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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연암을만나다

[연암을만나다] 눈구멍이나 귓구멍에 숨어보겠는가

by 북드라망 2019. 12. 19.

눈구멍이나 귓구멍에 숨어보겠는가




몇 달 전, 나는 매일 고민을 했다. 퇴근 후 연구실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적당히 일했을 때는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연구실로 향했지만, 낮 동안 일에 시달렸을 때는 좀 쉬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공부방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좋기도 했지만… 왠지 사람을 만나는 게 피곤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난 결국 잠깐을 들르더라도 최대한 연구실에 가기로 했다.




그 이유는 집에 있는 내가 아~주 맘에 들지 않아서였다. 퇴근 후 나는 쉰다는 핑계로 집에 들어가서 과자 한 봉지를 뜯으며, 망상과 영상의 바다에서 수영을 했다. 그러다 보면 금세 10시~11시가 되었다. 그럴수록 더 피곤했고, 기분도 더 다운되었다. ‘차라리 그냥 연구실에 갈걸.’ 후회만 남았다. 재밌지도 않고 유쾌하지도 않은데, 왜 난 이걸 반복하고 있는 걸까? 질문은 잠시 접어두고, 우선 그냥 이러지 않아 보기로 했다. 침잠되는 이 느낌이 싫었으니까.


연암의 이야기 속에도 어쩐지 비슷한 인물이 있었다. 진사 장중거.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사고를 치다가, 사람들의 원성에 못 이겨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굳게 결심을 한다. 그는 술과 술친구 등 외부의 유혹을 막기 위해 집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간과한 것은 집 안에 있는 적(敵)! 바로 그 자신이었다.


“나는 능히 그대의 몸을 그대의 귓구멍이나 눈구멍 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 아무리 천지가 크고 사해다 넓다지만 그 눈구멍이나 귓구멍보다 더 여유가 있을 수 없으니 그대가 이 속에 숨기를 바라는가?


무릇 사람이 외물과 교접하고 일이 도리와 합치하는 데에는 도道가 있으니 그것을 예禮라고 한다. 그대가 그대 몸을 이기기를 마치 큰 적을 막아 내듯 하여, 이 예에 따라 절제하고 이 예를 본받으며 예에 맞지 않는 것을 귀에 남겨 두지 않는다면 몸을 숨기는 데에 무한한 여지가 있을 것이다. (…) 마음은 귀와 눈에 비해 더욱더 광대하니, 예에 맞지 않는 것으로 마음에 동요되지 않는다면 내 몸의 전체와 대용이 진실로 방촌方寸의 사이(마음)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어 장차 어디로 가든지 보존되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다.”


(박지원, 「이존당기(以存堂記)」, 『연암집 (상)』, 돌베개, 67~68쪽)


우리는 외물, 외부의 사건과 만나 각자의 윤리들을 만들어 낸다. 그것을 “예(禮)”라고 한다. 각자의 예에 맞지 않는 것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우리는 걸릴 것이 없어진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스스로 거리낄 일을 하지 않으니, 남의 눈초리도 남의 헐뜯음도 걸리지 않는 것이다. 걸릴만한 것을 보지도, 듣지도 않았으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여 연암은 눈구멍이나 귓구멍처럼 몸을 숨기기에 여유 있는 곳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에 맞게 산다는 것’은 나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펼쳐져 있는 세계로 나를 들어다 놓는 것이다. 연암은 말한다. 나의 문제를 바라볼 때, 나의 경계를 견고히 하고 숨어들어가는 게 아니라 그 울타리를 부수고 예를 만들어 내라고. 스스로를 우물 속에 가둬두지 말고, 우물을 부숴 바다와 하나가 되게 하라고. 그러면 자유롭고 넓은 세상이 펼쳐진다고 말이다.


내 안의 적들이 활기를 찾는 집에서, 그 적들에게 나를 내어주는 것이 나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이 오묘함 속에 깃든 내 마음을 보아야 한다. 왜 ‘풀어지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인지. 왜 ‘밀가루 간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오는 것인지. 또 왜 이 적들에게 쉽게 나를 놓아버리는 것인지 까지.


연구실에서는 자연스럽게 그 생각이 나진 않지만, 그 공간을 벗어나면 왠지 풀어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직 이것이 나의 예(윤리)는 아닌 것이다. 공동체윤리들이 나에게 수행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 집에 있든 연구실에 있든, 어디서든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예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한 번 믿어보려고 한다. 나를 가리는 것이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사건과 부딪히며 “예(禮)”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나를 지키는 길임을.


글_원자연(남산강학원 청년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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