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 :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지은이 인터뷰

『고미숙의 글쓰기 특강 :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지은이 인터뷰



1. 많은 글쓰기 책이 있지만, 선생님의 이 책은 다른 글쓰기 책에서는 볼 수 없는 ‘글쓰기의 존재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글쓰기’야말로 우리의 생명과 존재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하고 계신데요, 어떻게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거라고 여겨 왔던 글쓰기가 존재 일반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간략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간략하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보통 글쓰기를 여행이나 운동 등 여러 취미 활동 중 하나이거나 조금 전문적인 취미처럼 생각하기가 쉽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고요. 그런데 제가 한 20년 동안 백수지성으로, 매년 한 두 권의 글을 쓰고, 여러 가지 (공동체) 활동과 삶을 실험하면서 ‘글쓰기’ 자체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것들이 생겼습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글쓰기’는 여러 취미 활동 중 하나가 결코 아닙니다. 간략히 요점 몇 가지만 말씀드려 볼게요.


지금은 ‘대중지성의 시대’입니다. ‘대중지성의 시대’란 대중이 (전통적인 의미의) 엘리트가 되는 시대라는 겁니다. 그럼 ‘엘리트’는 뭐냐,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인식과 사유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엘리트’입니다. 그게 아니라 (엘리트들이) 생산한 글을 받아보고, 그 사유를 받아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대중’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글쓰기’란 다른 활동들과는 다르게 어떤 ‘본질적 능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금 시대는 모든 사람이 글을 쓸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환경 속에 있습니다. 말인즉, ‘대중’과 ‘엘리트’의 구분이 과거와 같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는 겁니다. 디지털 네트워크,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무한한 독서를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있는 것들을 잘 편집해서 ‘나의 사유’를 펼치면 되는 거죠. 그런데 글쓰기를 보통의 취미나, 아니면 특별히 전문적인 무언가로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거기(인식과 사유의 방향 설정)까지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중에 글쓰기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이 자체가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조건이 되었으니까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책들이 ‘테크닉’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데요, 제가 공동체에서 ‘글쓰기’와 관련된 여러 활동을 해 본 결과 ‘테크닉’은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한 게 아닙니다. 1~2년 배우면 똑같습니다. 기술적인 건 배우면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왜 어떤 사람은 책을 내는 데까지 가고, 어떤 사람은 그냥 포기하고 마는가 생각해 보니, (포기하는 경우는) 이 ‘글쓰기’가 우리의 생명, 삶에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걸 모르고, 그저 거쳐 가는 한 과정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보통은 ‘테크닉’을 잘 익히면, 글을 잘 쓰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글쓰기’를 욕망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걸 내 삶에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시키는지가 중요한 겁니다. 책에 쓴 것처럼 ‘글쓰기가 존재의 근원’이라는 것이죠. 글쓰기를 존재의 근거로 생각하면 중간에 멈추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걸(글쓰기)를 계속해갈 동력을 얻는 것이죠. 저는 글을 쓸 때 내 안에 차오르는 어떤, 충만감? 그런 것이 있는데 그건 정말 미세합니다. 나 말고는 아무도 눈치를 챌 수 없죠. 그건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겁니다. 테크닉이 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하지만 나 자신은 글을 쓰는 게 너무너무 성취감을 주는 거예요. 왜 그런 걸까? 그건 바로 내가 글쓰기를 내 존재와 직접 연결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깨닫고, 책에서도 그 점을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그런 관점은 인생 전체의 비전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어떤 화려한 직업, 성공한 직업도 ‘은퇴’라는 게 있어요. 그럼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은퇴를 하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화려하고 성공적인 일을 했더라도 그걸 써놓지 않으면 그건 그냥 흩어져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들 하죠. 이건 말인즉 ‘노동’이 점점 사라져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노동하느라 부족했던 시간들이 남는 시간으로 바뀌는 와중에 도대체 무얼 할 것인가. 인간은 결국 인식의 지도를 새로 그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해부해서 성찰해 봐야 하고요.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럼 그때 필요한 게 뭘까요? 바로 말과 글입니다. 저는 말과 글이 가장 보편적이면서 자기를 성찰하면서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그러한 매개라고 보기 때문에, 이건 모든 사람의 비전이 될 수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 중요한 일을 예전처럼 엘리트에게 맡겨놓고 그걸 따라가겠다?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거죠.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들이 막 이렇게 어우러져서 새로운 어떤 중중무진의 우주를 만들어 내는, 이런 게 아마 디지털 혁명이 가져다준 새로운 삶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말과 글을 창조하고 조율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글쓰기의 존재론’을 되새겨 볼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2. 앞질문과 연관해서 어떻게 글쓰기가 ‘양생과 구도 그리고 밥벌이’가 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셔요.


양생의 핵심은 내 몸의 기운, 정기신(精氣神)과 내 몸 바깥, 자연의 기운을 조화롭게 소통시키는 것입니다. 기운은 사람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고, 계절에 따라 또 달라지죠. 이렇게 천변만화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활한 소통 상태를 만들려면 집중해야 합니다. ‘집중력’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문제인데, 이때 ‘집중’과 ‘집착’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집착’은 몸의 욕망, 에너지를 특정한 한 가지에 쏟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것들과의 소통은 끊어지지요. 그러면 몸이 망가집니다. 집중은 몸 전체의 기운을 모으는 능력이에요. 이 능력이 떨어지면 사람의 몸과 마음은 항상 흩어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언제나 산만하려고 하죠.(웃음) 한마음으로 무언가를 해내려고 하면 1분도 사실 힘들어요. 그런 걸 매 순간 느끼죠. 그러니까 ‘정신줄 잡아라’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이해가 됩니다. 그걸 놓치면 그냥 하루 종일 붕 떠서 사는 것 같죠. 그래서, ‘집중’을 해야 하는데, 이걸 하려면 기운이 몸 아래쪽은 내려가서 딱 버텨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위로 올라와서 방방 뜬다? 그러면 바로 그게 ‘중독’이에요. 아래로 딱 내려와서 버티는 힘을 내는 상태, 이걸 의역학에서 ‘수승화강’이라고 부릅니다. 명상을 하거나, 기도나, 백팔배를 하거나 하는 것들이 그런 상태를 만들려고 하는 활동이죠. 그런 활동들이 일상에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수행자’가 아닌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활동이 뭐가 있을까요? 바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겁니다. 이 일은 절대 중독이 안 돼요. ‘독서’에 중독된다? 그런 사람은 없어요. 특정 장르에 중독이 될 수는 있겠죠. 그렇지만 그런 사람에게 ‘불경’이나 『주역』을 가져다주면 절대 중독되지 않아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으면서 중독이 되나요? 불가능합니다. 글을 쓰는 데 중독이 된다? 그건 자기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고 쓰면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과 세계를 성찰하는 데 중독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글쓰기를 하면 몸 전체가 기운을 수렴해 집중하게 됩니다. 양생에 이보다 좋은 건 없는 셈이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최고의 행위, 일단은 독서고 그다음은 글쓰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구도’는 자신의 인생을 길게 보는 겁니다. 자신의 생로병사를 보는 건데, 그것의 핵심은 생사, 결국은 ‘죽음’이죠.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게 핵심이에요. 죽음은 ‘절대적’인 겁니다. 이걸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냥 살다보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책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살피고, 자기 삶에 응용하고, 그러니까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2600년 전 카렌 암스트롱이 ‘축의 시대’라고 불렀던 그 지점으로 가게 됩니다. 소크라테스, 공자, 노자, 부처가 등장했던 시대죠. 그 분들의 주제도 ‘죽음’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내가 죽어도 삶은 계속되죠. 이걸 ‘역사’라 부르든, ‘우주적 순환’이라 부르든, ‘영혼 불멸’이라 부르든 어쨌건 그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정답은 없죠. 정답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찾아갑니다. 그게 ‘구도’인 거고요. ‘답’이 있고, 그걸 찾으러 가는 게 ‘구도’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질문을 붙들고 지평선을 향해 계속 가는 행위가 ‘구도’입니다. 인간이 구원되는 건 바로 그 길을 걸을 때라는 거죠. 삶과 죽음이 결국엔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닫고, 편안하게 잠들며 죽음을 연습하다가 종국엔 자신의 죽음도 담백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렇게 자신의 삶을 긍정해 가는 것, 그런 게 구도인 것입니다.


밥벌이에 대해서는, 제가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안 되었죠. 중년백수로 산 지 20년이 좀 되었고요.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서 잘 먹고 잘 살았을까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랬습니다. 글을 쓰니까 책을 다양하게 읽을 수 있었고요. 공동체 속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결합할 수 있었고요. 공부와 사람이 결합하면 밥이 생깁니다. 이건 과학적인 원리들만큼이나 확실한 법칙입니다. 한번 해보세요. 공부하려고 모이고, 모여서 공부를 했는데 굶고 가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게 정치고 산업이고 경제 아닌가요? 다 그걸로 먹고 삽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한시적이죠. 회사가 있을 때, 또 뭐 내가 국회의원일 때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책을 읽고 쓰는 일은 인류가 영원히 해야 할 보편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매우 안정적인 밥벌이의 토대입니다. 제 인생이 그 증거고요. 그리고 이런 좋은 토대, 길에 사람들이 함께 가면 좋지 않을까 해서 네트워크가 형성이 되기도 했고, 여기까지 온 거고요. 이 네트워크에 온 사람들이 자기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와서 글을 쓰고, 강의도 하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잘 먹고, 잘 산다는 게 사회적으로 화려하게 성공하고, 이런 걸로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 말은 정말 자신의 삶에 유용한, 그리고 타인에게도 이로운 밥벌이라는 겁니다. 남을 속이고 돈을 벌거나, 돈을 버는 것 자체에 중독되어서 필요 이상의 돈을 벌거나 하는 것이 아닌 거죠. 그러면 ‘소외’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읽고 쓰는 행위는 나를 이롭게 하고, 타인을 이롭게 하니까 떳떳하죠. 그렇게 해서 버는 밥과 돈은 나를 건강하게 해주고, 남으면 이걸 어떻게 나눌까 고민하고. 이런 직업이 이거 말고 또 있을까요?

3. 보통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글쓰기와 읽기의 중요성을 함께 이야기하는 책들은 적지 않은데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쓰기는 읽기의 연장선이자 반전이며 도약”이라고 하시면서 “읽으면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어째서 쓰기는 읽기의 도약이 되는지 또 왜 읽으면 써야 하는지 말씀해 주셔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예전에는 책에 접근할 수가 없으니까 책을 읽는 것만 해도 엄청난 도약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모든 사람이 책을 접할 수 있죠. 도서관도 곳곳에 있고, 책이 넘치죠. 그리고 또 학력이 굉장히 높아졌잖아요. 그러니까 읽기는 사실 충분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읽은 사람들이 많다는 건, 다들 뭔가 쓸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안 되고 있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저는 그 점이 정말 의아했습니다. 쓰지 않으면 읽는 것이 빈곤해집니다. 어느 수준 이상 넘어갈 수가 없거든요. 


독서를 취미로 한다? 그러면 취미는 즐거워야 하죠. 그러면 나를 즐겁고 편안하게 해주는 책만 읽겠죠. 그런 책만을 읽고서 뭔가를 생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인식이 확장되는 것도 한계가 있고요. 즐거움이 있는 거니까 내 감정을 계속 동인한 상태에 머무르게 해주잖아요. ‘나는 읽기만 하면 돼.’ 그러면 읽기의 영역이 저자나 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그 틀에서 벗어나지도 않고, 사실 벗어나려는 생각도 안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쓴 책이나 강의를 열심히 읽고 듣습니다. 이건 사실 편집된 걸 보는 거죠. 그래도 거기서 뭔가를 알게 됐다고 합시다. 이것도 사실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얻은 지식은 몹시 희소한 겁니다. 그걸 내 삶에 적용하려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너무 희미해져서 한줌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 읽기와 강의의 영역 밖에는 자본이 만들어 놓은 온갖 화려한 상품과 서비스들이 넘쳐나죠. 그것들은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인식이 확장되고, 사유가 넓어졌다고 쳐요. 그런데 생활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쇼핑이나 온갖 중독적인 것들을 탐닉합니다. 단순히 읽고 강의를 듣는 것으로는 일상을 바꾸는 힘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청년들은 대폭 확장된 교육의 기회를 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누구? 여긴 어디?’를 외치고 다닙니다. 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할까요? 도대체 대학이라는 건 뭘까요? 교육이라는 건 자기 스스로 인생의 길을 찾는 능력을 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부모에게 독립도 못하고, 사회에 반항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거나 하지도 못하고, 그냥 삶이 정처가 없어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맨날 자본주의 질서, 물질만능주의 이런 게 문제라고 한 것도 벌써 몇 십 년이나 되었고요. ‘토대’가 바뀌지 않은 겁니다. 그럼 그 ‘토대’란 뭘까요? ‘일자리’가 아닙니다. 대학에서 ‘쓰기’를 배우지 않은 겁니다. 쓰기. ‘쓰는 주체’가 되지 않은 겁니다. 쓰게 되면 말하게 됩니다. 누구 앞에서 말을 하게 되려면 내가 쓸 수 있어야 되요. 


그냥 책을 읽고 소비할 때는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책을 읽는데, 굉장히 어렵다, 그러면 거기서 덮어버립니다. 그리고 굉장히 안 좋은 느낌을 받죠. ‘독서는 해로워’(웃음) 그런데 내가 ‘쓰는 주체’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어려운 책을 볼 때 감동을 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책을 쓰느라고 이 사람은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하면서요. 푸코의 『말과 사물』 같은 책을 보면 푸코에 대한 존경심과 적개심이 동시에 들죠. 그러나 ‘끝까지 읽겠다’ 이런 마음, 믿음이 생깁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독서의 근육이 아주 커지는 겁니다. 예를 들면 등산하고 같아요. 남산을 맨날 돌다가 도봉산을 갔다고 하죠. 도봉산 자운봉을 가는 그 지점이 굉장히 힘듭니다. 그건 즐거움이 아니죠. 힘들죠. 그런데 믿습니다. 여길 넘어가면 내 안에 능력이 생긴다. 그리고 자유가 생긴다고요. 자유는 능력에서 생기는 거니까요. 거길 가봐야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글을 써야 니체, 스피노자, 푸코, 불경, 주역 이런 사유의 길들을 나아가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쓰질 않으면 어떻게 되죠? 맨날 ‘어려워’ 타령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렵지 않은 책만 읽게 되는 거고요. 내 고정관념과 통념을 계속 강화하면서요. 그게 아니라면 ‘이런 건 해서 뭐해’가 되겠죠. 


글쓰기는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다 걸려 있어요. 교육문제, 청년문제 등등. 교육은 왜 스스로 언어를 창조하는 능력을 키워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 방향을 잡으면 대학교육기간 내내 작문을 해야 합니다. 배우는 전공이 뭐든, 문과든, 이과든, 의대든, 공대든 상관없이 그 공부가 자기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인식하는 훈련을 하는 거죠. 이게 사실 지성의 핵심입니다. 이게 든든해야 자기의 전공지식을 가지고 사회에 나와서 어떤 직업을 갖든 당당하고 떳떳하게 ‘선택’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거죠. 이게 훈련되지 않으니까 방황을 하게 되는 겁니다. 중년이 되어도 마찬가지죠. 인생이 헛헛하고, 더더욱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 거죠. 제가 활동하는 ‘감이당’에 중년들 많이 옵니다. 그 분들 굉장히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이에요. 그런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있고, 삶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사업에 성공하는 일이 보통일이 아님에도요. 청년들을 막 이끌고 선도해야 하는데도 고민이 청년들과 똑같습니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책을 읽어야죠. 책을 읽는데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쓰는 존재’가 되어서 읽어야 합니다. 인류 최고의 지성에 접속하는 겁니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디까지 독서를 했을까요. 그냥 적당히 대학원에서 하던 그 수준에서 더 안 나갔을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써야 되기 때문에, 생산을 해야되니까, 계속 내 삶에 응용을 해야되니까 『동의보감』 같은 책까지 읽게 된 거에요. 그리고 지금은 『주역』과 불경을 읽고요. 그런 책들을 보면 세상에 어떻게 2,600년 전에 이런 책이 나왔을까 믿기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인류의 지성이 이미 몇 천 년 전에 이미 거기에 도달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얄팍하고 어떻게 보면 굉장히 사춘기스러운 정서를 반복해야 하는가? 이미 그 대양이 펼쳐져 있는데 말이에요. 결국 쓰는 존재가 되어서 거기에 접속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막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 스위스를 찾아가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열하일기』를 예로 들어도 그렇습니다. 저는 인생을 『열하일기』로 역전했는데, 연암에 대해 써야 해서 읽은 거죠. 그때는 지금처럼 대중적인 번역도 없고, 전문가들의 번역본이라 정말 지금 쓰는 한국어로 쓰여 있질 않았습니다. 그런 책이었음에도 거기에 빠져버렸죠. 읽다보니까 너무 심오하고 재미있었던 거에요. 『임꺽정』도 그렇습니다. 쓰는 사람이 아니면 제가 그걸 세 번이나 읽었을까 생각을 합니다. 써야 해서 읽었더니 거기서 헤엄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거죠. 이게 바로 ‘쓰기’가 ‘읽기’의 도약이라는 겁니다. 쓰지 않으면 읽기는 절대 늘지 않아요. 



4. 2부 실전편에서는 선생님께서 활동하고 계신 <감이당>에서 글쓰기와 관련된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엿볼 수 있었는데요. 공동체에서 어떻게 글쓰기와 관련된 활동들이 이루어져 왔고,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 부탁드립니다.

 

지금부터 한 8년쯤 전에 감이당에서 내건 모토 중에 ‘글쓰기를 수련하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글쓰기 수련’을 표방하면서 (공동체가) 시작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감이당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에) ‘대중지성’에서 수련하는 과목들을 소개하자면, ‘몸과 우주’를 다루는 의역학, 그리고 각종 텍스트들을 낭송하는 과목, 그리고 글쓰기, 이렇게 세 과목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저 세 과목을 공부하는 겁니다. 이 세 과목을 다루는 ‘대중지성’ 프로그램을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학기 체제로 운영하죠.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대중지성’ 프로그램이 엄청 힘들다고 소문이 났더라고요. 일주일에 하루 하는 건데, 왜 그럴까 싶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수업이 힘든 게 아니라, 글 쓰는 걸 힘들다고 느끼는 거였습니다. 그것도 매번 발표는 하는 게 아니라, 8주 과정을 하고 에세이 발표를 한 번 하는 거예요. 한 계절에 하나 쓰는 건데 그렇게 어렵나? 그거 쓸 때 보면 거의 뭐 전쟁터 같아요. 그게 도대체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글쓰기가 어렵다기보다는 몸의 리듬을 그런 식으로 써본 적이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새로운 운동을 배울 때, 처음에는 다 어렵죠. 안 쓰던 근육을 써야 하니까. 그런데 그게 기본이 딱 잡히고 나면 그 다음엔 자연스러워요. 그거랑 같은 겁니다. 


그렇게 아우성치며 힘들어했지만, 그걸 계속 유지했습니다. 지금은 좀 더 다양하고, 좀 더 힘들어졌어요. 가령 밤을 세워가며 발표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사람들 표정이 너무너무 밝았죠. 무슨 상을 주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뒤풀이가 있는 것도 아닌데요. 아무런 보상이 없어요. 그런데 다들 너무 뿌듯한 거죠. 이 뿌듯함의 이유가 뭘까요? 이것의 핵심은 내가 내 언어로 내 인생의 지도 하나를 그렸다, 바로 이거예요. 이게 주는 충만감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중지성’ 프로그램이 요일별로 있고, 그걸 1년 동안 진행하는 건데, 그러다 보니까 이런 장기 프로그램에 접속을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 번 놓치면 또 일 년을 기다렸다가 참여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아주 짧게 단기적으로 여러 가지 글쓰기 강의를 열었죠. 그런데 거기서 또 리뷰, 에세이, 여행기 등을 쓰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거기서 또 알았죠. 글쓰기에 대한 욕구가 대단하다는 걸요. 역시 사람은 남의 말 듣는 것보다 자기가 생산하는 걸 좋아한다는 걸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게 본성인 겁니다. 남이 천 걸음 걷는 거 구경하는 것보다 내가 걷는 한 걸음이 중요한 거죠. 이게 바로 존재의 명령입니다. 


글을 쓰면, 사람들에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게 된 건, 공동체가 있어서이기도 하고, 또 한가지는 2008년 무렵부터 대학 바깥의 인문학 광장이 크게 열렸기 때문이에요. 환경적인 영향도 크죠. 자본의 잠식이 대규모로 변했고, 안정적인 일자리는 점점 사라지고요. 일이 없고 정처 없는 상태가 확대된 거죠. 이게 꼭 나쁜 걸까요? 역설적으로 그렇게 되면서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어요. 거기에 곳곳에 도서관들이 들어섰고요. 


2003년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내고 강의를 다닐 때만 해도, 그 도서관들이 모두 공사 중이었습니다. 그 도서관들이 모두 지어진 거죠. 그런데 이 도서관들이 정말 근사한 곳에 생겼습니다. 시골에 디지털 도서관이 생기기도 하고, 도시에는 꼭 숲이나 공원 있는 공간에  들어섰고요. 그런 공간이 열린 겁니다. 이 말은 무언가 하면 ‘평생학습’이 가능한 공간이 무료로 열린 겁니다. 도서관뿐이 아니에요. 구청이나 지자체에서도 인문학 공부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20여 년 동안 강의를 하러 다녀보니 그렇습니다. 그럼 그렇게 열린 공간에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럼 거기에 뭐가 있어야 할까요? 학습 프로그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강사가 있어야 하죠. 2008년부터 제가 점점 바빠지기 시작했어요. 그뿐이 아닙니다. 일반 사기업에서도 강연요청이 많이 옵니다. 교사 연수, 공무원 연수 같은 곳에서도 요청이 오고요. 이 많은 강의들을 누가 담당해야 할까요? 실제 강의를 주최하는 곳에서는 ‘이제 부를 사람 다 불러서 누구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앞으로 이 부분에서 많은 강사풀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감이당에서 하는 공부가 그렇습니다. ‘글을 써라, 그리고 강의를 해라’라는 거죠. 그래서 글을 쓰고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강의를 할 기회를 주고요. 일종의 자기훈련의 기회를 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각자가 자기 지역이든, 또는 자기 세대든 자기가 활동하고 싶은 공간에서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만들기를 바라는 것이고요. 그게 바로 감이당의 비전입니다.



5. 2부 실전편에서는 네 가지 장르의 글쓰기(칼럼, 리뷰, 에세이, 여행기)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해주고 있는데요. 네 가지 글쓰기 각각의 핵심적인 특징이 있다면 한 번 더 짚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장르를 관통하는 글쓰기의 대원칙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실전편’은 감이당에서 했던 제 강의를 녹취한 게 기반이 되었습니다. 강의를 8주, 10주 단위로 했고요. 강의는 조별로 진행되었는데, 튜터들이 각 조들을 관리하는 식이죠. 이렇게 가면 이탈자가 거의 없습니다. 함께 산을 오르면 서로 격려해주면서 끝까지 함께 오르는 것과 같은 원리인 겁니다. 그래서 감이당은 조별활동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칼럼쓰기는 무엇보다 한 페이지 안에 사회적 이슈와 결합된 생각의 정수를 담아내는 겁니다. 이건 훈련이 없으면 안 되는 거죠. 그냥 사회를 논평하는 식으로 써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 현상이 어떻게 내 몸을 통과하는지, 그게 내 일상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나를 지배하거나 이끄는지, 이런 것들을 사유해야 하는 겁니다. 즉, 문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핵심인 거죠.


리뷰, 서평은, 세상에 서평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이걸 감상적인 코멘트를 다는 식으로 하면 책과의 결합이 대단히 느슨해집니다. 리뷰는 책을 선정할 때부터의 집중력, 그다음은 책을 읽어 나가는 집중력이 중요하죠. 최소한 세 번 이상은 읽어야 합니다. 첫번째 읽어서 책을 알았다는 건 대개의 경우 오해입니다. 아무리 쉬운 책도, 세 번 이상은 읽어야 합니다. 무조건 세 번 이상 읽고, 리뷰를 두 페이지 써야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내 스토리가 있어야 하죠. 책을 읽고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준다고 하면, 스토리라인을 짜야 하는 거죠. 이걸 훈련하는 겁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면 책을 베고 자는 거죠. 사실은 이것도 진짜로 케미를 일으킵니다. 안 믿을 것 같지만 진짭니다.(웃음) 여하튼 대충대충 해서는 안 되죠. 이건 무엇보다 ‘관계’를 맺는 연습이거든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대충대충 하면 나중에 부끄러운 일이 산더미처럼 쌓이잖아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리뷰쓰기는 책과 관계를 맺는 방법, 타자와 관계 맺는 방법을 훈련하는 거죠. 


그다음에 에세이는 철학이에요. 에세이 자체가 철학이라는 뜻이거든요. 철학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철학을 하지 않고 어떻게 살죠? 사람이. 정기신(精氣神) 중에 신이 바로 철학의 영역인데요. 삶의 방향, ‘내가 이렇게 살겠어’라는 걸 세우는 거죠. 이건 반드시 있어야 하잖아요. 자기 삶의 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존재론,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식, 윤리의 방향까지. 에세이는 그걸 쓰는 과정입니다. 


여행기는, 요즘 여행을 많이들 다니죠. 여행을 다녀오면 온갖 의미들이 쏟아져야 하죠. 그런 요즘은 사진이 쏟아지고 있죠. 그리고 폴더가 늘어나고요. 그리곤 곧 고독 속에 빠져들죠. 그러지 말고 사진과 함께 이야기가 생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행기 수업은 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를 보면서 이야기를 어떻게 생성시키는가, 그걸 배워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여행엘 가면 어떻습니까? ‘사건’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미는 어디 있죠? 바로 ‘사건’ 속에 있는 겁니다. 각자 자기의 여행기를 쓰는데, 기본이 되는 텍스트를 『열하일기』를 바탕으로 했어요, 거기에는 사건과 이야기가 범람을 하니까, 그걸 참조하는 글쓰기였고요.




이렇게 완전히 다른 글쓰기의 장르 속에서도 원리는 딱 한가집니다. ‘차서를 지키고 차이를 생성하라.’ 모든 글쓰기를 관통하는 대원칙이죠. ‘차서’란 시간의 차이와 공간의 질서 두 가지를 합친 말입니다. 시공의 흐름이죠. 모든 일이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스텝을 밟는다는 겁니다. 연애도 그렇죠. 봄바람처럼 훅 들어왔다가 가을바람처럼 훅 꺼지고요. 그리고 길고 긴 겨울이 옵니다. 씨앗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이죠. 사업도 마찬가지고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밟아야 사람에게 잉여가 안 남습니다. 쓰다 말면 찜찜하고 뒷골이 당기고 그렇죠. 글쓰기의 힘도 뭐냐 하면 ‘차서’를 부여하는 거예요. 기승전결이 있는 거죠. 봄은 기, 일어나고, 여름은 승, 펼치고, 가을은 전, 전환이 일어나고, 전복, 결은 마무리인데….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 다른 길로 이어져야 돼요. 이게 네버엔딩이에요. 왜냐하면 시공은 멈추지 않으니까. 이걸 염두에 두고 글을 시작 하면 글쓰기도 잘될뿐더러 그다음에 내가 이걸 삶에 응용할 수가 있죠. 기승전결이 딱 된 거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잉여가 별로 없어요. 이게 핵심이에요. 칼럼이든 리뷰든 여행기든 차서가 잡혀 있어야 해요. 이거를 자유자재로 운용을 해서 앞부분에 결론을 먼저 제시하고 그 다음에 뭐 중간에 하나씩 펼치고 이런 식으로 갈 수도 있는데, 이건 기본을 익힌 다음에 운용을 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인생도 겨울에서 시작할 수가 있잖아요. 아니면 한여름에 불타는 화염 속에서 시작되는 인생도 있으니까. 그러나 이런 스텝을 밟아야 하죠, 다시. 결국은. 그게 한 가지 핵심이고.


그러면 이건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익혀야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개별 개별의 차이가 있어야 하잖아요. 차서를 잡고, 그다음은, 차이를 생성해야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문장 안에 자기 고유의 감각, 정서, 윤리, 이게 들어가 있어야 돼요. 우리가 교과서나 교장선생님 훈화를 왜 따분해할까요? 차이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 글, 그런 말은 들으면 바로 지루함에 빠져요. 


그런데 우리가 매년 봄을 맞지만 한 번도 봄이 동일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봄이 올 때 지루하다고 하지 않아요. 아~ 또 봄이 왔구나, 하며 반기지.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면 또 처음 겪는 것처럼 느낍니다. 왜냐하면 낙엽은 하나도 동일한 게 없어요. 봄에 피는 들풀이나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 그 어떤 것도 동일한 순간조차 없다는 거예요. 그게 주는 새로움,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 언어도 마찬가지예요. 글도 절대 동일한 문장을 쓸 수 없어요. 보고 베끼지 않는 한, 나도 내가 쓴 문장을 동일하게 구사하지 못해요. 그 순간에만 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하고 같을 수가 있겠어요. 우리가 속담을 인용한다거나, 많이 떠도는 그런 말, 상투어, 클리셰라고 하는 그런 식으로 쓰지 않는 한 동일한 문장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영혼이 통해도 동일한 문장을 쓸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 차이, 이 차이를 생성하려면 자기 개성이 살아 있어야 해요. 


근데 우리가 개성을 스스로 지우고 있어요. 특히 엄청난 상품의 욕망에 끌려가니까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스토리의 이야기를 하니까 지루해서 점점 이야기를 안 하게 되거든요. 영화를 보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면, 그게 더 재미있어요. 영화를 보는 거보다. 그래서 이게 살아 있으려면 내가 그런 상품이나 대세에 휩쓸리지 않아야 해요. 상품이나 대세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몰개성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야 군중이 휩쓸려 가서 막 물건을 사게 되어 있어요. 몰개성이 핵심이거든요. 거기에 휩쓸리지 않아야 자기 개성이 오롯이 살아요. 그런데 이거는 다른 사람이 알 수도 없고 선생이 코치해 줄 수도 없어요. 너의 개성이 이거야, 이렇게 해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건 정말 오롯이 자기의 몫인 거죠. 


그런 점에서 글쓰기의 핵심은 어떤 종류의 글을 쓰든 ‘차서를 부여하고 차이를 생성한다’예요. 차서를 부여하는 거는 어떻게 보면, 공통감각, 보편적 정서의 자각이면서 그 정서에 접속하는 건데,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과 소통하는 길을 여는 거예요. 그런데, 차이를 생성할 때는 나의 고유성, 독특한 임팩트가 부여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새로운 언어, 새로운 길, 이런 거를 하나 더 발견했구나, 이런 기쁨을 주게 돼요.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차서를 부여하고 차이를 생성할 것, 이것만 잘 외우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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