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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이야기 ▽/발굴, <한서>라는 역사책

『한서』가 나오기까지, 반씨가문을 기억하라(2)

by 북드라망 2019. 6. 26.

『한서』가 나오기까지, 반씨가문을 기억하라(2)

 


천명을 살핀 부친 반표

 

『한서』가 기억하는 반표의 시대성은 특별하다. 서기 5년, 전한의 마지막 황제 평제가 독살로 죽고, 왕망이 세운 신나라는 약 15년만인 서기 23년에 멸망한다. 2년간의 혼란기가 지난 서기 25년 광무제 유수가 후한을 세운다. 반치의 아들이자 반고의 아버지인 반표는 서기3년, 이러한 극도의 혼란기에 태어나, 일생에 한 번도 경험하기 힘든 왕조의 교체기를 두 번이나 겪는다. 반표가 역사무대에 등장한 건 왕조의 두 번째 교체기. 즉 후한을 선포한 광무제가 전한의 옛 영토를 거의 다 수복하고, 최후의 경쟁자였던 농우지역의 외효·촉한의 공손술과 대립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천하대세는 성군이라 칭송받는 광무제에게 기울어진 상태로, 반표 역시 광무제의 시대가 열릴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시기에 피난을 떠난 반표의 이동경로다 . 반표는 광무제가 있는 낙양이 아닌, 외효가 다스리는 농우지역과 두융이 다스리는 하서지역 으로 피난을 간 것이다.

외효는 학식과 인품으로 명성이 높던 반표가 자신에게 의탁하러 오자, 궁금했던 정세에 대해 물었다. ‘합종연횡의 시대가 다시 올 것인가? 아니면 한 사람이 천하를 통일할 것인가?’ 이에 반표는 한나라가 망한 것은 외척의 권력남용과 후사의 문제였지, 백성을 힘들게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고 답한다. 그 증거로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죽었지만, 민심은 그를 위해 슬퍼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나라의 유씨를 그리워하며 한나라 왕실의 부흥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로 든다. 또한 반표는 합종연횡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며, 통일하는 한 사람이 나올 것이나 그것은 당신이 아니라고 일축한다. 

  

하지만 외효는 ‘우민(愚民)들이 유씨 성명에 친숙한 것뿐이지 한가(漢家) 부흥을 원한다는 것은 맞지 않고, 유방은 진(秦)이 놓쳐버린 사슴을 우연히 따라가 잡은 것일 뿐’이라며 반표의 말을 반박한다. 반표는 외효가 타인의 의견을 귀담아듣지 않고,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한 덕의 근원을 알지 못하며, 무엇보다 민심이 곧 천심임에도 백성을 우민이라 천시하는 그의 사람됨에 실망한다. 민심을 천시하는 자는 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반표는 외효가 천명을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문장을 한편 짓는다. 그것이 바로 <왕명론>이다. 이 왕명론은 훗날 아들 반고의 『한서』 서론의 주축이 되는데, 반표의 문제의식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상략) 고금의 득실을 살펴보고, 지난 일의 성패를 따져보면서 제왕의 운수와 고조의 5가지 이유를 깊이 생각하고,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욕망이나 법도에 어긋나는 징조를 버려야 한다. 굳이 자신의 권리라며 탐내고 순서를 뛰어넘어 함부로 행동하면서 밖으로 자신의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마음속으로는 천명을 모른다면 틀림없이 보가의 중심을 잃고 천기의 수명도 상실하여 다리가 잘리거나 도끼로 처형당할 것이다.


영웅이라면 정말 이를 알아서 이런 재앙의 훈계를 두려워하며 우뚝 서 멀리보고 깊이 깨우쳐야 한다. 왕릉과 진영처럼 분수를 받아들여야 하고, 한신과 영포처럼 분수에 넘는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하며, 축록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멀리해야 한다. 신기는 하늘이 내리는 것임을 알아 바랄 수 없는 것은 욕심을 내지 않아 진영과 왕릉 두 모친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면 그 복록이 자손에게 미칠 것이고 천록은 아마 끝이 없을 것이다. 

- 반고,『한서10권』,진기환역주, 명문당 2017,431쪽


반표는 천명이 외효에게 있지 않음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천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의 명령으로 천자, 즉 제왕이 될 수 있는 명이다. 반표는 한고조 유방을 예로 들어 천명을 부여받은 자의 특질에 대해 설명한다. “첫째 요임금의 후손이며, 둘째 외모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았고, 셋째 신무(神武)와 그에 따른 호응이 있었고, 넷째 관대 명철하고 인자하였으며, 다섯째 사람을 보고 잘 쓸 줄 알았다.” 반표가 판단하기에 외효는 이 5가지 특질 중 어디에도 해당되는 것이 없었다. 중요한 사실은 천명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지, 무력을 통해 억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표는 <왕명론>을 통해 한 번도 본적 없는 광무제를 지지하고 외효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외효에게 천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반표는 외효가 광무제에 대항하기보다 천명을 받은 광무제를 섬기길 바랐다. 그것만이 외효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는 길이고, 나아가 농우땅 백성들의 삶을 지켜주는 길이었다. 하지만 끝내 외효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반표는 떠났다. 

 

반표는 다시 피난길에 올라 두융이 다스리는 하서지역에 당도한다. 두융은 외효의 명을 따르는 자로, 하서지역의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장군이었다. 두융은 반표를 ‘스승의 도’로서 극진히 대접했는데, 『후한서』에는 당시 반표가 이런 두융을 위해 ‘방책을 계획하고 한(漢)을 섬기게 하면서 하서군의 병마를 총괄하여 외효를 막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 서술의 핵심은 두융이 광무제를 섬기는데 반표가 도움을 주었다는 것에 있다. 당시 두융은 외효를 따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광무제를 흠모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두융이 광무제를 따를 수 없었던 이유는 하서에서 낙양에 이르는 거리는 너무 멀고 그 사이를 외효가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융은 늘 이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때 반표가 등장했던 것이다. 반표는 두융의 의중을 알아차렸고, 두융 또한 그런 반표의 가르침을 귀담아 들었다. 그리하여 반표는 두융의 뜻을 상주문으로 작성해 광무제에게 보낸다. 훗날 광무제는 두융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상주문을 써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어본다. 광무제는 무장이 쓸 수 있는 문장의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때 두융은 상주문을 써준 사람이 반표라고 밝힌다. 두융이 광무제와의 인연을 맺게 된 배경에는 이렇듯 반표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던 것이다. 

  

이후 외효와 두융, 이 두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두 사람은 훗날 전장에서 만나는데, 두융은 외효 토벌에 큰 공을 세워 후한 개국공신에 이름을 올렸고. 외효는 전장에서 홧병으로 죽었다. 혼란기에 천명의 향방을 아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일이었다. 

 

 

반표의 역사책 저술

 

반표는 이런 두융과의 인연으로 광무제를 만나 벼슬을 받는다. 그런데 이 시기의 반표의 행보가 자못 흥미롭다. 반표는 공을 인정받아 광무제로부터 2~3개의 관직을 제수 받았는데, 그때마다 때로는 병으로, 때로는 개인사로 관직을 고사한다. 어떤 경우에는 조금 근무하다 임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관직을 내놓은 경우도 있었다. 반표는 왜 자주 관직을 거절하며 물러났던 것일까? 

  

반표에겐 관직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글쓰기였다. 반표의 글쓰기는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함이 아닌 오직 스스로 만들어낸 사명감과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대체 반표에게 글쓰기란 무엇이었을까? 글쓰기를 어떻게 생각하였기에 벼슬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긴 것일까? 후한의 문장가이자 반표의 벗이었던 왕충은 자신이 쓴 『논형』에 친구 반표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을 남겨두었다. 

 

문장을 쓰는 일은 사람의 행위를 기록하고, 사람의 명성을 전하기 위해서다. 착한 사람은 문장으로 기록되기를 원해서 착한 일에 더욱 힘쓸 것이다. 악인은 문장으로 기록되기를 싫어해 스스로 악한 행위를 절제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므로 문인은 붓으로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중략) 반표는 사마천의 사기를 계승해서 후전을 지었다. 향리 사람을 내용에 싣고, 악인에 대한 징벌로 삼았다. 사악한 사람이 법도를 능멸할지라도 문장으로 탄핵한다면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양웅은 돈으로 유혹해도 이끌리지 않았다. 반표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오직 이러한 문인의 붓이 가장 공정하다 할 수 있다. 

- 왕충,『논형』,성기옥 옮김, 동아일보사, 2016,748쪽


반표에게 글쓰기란 붓으로 선악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선악을 드러내는 글쓰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근본을 바로세우는 글쓰기로, 공자와 사마천이 했던 ‘역사 쓰기’였다. 공자는 『춘추』에서 선한 일은 높이 드러내고, 악한 일은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왕도의 이치를 밝혔으며, 사마천은 『사기』에서 역사가의 붓만이 인간의 행위를 심판할 수 있다는 문사의식을 드러냈다. 반표는 이러한 선배들에게서 자신의 비전을 발견하고 역사를 쓰기로 마음을 낸 것이다. 그렇다면 반표는 이 시대에 왜 ‘역사 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역사 쓰기’에는 시기가 있다.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춘추』의 획린(춘추의 마지막 기록)이래로 400년간 단절되었던 역사를 써야 할 때가, 한나라가 흥기하여 천하가 통일된’ 바로 지금이라며 힘주어 말했다. ‘역사 쓰기’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표는 『사기』의 이 장면에 감명을 받은 것 같다. 반표는 『사기』의 마지막 한무제 초기 이래로 100여년간 단절되었던 역사를 써야 할 때가, 제국을 통일해 근본을 세우고 있는 광무제의 시대! 바로 지금이라 생각했다. 사마담이 말한 바, ‘역사 쓰기’의 때가 반표에게도 열린 것이다. 반표는 전한시대에 대한 정리가, 이제 갓 안정된 한나라가 가야할 길에 사표가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여 반표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사기』의 뒷이야기, 즉 한무제 초기 이후 한나라를 이끌었던 사건과 인물들을 사마천의 기전체형식으로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름도 『사기후전』이다. 『사기』를 계승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낸 것이다. 다만 반표는 『사기』를 계승하면서도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상략) 사마천은 학술을 논하면서 황로를 숭상하고 오경을 홀대하였으며, 화식전에서는 인의를 경시하고 가난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유협을 말하면서 수절을 천시하고 세속 행위를 소중히 여겨 도덕을 무너뜨렸다는 평을 들은 것이 큰 결점이며, 결국에는 이 때문에 극형을 받았다. (후략) 

- 범엽,『후한서5권』,진기환역주, 명문당 2018,427쪽


반표는 사마천의 역사를 해석하는 시선, 문장력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진심은 인정했다. 하지만 사마천이 유교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반표가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지금 사람은 옛일을 알 수 있고, 후세에서는 이전 세대를 볼 수 있으니 성인의 이목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성인의 이목이었다. 유학을 공부한 반표에겐 다른 어떤 가치보다 공자의 도, 공자의 이목이 중요했다. 그래서 인의를 경시하고,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며, 수절을 천시한 사마천의 이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여 반표는 사마천의 기전체 글쓰기 형식에 유교의 핵심경전인 <오경>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인물의 선악시비를 드러내는 역사 서술을 구상한다. 이 기획 의도는 훗날 아들 반고의 ‘역사 쓰기’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렇게 완성한 내용이 『사기후전』 65편이지만, 아쉽게도 반표는 그것을 미완성으로 남겨둔 체 52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한서의 탄생, 쌍둥이 형제 반초의 활약

 

드디어 『한서』의 대부분을 저술한 반고의 등장이다. 반고는 어떻게 ‘역사 쓰기’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일까? 표면적인 이유는 ‘아버지가 이어 쓴 전사(前史)가 상세하지 못한 것을 보고 마음을 모아 연찬하여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항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어느 날 왕충이 친구 반표 집을 방문한다. 그때 왕충은 당시 13세인 반고를 처음 봤는데, 보자마자 무척 놀란다. 반고의 관상이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평소 왕충은 ‘사람의 명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며 그 명은 신체의 특징에서 드러나므로, 신체를 잘 관찰하면 명을 알 수 있다.’ 라고 생각해 골상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인물이었다. 왕충은 반고의 등을 두드리며 말햇다. ‘여보게 친구 반표, 이 아이는 틀림없이 한의 국사를 기록할 것이네.’ 왕충의 이 말에 반표는 얼마나 기뻤을까. 역사를 쓰는 일이 쉬운 일도 아니고, 무엇보다 문사에게 국사를 쓸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최고의 찬사 아닌가. 왕충의 이런 말에 어린 반고가 얼마나 자극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왕충의 이 예언은 실제로 현실이 된다. 반고는 『한서』를 쓸 운명이었던 것인가. 

  

26살이었던 반고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역사 쓰기’를 한지 약 5년. 어느 날 반고는 국사를 개작하는 사람으로 몰려 옥에 갇힌다. 왜 역사가가 옥에 갇힐까? 역사란 선악을 드러내는 일로 미화의 문장이 아니라 직언의 문장으로 서술된다. 당연히 왕에 대한 잘못도 직서(直書)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직서행위를 잘못 해석하면 현 왕조를 부정하고 왕을 비난하는 불온한 글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당연히 감옥에 갇힐 수 밖에 없다. 이 당시 반고처럼 역사 쓰기가 문제 되어 사형을 당한 일도 있었다. 개인이 역사를 쓴다는 건 당시에 이처럼 위험한 일이었다. 

  

예상대로 반고는 모진 고초를 겪는다. 그런데 반고는 천운으로 살아난다. 쌍둥이 동생 반초의 도움 때문이었다. 반초는 형 반고가 고문을 받으며 스스로를 변호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대로 두면 변변한 해명도 하지 못하고 처형될 것은 명약관화! 반초는 형을 변호하기 위해 상서를 올리고 황제를 만난다. 단숨에 상서를 올리고 황제를 만나는 추진력이라니. 반초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반초 역시 문장가 집안의 아들로서 어렸을 때부터 온갖 책과 전기를 두루 읽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반초의 뜻은 붓에 있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해 어쩔 수 없이 필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지만 그는 늘 전한시대의 장건을 롤 모델로 삼아 무인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관직으로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여전히 필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반초는 관상쟁이를 만난다. 그 관상쟁이가 말하길 ‘선생께서는 중국에 있으면 그저 그런 선비가 될 것이요. 그러나 1만리 밖에서는 마땅히 후로 봉해질 것이요.’ 반초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다시 관상쟁이가 말하길, ‘나면서 제비의 턱에 호랑이의 목이 달렸으니 날아올라 고기를 먹을 것이로다. 이는 1만리의 후가 될 꼴이도다.’라고 했다. 이 관상쟁이의 말은 훗날 현실이 되어 반초는 서역을 개척하는 영웅으로 역사에 남는다. 반초는 장건이 개척했던 서역, 즉 실크로드 교역망을 다시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았는데, 사신이 되어 늘 30~40명의 병졸을 이끌고 서역의 수많은 국가를 다녔다. 반초와 그의 수하는 때론 무력으로, 때론 협상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이것은 반초가 싸움만 잘한 것이 아니라 무리를 하나로 만드는 리더쉽과 타인을 설득하는 재변이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황제는 바로 이런 기세의 사내를 만난 것이다. 

  

반초는 황제 앞에서 반고를 힘껏 변론 하였다. 반고가 『한서』를 짓는 이유는 ‘한 왕조의 공덕을 찬양하고 후세 사람들에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여 교훈을 남기고자 함이지 조정을 비방하거나 할 뜻은 없다’는 것이다. 명제는 반초의 말에 설득되어 그제서야 반고의 재능을 알아본다. 그리고 ‘역사 쓰기’를 계속 하라고 명한다. 『한서』가 개인저작에서 국책사업으로 전환된 순간이다. 역적행위였던 글쓰기를 황제의 승인을 받은 글쓰기로 만들었으니, 반초로 인해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반초의 변론은 반고만 구하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반고에게 역사를 집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결정적 인물이 반초였던 것이다. 반초가 아니었다면 『한서』는 세상에 나오기 힘들었을 터, 반초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한서』가 나오기까지 이런 보이지 않는 이들의 공력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글_강보순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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