝’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그런 ‘빡센’ 직장생활과 육아를 모두 경험해 본 나로서는 직장생활과 육아를 등치시키는 일부 남성들의 항변에 코웃음을 친다. ‘힘듦’에 있어 그 두가지는 절대 한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없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한나절 동안 보낸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어린이집에 가 있는 시간 동안 놀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다른 건 야근 후의 퇴근은 내가 ‘자유’를 향해 가는 것이지만, 아이의 하원은 집안일이라는 하나의 제약에서 다른 제약으로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 일엔 딱히 정해진 휴가도, 휴일이 없다. 끝도 없다.


책을 보면 중간 중간에 고난을 겪은 ‘엄마’들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기본적인 내용은 ‘아이’와의 관계에서 ‘엄마’가 겪는 어려움에 관한 것인데, 여기서 등장하는 ‘남편’들은 놀랄 정도로 집에는 관심 없다. 관심이 있는데, 그 관심의 내용이란 집이 ‘깨끗했으면 좋겠다’, ‘애 공부는 엄마 책임 아니냐’, ‘집에선 좀 쉬고 싶다’는 형태로 등장한다. 그리고 엄마들의 언어 속에서 이들은 ‘지극히 평범한 남자’다. 이 정도가 ‘지극히 평범’하다는 게 정말 참담하기는 하지만, 현실이니 일단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참담함을 느낀다고 해서 내가 ‘엄마’들이 무결한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그 훌륭하다더 사람들도 저마다의 흠결이 있고 알려지지 않았던 치부들이 있는 판에 그냥 보통의 ‘지극히 평범한 엄마들’이 그럴리야 없지 않은가? 그래서 차라리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째서 그런 이른바 그렇게 ’한심’하다는 ‘여자들’에게 집안일의 모든 것을 맡겨놓는 것인가? 그리고 어째서 ‘완벽한 모성’을 준거로 그들을 비난하는가?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저마다 비슷비슷하면서도 알고보면 각기 다른 ‘인간들’이다. 이중에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엄마’들에게 가해지는 비난은 지나치게 불공정하다. 



‘엄마’를 해체하기


엄마로서 성공과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여성들은 끊임없이 긴장과 불안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엄마 노릇의 성공은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아이, 훌륭한 인적자원을 만들면 성공한 것인가? 여성들은 쏟아지는 엄마 역할에 질문을 던진다. 엄마라는 이름에 주어진 숙제들이 너무 부당하다고 말이다.

- 같은 책, 210쪽


‘아이 엄마’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모두도 아니고, 대부분도 아니겠지만,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사람들이 ‘맘충’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만큼 이미 ‘엄마’라는 표상은 혐오로 얼룩져있다. 물론 나는 그렇게 호명되는 엄마들이 아무 잘못도 없이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떠도는 이야기들 속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싶은 이야기들도 많이 접했고, 그것들은 그것대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반대로 그들을 그렇게 지시하는 사람들도 그렇게까지 탁월하게 자기 삶을 꾸려가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들이 ‘맘충’이라 부르는 그들보다 더 못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인간은 뉴스에 나올 정도의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게 저마다 비슷비슷한 잘못들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집단을 그런 식으로 호명해도 되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어느 집단을 싸잡아 멸칭으로 호명해버리고 나면, 어느 시점부터는 다른 가능성 전체가 무시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상의 모든 엄마가 ‘맘충’이 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런 멸칭을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호명 속에서 자기 주변의 ‘엄마’들은 쏙 빼버릴테지만, 그건 그것대로 파렴치한 짓이라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런 식의 혐오와 차별은 악(惡) 중의 악이라는 살인 못지 않게 한 없이 악이 가깝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그런 멸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아내가 가장 잘 알겠지만, 나는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헤이트 스피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삐딱하고, 재수없고, 교만한 그런 품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내가 주양육자가 되면서 가장 많이 바뀐 게 그런 것들이다. 아이와 부대끼면서도 계속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가장 먼저 나 스스로가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아이를 돌보는 데 가장 필요한 덕목이 인내와 참기, 견디기라고 생각하는데 비판, 비꼬기, 교만 같은 성품들은 아이를 돌보는데 필요한 것들과 상극이기 때문이다. ‘자동’으로 나오던 게 최소한 ‘수동’으로는 변했고, 몇가지 회로는 아예 닫힌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육아가 애비를 이렇게나 바꿔놓는다.




말했다시피 우리 집에선 내가, 그러니까 아빠가 주로 아이를 본다. 이건 상황 덕에 그렇게 된 탓이 크지만, 나는 나 같은 경우가 훨씬 더 늘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가령 자식이 있는 집 100가구 중에 아빠가 주 양육자인 경우가 3분의1만 되어도 ‘엄마’를 향한 세상의 손가락질이나 압력이 지금보다 훨씬, 극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빠-남성’이 육아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데서 오는 효과가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기는 하겠지만, 또 한가지 효과가 있다. 그것은 양육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좀 더 다양한 관점을 생기는 효과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양육’의 주인공은 아이도, 아버지도 아닌 ‘엄마’였다. 전업주부든, 워킹맘이든 할 것 없이 ‘애를 보는 사람’은 이른바 ‘본능적 모성’을 가졌다고 하는 존재로서 엄마였다. 이는 다시 말해 ‘엄마’가 아이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상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아빠’의 관점이 설 자리는 없다. 이런 조건에서는 엄마는 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 매번 혼자 판단해야 했다. 거기서 아빠는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싶지만 한 일도 없고 해도 먹히질 않으니 종국에 그냥 입을 다물로 가정 내 왕따가 되곤 했다. 이 구조를 깨려면 답은 하나다. ‘아빠’가 어떻게 해서라도, ‘주’든 ‘보조’든 실제로 기저귀를 갈고, 밥을 먹이고, 씻기는 일을 하는 ‘양육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관점도 대응방식의 종류도 늘어나게 된다.(아마 싸움도 늘겠지만, 결국엔 평형 상태에 다다르지 않을까?)


그런 식의 관점의 다양화가 단기적으로는 양육자간의 잦은 다툼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아이의 인생에 양육자가 행사하는 영향력의 감소로 이어지지 않을까. 쉽게 말해 아이가 공부로 성공했으면 하는 아버지와, 그저 밝고 건강하게 크면 그만이라는 어머니의 바람이 동시에 작용하는 경우가 하나의 바람만이 작용하는 경우보다 아이가 독립된 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더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다. 그러니까 이건 ‘양육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다.(지금까지 이어져 온 양육에 있어 ‘엄마의 독재’를 끝장내자는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그런 상태로 가자는 게 『엄마의 탄생』의 진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농담처럼 이야기 하기는 했지만, 나는 이런 식의 변화가 실제로 일어난다면 ‘엄마’에 대한 일반적 표상들이 대부분 해체되는 효과가 있으리라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위대한 모성’,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 같은 신화는 집어치우고 ‘엄마’도 결국엔 ‘인간’이라 데까지 이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게 된다면 오늘날 문제가 되는 ‘성별갈등’이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된다면 더불어 국가가 노심초사 걱정하는 출산율이 높아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뭐 물론 그건 국가의 바람이고, 나 스스로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래서 국가는 모성신화를 강화하는 쪽으로 출산 캠페인을 벌이지 말고, ‘부성신화’를 새로 쓰길 바란다.


어쨌거나, ‘엄마’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이 조금 줄어들었으면 좋겠고, 압력의 질도 극적으로 변화했으면 좋겠다. 엄마들이 자기 자신과 다투지 않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다.



덧1. 책 속의 본문도 훌륭하지만, 중간 중간에 있는 엄마들의 인터뷰를 꼭 읽어보길 바란다. 거기에 진짜 이 바닥(육아판)의 이야기가 있다.

덧2. 마침 쓴 사람도 엄마 셋이고, 제목에 '탄생'이 들어간 다는 점에서 이 책과 비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책이 있다. 『다른 아빠의 탄생』이라고...(책소개 바로가기) 나도 함께 쓴 책이다. 두 권을 같이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엄마'와 '아빠'가 처한 환경이 얼마나 다르면 '엄마들'이 쓴 책은 이렇게나 처절하고, '아빠들'이 쓴 책은 상대적으로 발랄한지 비교해 보자.(이거슨 광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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