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반생명적 관계 속에서 살다. - 3)
나는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게 너무 어렵다. 낯선 사람 앞에만 서면 내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도통 모르기 때문이다. 이름과 나이, 직업과 취미 등 의례적인 질문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런 상투적인 대화가 끝나고 정적이 흐를 때면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버리고만 싶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나는 최대한 편안한 사람들과만 지내려고 노력했다. 모르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일들은 요리조리 피해 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관계에서 오는 갈등 상황에 너무 취약했다. 친구가 나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나 미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땐 쉽게 상처받았고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깜깜하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친구와는 소리소문없이 관계를 끊었고, 그렇지 않은 친구와만 연락을 주고받곤 했다.
지금 청년들도 비슷하다. 주변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인간관계의 문제다. ‘친구가 나를 필요할 때만 찾는다.’, ‘상사가 나를 괴롭힌다.’, ‘교수님께 찍힌 것 같다.’ 등등. 관계에서 불편한 상황이 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관계 맺는 능력이 너무 부족한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청년들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반복해 왔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관계에 무지한 것일까?
배움을 사고파는 교실
가족이라는 안전지대를 떠나 의무적으로 정해진 나이가 되면 누구나 학교에 간다. 대부분은 별생각 없이, 또 일부는 억지로 다닌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는 아무런 능동성도 발휘되지 않는다. 그러니 학교생활이 지루하고 따분하기만 하다.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빨리 벗어나고픈 마음뿐이다. 그래서 항상 시선은 미래로 향해 있다. 어른이 되면, 대학에만 가면, 직장만 가지면 이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해방되겠지? 학생에게 학교란 자신의 아름다운 앞날을 위해 잠시 거쳐 가는 과도기에 불과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렇게 수동적인 상태로 학교생활을 하고, 그럴수록 학교에 바라는 게 많아진다. 자신이 인내하고, 버티고, 억누르면서 보내고 있는 ‘시간에 대한 보상’을 원하는 것이다.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학교가 다 충족시켜주기를 원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마치 학교를 하나의 서비스기관이나 돌봄센터처럼 여기는 것이다. 당연히 선생님은 자신들을 ‘보살펴주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학교 또한 학생과 학부모를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 되어가고 있다. 시설 관리, 위생 관리, 건강 관리 등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무진장 애쓴다. 특히, 대학 입시와 관련해서 그렇다. 입시에 방해되는 비교과 과목은 점점 줄이고, 주요 과목 위주로 수업 시간이 편성된다. 동아리 활동은 이름뿐이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 시간에 대부분 잠을 자거나 시험공부를 한다. 대입을 위한 것이 아닌 다른 활동들은 모두 배제되고 있다.
그 흐름에 맞춰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동기부여 한다. “이 과목은 대입에 필수야 필수!” 자신의 과목이 입시 경쟁에 얼마나 효율적이고, 효과적인지 광고해야 한다. 선생님은 학생을 상대로 자신의 과목을 포장하고 판매하게 된다. 얼마나 상품을 잘 홍보하는지에 따라 수업 시간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학생을 고객으로 모시며, 배움을 흥정하고 있다.
그런데 교사가 판매하는 물건이 학생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그 교사의 수업 시간은 난장판이 된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들어오지도 않고, 딴짓거리를 하며, 심하면 성희롱과 욕설도 퍼붓는다. 그것을 따로 제재할 방법이 없다. 시장에서는 고객이 왕이듯 학교에서는 학생이 왕이기 때문이다. 훈계를 한다고 해도 학생은 ‘인권’을 내세우며 뻔뻔스럽게 군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학부모들의 민원폭탄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선생님들은 학생을 내버려 두게 된다. 학생들의 행동에 불만과 분노를 느끼지만, 그것을 바깥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그럴수록 선생님은 학생을 적대시하면서 원한 감정만 키울 뿐이다.
그렇게 선생님과 학생은 점점 분리된다. 선생님에게 학생은 제자가 아닌 ‘말썽만 안 피웠으면’하는 존재이고, 학생에게 선생님은 스승이 아닌 ‘시험출제자’일 뿐. 서로 간에 이해나 공감은 전혀 없다. 서로 만만하게 보이지 않고, 책 잡히지 않기 위한 곁눈질과 긴장감만 있을 따름이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자신을 무시하진 않을까 자의식에 시달리고, 학생들은 선생님으로부터 자신의 인정 욕망을 채우려 애쓴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망상과 잡념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과도해지면 비(脾)가 상한다. 비는 입으로 들어온 음식물을 받아들이는데, 심각한 생각에 빠질 때 입맛이 없어지는 건 바로 비장의 기능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脾)가 튼튼하지 못하면 쉽게 피로해진다. 비장은 음식물의 엑기스를 모아 폐로 올려보내는 일을 하는데, 폐(肺)는 비장으로부터 받은 영양분을 온몸으로 산포시킨다. 몸 구석구석으로 에너지들을 공급해주는 것이다. 이 작용 덕분에 우리는 전신을 자유롭게 움직인다. 하지만 비장의 기운이 부족해서 폐로 에너지원을 적절히 공급하지 못하면? 비에 습기가 쌓이게 되고 기가 팔다리의 말단까지 흐르지 못한다. 그러니 온몸이 무거워지고, 권태로워지는 것이다.
몸이 피곤하면 심리적인 회로도 꼬인다. 상대방의 눈빛과 시선, 말투와 표정, 제스처에 온갖 신경이 곤두서게 되며, 조금이라도 불편한 느낌을 받으면 바로 공상에 빠져든다. ‘혹시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아니면 나를 무시하나?’ 이런 오해와 과대망상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며, 그것이 선생님과 학생 사이를 분열시키고 있다.
인생은 성적순?
학교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성적이다. 학교는 시험점수로 1등부터 꼴등까지 차례대로 줄을 세운다. 내가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시선이 확확 바뀐다. 상위권에 속하면 귀족, 하위권에 속하면 노예 대접을 받는다. 인간성이 어떻든 그런 건 다 상관없다. 오직 성적뿐! 그럴수록 학생들은 시험에 매달린다. 성적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기고, 내면화하는 것이다.
시험 성적이 존재 그 자체가 된 학생들은 등수 변화에 예민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순위에 따라 자존감이 급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을 앞지를까봐 항상 불안해한다. 주변 친구들은 모두 ‘석차’로만 보이고, 비슷한 등급의 친구들은 경쟁상대로만 인식된다. 그럼 등급이 다른 친구를 보면? 질투심에 불타오르거나 혹은 경멸감을 드러내거나 둘 중 하나다. 이렇게 누군가를 시기하고 무시하는 감정이 생기는 이유는 자기만 돋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자신만 유능해지고 싶은 마음은 다른 사람을 무능하게 만드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예를 들면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시험 정보는 친절하게 알려주지만 정작 중요한 정보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 하기도 하고,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다 해놓고 수업 분위기를 망쳐버리는 짓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상대방을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내 욕심밖에 없다. 옆에 있는 친구가 어떤 곤란을 겪든 상관할 바 아니다. 관계가 완전히 단절돼 버린 것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상위권의 경우, 자신들의 성적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과 비슷한 무리와만 지내려 한다. 학교 차원에서도 학생들을 성적별로 분류해 놓는다. 수준별 학습, 특별자습실, 특별반이 그것이다. 학생들은 성적에 따라 집단이 나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상위 클래스에 속할수록 특권의식과 우월감에 취한다.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되는 친구를 쉽게 무시하는 것이다. 공부 외에 다른 재주가 있다고 해도 그런 점은 안중에도 없다. 이런 구조 속에서 학생들은 친구가 인생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배우지 못한다.
그리고 학생은 공부한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배려와 관심의 대상이 된다. 대부분 학생들의 동선을 보자. 학교-학원-집으로 단순하다.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학교에서는 학생을 미성숙하고, 여린 존재로 여기며 보호하고 감싼다. 학원에서는 학생에게 대입과 시험에 관련된 온갖 정보를 제공해준다. 집에서는 학생이 책상에 떡하니 앉아 있으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이렇게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학생들은 자신을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존재들은 전부 자신을 ‘보조하는 역할’일 뿐이다. 그러니 옆에 있는 친구는 삶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오직 ‘나’뿐! 나만 바라보니 친구에게는 절로 무관심해질 수밖에.
거기다 교실에서 학생들은 책상에 딱 달라붙어서 움직이길 싫어한다. 앉아만 있어도 많은 것들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더우면 에어컨을 틀면 되고, 추우면 히터를 켜면 된다. 심심하면 스마트폰을 보고, 피곤하면 엎드려 잘 수 있다. 화장실이나 매점에 가는 것 말고는 책상에서 몸을 분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학생들의 몸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몸이 편해야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동의보감』에서는 ‘한가한 사람, 배불리 먹고 앉아 있는 사람’이 오히려 쉽게 피곤해진다고 한다. 왜일까. 그것은 물이 흐르지 않으면 고여서 썩듯이 몸도 움직여주지 않으면 기운이 막히기 때문이다. 즉, 몸은 활동하지 않으면 에너지가 제대로 순환되지 않는다. 피가 손끝, 발끝까지 원활하게 돌지 못해 무기력해진다. 그런데 문제는 막힌 생명 에너지가 사용되지 않은 채 밤까지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는 이상한 상태가 된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이다. 들끓고 있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새벽까지 딴짓한다. 웹툰, 유튜브, 인스타그램, 야동! 기운을 방출하기 위해 자극적인 것을 찾고 또 쉽게 중독된다. 강한 느낌을 원할수록 일상은 지루해진다. 그러니 학교생활이 밋밋해질 수밖에 없다. 주변 친구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너무 무료하고, 따분한 일이 된다. 그래서 다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지낸다.
비장의 무기, 소화력
10대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냈지만, 학생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는 것만 학습했다. 학교는 ‘매일 마주치는 선생님과 어떤 식으로 만나야 할지, 또 친구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오로지 꿈과 목표, 대학과 직장, 돈과 경쟁이 인생의 중요한 가치라며 늘어놓을 뿐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개인적인 성취와 성공만이 삶의 전부라 여기며 살아간다.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 ‘관계’라는 영역이 생략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청년들은 친구와 교감하고, 공감을 나누는 일이 드물다. 소통 불가능한 신체가 돼 버린 것이다.
불통의 신체에서 벗어나려면 비(脾)의 ‘소화력’이 필요하다. 비위가 좋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이라도 받아들이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비장은 외부에서 들어온 온갖 음식물들을 분해, 흡수하여 영양분으로 만들고 생명력을 유지한다.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비위가 좋으면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법이 없다. 가지각색의 사람들과 다양하게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위의 ‘소화력’은 ‘친화력’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요즘 청년들은 뭐든지 ‘편식’을 한다. 그러니 비위가 부실할 수밖에.
10대는 타자들과 친화력을 키우는 일이 몹시 중요하다. 비위가 모든 이질적인 걸 섞어서 우리 몸을 살리는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과 좌충우돌하는 경험이 우리 삶을 생기있게 만든다. 관계 속에서 부딪히고, 질문하고, 고민하고,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청춘의 활발한 에너지가 발휘되는 것이다. 그럴 때 다른 사람과 접속하고 공감할 수 있는 우정의 능력이 향상된다. 편식하지 않는 비장(脾臟)이야말로 ‘비장(祕藏)의 무기’다!
Moon 빈 (청스_의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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