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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발굴, <한서>라는 역사책

역사, 차이나는 파동의 길

by 북드라망 2019. 7. 24.

역사, 차이나는 파동의 길 

 


역사, ‘주역’이라는 렌즈를 통과한 기억

 

우리는 보통 역사를 업적 기록으로 생각한다. 역사를 업적 중심으로 기억하는 것은 업적을 남긴 자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 나만 해도 잘한 일만 기억한다면 분명 그것은 내가 고정화하고 싶은 것에 대한 의지가 개입된 것이다. 성과를 기준으로 나와 남을 평가하고 싶은 의지. 이렇게 우월감으로 사는 자는 과거를 자기식으로 편집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운 역사도 다르지 않다. 업적 중심의 역사는 분명 권력자의 시선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민초, 여성, 자연 등의 소수자의 목소리가 실려 있을 리 만무하다. 부분적으로 있을 수는 있지만 권력자들의 시선에 맞게 편집되어 있다. 역사는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세계를 해석하고 유지하려는 목적을 통해 선별되고 지워진다. 

 



하지만 우리가 만나야 할 한서뿐 아니라 사기를 포함한 동양에서의 역사는 왕을 중심으로 쓰였다 해도 권력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동양에서 역사란 무엇일까. 동양에서 역사는 선과 악에 대한 포폄이었다. 이런 인식이 생긴 것은 공자님 덕분이다. 공자님은 역사서 춘추를 통해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가 쓰여야 함을 강조하셨다. 공자님의 역사의식의 원류는 역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름으로는 주역이다. 주역은 동아시아의 천지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현상의 원리를 설명한 경전이다. 왜 공자는 주역에 근거하여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 사마천이 공자의 춘추를 이어 사기를 쓰겠다고 의지를 다진 부분을 보고 가기로 하자. 

 

선친께서 주공이 죽은 지 오백 년에 공자가 출생하였고, 공자에서 지금까지 5백 년이니 능력자가 공자 이전의 정통을 계승하여 『역전』의 뜻을 밝히고 『춘추』의 뜻을 서술하여 시, 서, 예, 악의 근본을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었다. 그 뜻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마 이런 뜻이었으니 내가 어찌 미룰 수 있겠는가.


사마천은 『춘추』가 『역전』의 뜻을 밝힌 거라 확신하며 자신도 그 뜻을 잇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그렇게 탄생한 사기를 읽고 반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사마천은 사물의 이치를 잘 서술하였으며 부박(浮薄)하지 않았고 질박하지만 비속하지 않으면서 문질이 함께 빛나니 실로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관이었다.” 

- 반표열전, p429


반표는 사마천을 사물의 이치를 잘 서술한 사관으로 극찬하고 있다. 사물의 이치라니 이것은 주역이 추구하는 세계가 아닌가. 계속 말하지만 왜 역사 서술에 역이 계속 호출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공자님이 쓰셨다는 주역 주석서인 계사전을 보면 그 뜻을 알 수가 있다. 예컨대 주역의 렌즈를 통해 인류의 문명사를 조망한 부분이 있다. 그 부분만 보아도 좁은 시선이 확 트이면서 문명 발전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남을 경험하게 된다. 

 

그물을 만들고 사냥을 하고 고기를 잡고 농사를 짓고 교역을 하고 옷을 입고 배를 타고 강을 왕래하고 소와 말을 부리고 집을 짓고 무덤을 만드는 모든 행위가 문명 발전의 결과 같지만 자연 변화인 역의 렌즈를 통과하면 인간은 점점 천지와 불통하는 신체가 되는 과정일 뿐이다. 예컨대 소와 말만 해도 동물의 삶은 존중하지 않고 인간의 편리를 위해 이용한다. 풍요로워졌지만 더 많이 가지지 못해 혈안이 되고 소유한 것을 뺏길까 봐 인간끼리도 의심하기 시작한다. 최초 인류는 피와 털까지 모두 먹었다고 한다. 긴 맹장이 그 흔적이다. 절구가 만들어지면서 벼를 가공하기 시작했고 입맛은 더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감각적 쾌락 추구를 멈추지 않는다. 결국 경제적 풍요는 도덕의 타락을 예고하고 교만과 사치가 판을 치며 전쟁을 부른다. 이것이 주역 계사전, 공자님이 주역을 통해 들려준 인류 문명사의 실체인 것이다. 

 

주역 렌즈를 통과하자 인간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병들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인식과 감각의 한계가 문명의 발달이 영원할 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물질의 풍요 속에서 천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임을 망각하고 있다. 도교에서는 인간을 나충(裸蟲)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 여기며 우쭐하지만 만물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가져온 것도 없는 주제에 세상을 다 파먹고 먹튀 하는 벌레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이렇게 불렀을까. 먹튀로 살지 않으려면 가깝게는 사람의 신체나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점차 그 범위를 넓혀 천지 만물을 관찰한 후 그것에 부합되게 살아야 한다. 그렇다. 주역의 렌즈를 통과하니 나란 실체는 사라지고 천지와 연결된 관계만이 남는다. 그 관계 속에서 탐욕으로 찌든 인간의 정체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흥과 망의 파동을 잘 타는 법

 

공자님이 왜 주역 렌즈를 장착해서 춘추를 지었는가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황제만 해도 권력이 있는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산물일 뿐이다. 중국 역사서에는 사람만 등장하지 않는다. 천지 만물과 관계 맺음 속에서 인간이 천인감응이란 이름으로 그려진다. 그렇다. 동양의 역사는 만물 공존의 시선으로 그 시대를 기억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고정화하는 시선을 벗어나는 일이다. 자연은 변화한다는 그 원리에 충실하게 매 순간 변하는 삶 그 자체에 주목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예컨대 흥과 망만 해도 그렇다. 역의 시선으로 보면 흥하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 흥을 취하고 망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흥이라는 결과에 집착하기보다는 흥과 망의 파동을 인정하면서 그 파동을 잘 타는 법을 고민하자는 것이다. 

 

자연은 낮과 밤, 봄과 가을, 더움과 추움 등 서로 다른 이질적인 기운을 향해 가는 파동의 세계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계속 밀려오는 파동을 다르게 타려면 그 변화에 몸을 맡겨야 한다. 예컨대 성공한 것, 잘한 것만을 기억하거나 성공을 향해 달려가다가는 파동을 타기는커녕 압사당하기 딱 좋다. 어떤 대단한 것도 영원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어떤 어려움 또한 계속될 수 없다는 것. 이런 변화무쌍함 속에서 중심을 잡고 가기 위해 과거가 필요하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도 고작 14년을 넘지 못하는 구나. 황제가 장생불사를 꿈꾸어도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구나. 부와 명예가 생길수록 집착과 소유욕도 같이 커지는구나.’ 등등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 것일까. 계속되는 파동을 타려면 어떤 대단한 것도 비워야 한다. 천지자연의 이치를 통해 집단의 기억을 성찰하여 차이나는 파동의 길을 여는 것. 이것이 동아시아 역사가, 공자가 주역 렌즈를 이용하여 역사를 쓴 이유인 것이다. 앞서 말한 선과 악에 대한 포폄도 권선징악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악이 되고 차이를 만들어내면 선이 된다. 

 



공자가 추구한 요순시대란 천도의 실천 속에서 차이나는 파동을 타는 이상적인 시대였다. 공자의 시대도 폭력과 이기심, 사치가 판을 쳤기에 춘추를 써서 욕망을 멈추고 천지와 함께 리듬을 타는 길을 열고자 했던 것이다. 사기와 한서 또한 그 뜻을 이어받고 있다. 하지만 사기와 한서는 공자의 뜻을 이어받았지만 비슷한 듯 다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다른 만큼, 관점이 다른 만큼 칭찬하고 비판하는 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산다는 것은 많은 것을 경험하는 일이다.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모든 경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삶의 경험을 지도 삼아 지금을 살아내야 한다. 성공한 것, 잘한 것만을 기억해서는, 성공을 향해 달려가다가는 ‘지금 여기’를 절대로 살아낼 수가 없다. 지금 여기는 계속 다른 물결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기와 한서 또한 지금 여기라는 조건이 다르고 그 다른 조건을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의 삶을 살려면 지금 여기를 다르게 보아야 한다. 일본 학자 야스시는 두 역사서의 다른 시선을 다음과 같이 꿰뚫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신의 눈, 우주의 눈으로 쓰인 것이라면, 반고의 한서는 현재의 왕조에 근거한 지상의 눈, 한 왕조의 눈으로 쓰인 셈이다. 

- 『사기와 한서』, p127


사기는 ‘신의 눈, 우주의 눈’이고 한서는 ‘현재의 왕조에 근거한 지상의 눈’이라는 것. 사기는 장장 3천 년간 중국의 시공간을 주파한다. 그에 비해 한서는 한나라에 국한된 단대사 200년을 그리고 있다. 역사의 시공간만 해도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렇다고 이 시공간의 차이만으로 야스시가 우주와 지상의 눈을 구분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다른 조건 속에서 차이나는 파동을 만들려면 다른 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가 탐사할 텍스트는 분명 한서이다. 하지만 한서와 만나려면 사기를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야스시가 진단한 서로 다른 관점에 근거해서 한서의 차이나는 파동의 길을 탐사해 보고자 한다.   ​ 


글_박장금(감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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