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가 나오기까지, 반씨가문을 기억하라(1)
역사는 누가 쓰는가? 흔히 왕조시대의 역사는 왕 혹은 국가의 명령에 의해 제작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선왕조실록만』해도 그렇지 않은가. 역사 편찬에는 방대한 사료가 바탕이 되어야 하고, 이 사료들을 선별 분석 정리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국가 주도의 프로젝트가 아니라면 이루기 힘든 사업이라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2000년 전 최초의 정사라고 불리는 『사기』와 그 뒤를 잇는 『한서』는 왕의 명령으로 편찬된 역사책이 아니다. 개인이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출발하여 한 집안이 대를 이어 일구어 낸 가문프로젝트였다.
『사기』는 부친 사마담이 준비하고 아들 사마천이 완성한 역사책이다. 사마담은 사관이었던 조상들의 유업이 끊어진 것을 안타깝게 여겨 치열한 연마 끝에 태사령(천문역사를 담당한 관리)이 되었고, 역사책을 쓰기 위해 오랜 세월 자료를 모으며 필력을 갈고 닦았던 인물이다. 사마천이 궁형이라는 치욕을 견디면서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대를 이어 역사책을 써달라는 부친의 간곡한 유언 때문이며, 역사책을 마무리하지 않고는 죽을 수 없다는 ‘사관’으로서의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한서』는 어떨까? 『한서』역시 반고가 부친 반표의 유업을 이어받아 썼으니 역사책 집필이 가문프로젝트였다는 점에서 사마천 집안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반표와 반고가 역사를 쓰게 된 사정은 사마천과는 다르다. 반표와 반고는 ‘사관 가문’ 출신도 아니었고, ‘사관의 직책’에도 있지 않았다. 이들은 문장가로서 역사책을 썼던 것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부친의 뜻을 받들었으나 혼자의 힘으로 역사책 편찬을 완수했던 사마천과는 달리, 『한서』는 부친 반표와 아들 반고, 여동생 반소가 집필에 참여하고, 서역을 개척한 남동생 반초가 집필 환경을 만들어준, 반씨 가문의 대를 이은 총력전이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한서의 집필 작업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그 여동생으로 끈질기게 이어졌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놀랍고 신기한 것은 『한서』를 마무리한 인물이 여동생이라는 사실이다. 반소는 근대 이전 중국에서 역사 서술의 참여자로 등장한 최초이자 마지막 여성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후한 시대에 아들딸 구별없이 학문을 탐구하고 문장을 연마하여 『한서』를 탄생시킨 반씨 집안, 이 집안의 특별함은 무엇일까? 이 집안, 너무 궁금하다.
중국 최초의 여성 시인, 반고의 고모할머니 반첩여
반황-반염(女):반첩여
-반백(子)
-반유(子)-반사(子)
-반치(子)-반표(子)-반고(子)
-반초(子)
-반소(女)
반씨 가문이 역사에 이름을 올린 것은 언제부터인가? 반씨 집안의 명성은 전한시대 반첩여로부터 시작된다. 반첩여는 어떤 인물인가? 반첩여는 반고의 고모할머니로 성제의 후궁이었다. 후궁으로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경국지색? 질투의 화신? 아니다. 반첩여는 우리가 생각하는 후궁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느 날 성제가 후원에서 놀다가 반첩여와 수레를 함꼐 타려고 했는데 반첩여가 사양하며 말했다. “옛 그림을 보면 성군 곁에는 명신이 있었지만 삼대 마지막 주군 옆에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지금 같이 연을 탄다면 그와 비슷하다고 아니하겠습니까?” 성제는 그 말을 옳다고 여겨 그만두었다. 태후가 이를 듣고서 기뻐하며 말했다. “옛날에 번희가 있었다는데 오늘에는 반첩여가 있다.” 반첩여는 시경을 외우고, 절조,덕상,여사의 글을 읽었다. 반첩여는 황제를 뵙거나 상소할 때 예전의 의례를 본받았다.
- 반고,『한서9권』,진기환역주, 명문당 2017,519쪽
『한서』에서 주목한 반첩여의 일화는 특별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후궁들은 황제의 사랑에 취해 온갖 혜택을 누리거나, 아니면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술수를 가리지 않는다. 황제의 변심을 막기 위해 외모를 가꾸고 왕자를 낳아 황후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하는 것.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후궁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반첩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황제가 수레를 함께 타자는 것은 그만큼 총애가 지극하다는 뜻. 반첩여는 여기에 기뻐하지 않고 성제에게 충언을 마다하지 않는다. 여인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하지 말고, 명신과 국사를 의논하라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일신의 안위와 영달에 급급해하지 않는 후궁 반첩여, 특기할만한 품격을 갖춘 인물이었던 것이다.
반첩여를 사랑했던 성제는 어떤 황제였을까? 성제는 전한말기의 쇠락을 가져온 군주다. 집권 초반에는 성실하게 나라를 돌보며 황제다운 면모를 보였지만, 나중에는 주색에 탐닉해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게다가 외척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훗날 성제가 죽고 약 20년 뒤 한나라는 외척 왕망의 손에 멸망한다. 반첩여는 바로 이런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반첩여는 시경을 비롯해 여성교훈서를 공부했던 바, 배운 그대로 행동했다. 그리하여 시경을 인용하여 바른 정치가 회복되도록 성제를 일깨웠던 것이다. 반첩여는 사소할 수 있는 행동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성제가 군주로서의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충신처럼 내조를 다했다. 반첩여는 유학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는 군자 그 자체였다.
황제의 사랑은 변하는 법! 반첩여에 대한 성제의 총애는 조비연이라는 후궁이 등장하면서 식어버린다. 조비연은 우리가 예상하는 바 후궁의 공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질투가 심하고 술수에 능한 여인으로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자 음모를 꾸며낸다. 허황후와 반첩여가 황제를 저주한다고 음해하여 결국 허황후는 폐위되고, 반첩여는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반첩여는 결백을 주장해 가까스로 풀려났지만 성제의 마음은 이미 조비연에게 기운 상태였다. 조비연은 끝내 반첩여를 죽일 생각이었는데, 그것을 예감한 반첩여는 후궁의 자리에서 물러나 황태후를 모시겠다고 자처하여 간신히 화를 면한다. 질투의 대상이 되지 않고 낮은 자리에 처하는 것, 반첩여가 위기에서 스스로를 구한 방법이었다.
그 후 반첩여는 황제의 사랑을 되찾기 위한 노력보다, 그러한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많은 시를 짓기 시작한다. 그 유명한 <자상도부> <도소부> <원가행>이라는 시가 전부 이 시기 작품이다. 다음은 <자상도부>라는 시의 일부다.
(상략)동궁에서 태후를 받들고 장신궁의 낮은 곳에 의탁하여
청소하며 어른을 모셔 죽도록 오래 시중들라 다짐하였다.
능 아래 발치에 뼈를 묻고 소나무 그늘에 의지하길 바라노라.
- 반고,『한서9권』,진기환역주, 명문당 2017,523쪽
훗날 성제가 붕어하자 이 시의 내용처럼 반첩여는 남은 여생을 성제의 능을 지키며 보냈고, 죽어서는 성제의 옆에 묻혔다. 보통 음해와 고초, 내쳐짐을 당하면 복수를 준비하거나 화병으로 앓아눕기 십상인데 반첩여의 삶은 마지막까지 고결했다. 반첩여는 시쓰기를 자신의 낙으로 삼고, 유학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반첩여라는 여성시인의 의로움과 문장력으로 인해 반씨 집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붓을 꺾은, 반고의 할아버지 반치
반첩여와 남매지간이었던 반황의 아들들 역시 반첩여에 못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반백 반유 반치다. 이들 중 반치는 반황의 막내아들로 반표의 아버지요, 반고의 할아버지다. 큰 아들 반백은 『상서』와 『논어』를 황제 앞에서 강론할 정도로 학식이 높았던 인물이다, 성제의 총애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반백이 아파 병석에 누워있을 때 성제가 직접 문병하였는데, 반백은 황제의 방문에 아픈 몸을 이끌고 업무를 다시 보아야 했었다는 웃픈? 일화도 전해진다. 둘째 아들 반유는 유향과 함께 궁중의 장서를 분류·정리 하는 일을 했고, 황제 앞에서 여러 책을 강의한 인물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반유가 황실에 비장된 도서의 부본을 성제에게 하사 받았다는 사실이다. 성제는 숙부 동평혜왕이 『사기』를 얻고 싶어 했지만 허락하지 않았을 정도니, 반유에 대한 성제의 신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반표가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책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이렇게 능력 있는 숙부들을 둔 덕분이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반씨 가문에 검은 구름이 밀려온 것은 반표의 부친 반치 때부터였다. 황실과 가까이 지내며 영화를 누리던 가문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반치는 전한말의 실세였던 외척 왕망과 어렸을 때부터 막역한 사이였다. 왕망은 반유를 형처럼 모시고, 반치를 동생처럼 아꼈다고 한다. 뒤에 왕망은 어린 평제를 독살하고 황위를 찬탈한 뒤 한나라를 없애고 신나라를 세운다. 왕망이 황위를 욕심내기 전까지 반치와의 사이는 돈독했다. 그런 두 사람이 멀어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반치는 왕망이 정권을 장악하는 모습에서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읽었다. 반치가 보기에 왕망은 황제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많은 문사들이 ‘태평성대’라며 왕망의 치세를 칭송하는 문장을 상주할 때, 반치는 그러한 문장을 올리지 않았다. 왕망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사가 붓을 들지 않고 침묵할 때, 그 침묵이 가장 강력한 저항이 될 수 있음을 반치는 보여주었다.
이런 저항은 곧장 화를 불러와, 반치는 옥에 갇히게 된다. 죽음이 코앞에 와있을 무렵. 반치는 천운으로 사면 받는다. 어떻게 사면 받았을까? 당시 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반치였기에 왕망의 입장에서 쉽게 사면 해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사면 된 것일까? 혹 권력에 굴복하고 아첨하는 글을 지어 올린 것일까? 아니다. 황태후는 ‘왕망의 미덕을 널리 알리지 않은 것은 나라의 재해에 빗대어 왕망을 비난하는 행위와 다르므로 처벌할 수 없고, 더하여 현숙한 후궁 반첩여의 본가이므로 긍휼히 생각하여’ 반치를 사면한다. 함께 연루되었던 공손굉은 사형에 처해진다. 반치는 누이 반첩여 덕분에 처형당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반첩여에 대한 황실의 신망은 이처럼 대단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실 황태후는 왕망의 권력남용에 대한 견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반첩여의 이름을 빌려서라도 왕망을 견제해야 했던 것이다. 왕망도 황태후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이후 반치는 광평국 재상의 인수를 반납하고 장안에 들어가 성제 능을 지키는 원랑으로 살면서 무사히 생을 마쳤다. 마치 누이 반첩여가 첩여라는 후궁의 직책을 내놓고 황후를 수발하고 성제 능을 지키며 생을 마친 것처럼, 반치도 그렇게 살았다. 그리하여 “반씨는 왕망의 조정에서 이름이 없었고 또 허물도 입지 않았다.” 반치가 이렇게 자신을 지키지 않았다면 『한서』의 탄생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글_강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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