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는 것'과 '열심히 하는 것'
질문1. 감정을 내려놓으면 에너지를 발동시키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요?
질문 : 감정이 부정적으로 작동할 때도 있고 긍정적으로 작동할 때도 있는데. 예를 들자면, 시험을 잘 보고 싶은 아이는 시험에 무심한 아이보다 불안 강도가 높지만 좋은 성과를 거둘 가능성도 높지 않나요? ‘감정을 내려놓아라.’ ‘흘러가게 두어라’, 하는 것은 할 수 있는데, 그 상황에서도 에너지를 발동시킬 수 있는 원리가 궁금합니다.
스님 : 욕망은 가장 기본적인 생의 에너지 중의 하나에요. 욕망을 내려놨다고 하는 말은 욕망 그 자체가 소멸했다는 말이 아니에요. 욕망이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만드는 쪽으로 가는 일을, 그렇지 않는 쪽으로 가도록 한다는 거예요. 욕망의 크기나 감정은 똑같은데 운전석이 달라져 있어요. 그래서 내려놓는 과정을 지나야 돼요. 안 지나면 안 돼. 운전의 방향이 바뀌려면 일단 이것을 내려놓고 다시 보는 훈련을 해야 해요. 그러면 안에서 이 욕망이 다른 식으로 변주를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욕망 자체가 사라지는 게 아니죠.
그 다음에 방금 말한 대로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있는데, ‘난 왜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이 많이 올라오는지 모르겠어’라고 말 안 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신체가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어요. 눈을 뜨면 보이도록 되어 있죠. 귀를 열면 들리도록 되어 있죠. 감정의 기간은 딱 눈만 뜨면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80% 이상이 되도록 되어 있어요. 감정을 해석하는 신경세포 수가 천만 개에요. 천만 개 중에서 800만 개 이상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하고만 일을 해요. 그래서 감정이 눈을 뜨면 부정적인 거예요. 이것은 수십 억 년을 지나온 진화 과정에서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그냥 기본적으로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그래서 감정 자체만을 놓고 보면 부정적인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거예요. 지금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그렇게 부정적으로 이웃을 해석한 후손들이에요. 숲에서 무엇이 움직이면 ‘사자다’라고 도망친 놈은 살아남았고, ‘뭐가 있어’라고 즐겁게 가면 다 잡아먹혔죠. 진화하는 과정에서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공포심을 가지고 도망간 후손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예요. 그래서 감정은 공포를 위주로 해서 부정적인 쪽으로 해석하도록 되어 있어요. 긍정적으로 하면 잘 되면 굉장히 좋지만, 리스크가 클 수가 있어요. 그런데 부정적으로 보면 마음은 힘들지만 리스크가 줄어들어요. 생존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훈련을 생명체들이 해 온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안 해도 될 것까지도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리스크도 줄이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잘 사는 방법이죠. 그래서 부정적인 것이 나오면 기본적으로 ‘아, 진화가 만들어 놓은 감정의 눈이 저렇게 나왔구나’라고 먼저 보면서 거기에 대해서 절대 비난하면 안 돼요. 그런 식으로 부전적으로 감정을 순환시키는 통로를 활성화시키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해요. ‘나는 왜 이래’가 아니라 거의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니까요. 다만 후천적 학습을 통해 가지고 ‘잘 할 거야’라고 학습을 했느냐에 따라서 다른 부위들이 개입하면서 감정을 다른 식으로 해소하는 거예요.
질문2. '최선'이란 좋은 말 안에도 부정적 욕망이 많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질문 : 욕망이나 욕구가 사실 인간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잖아요. 그런데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어서 긍정적인 곳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에너지가 대단히 크게 발동을 해서 ‘최선을 다 한다’ 이렇게 되는 건데. 그 ‘최선’ 안에는 애착도 있고 대단히 부정적인 욕망도 있는 거잖아요. ‘최선’이라는 그 말 자체가 이미 내려놓음이 안 되고 나의 기준이 되는 것 일수도 있잖아요. 어떻게 긍정적인 방식으로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에너지들을 활용할 수 있는지.
스님 : 어떤 분의 이야기인데, 자기가 돈을 벌면서 살아온 과정을 보니까 400백만 원을 넣기 시작하면서부터 전체적으로 불유쾌한 삶의 힘들이 커져갔다고 해요. 400백만이 될 때까지는 같은 욕망이라도 그것이 긍정적인 욕망으로 자기 삶에 작용하고 좋아졌는데, 월급이 400백만 원이 넘어가는 순간부터 전혀 그렇게 작용하지 않더래요. 그래서 상당히 월급을 많이 받다가 도저히 그렇게 안 돼서 다 때려 치고 훨씬 적은 곳에서 살면서 다른 식으로 산다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 생활에 안정적인 필요성을 어느 정도 갖추고 난 다음에 그걸 통해서 자기 삶을 즐겁게 보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그렇습니다. 더 있으면 좋을 것처럼 생각하는데 실제 안 그렇다는 거죠.
그래서 각 개인마다 다르니까 자기가 설정을 해서 먹고, 자고, 사는 기본적인 요소를 어디까지 설정한 다음에, 그 다음부터는 내려놓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이때부터는 이 다음이 자기 삶에 먹혀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죠. 욕망은 욕망 그 자체가 목적이에요. 눈은 보는 것이 목적이잖아요. 눈한테는 보는 것이 일이잖아요. 그런데 심리 상태 중에서 욕망은 욕망하는 것이 일이에요. 그 사람 처지를 보면 400백만 원 정도 되면 괜찮은데 계속해서 500, 600, 700을 벌자고 욕망하는 것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의미가 없잖아요. 그런데 500, 600을 벌 때 훨씬 더 힘들어지는 거예요. 그 사람 말로 하면 400정도 됐어도 충분한데, 500 벌어서 더 힘들어지고, 600에 가면 더 힘들어지고 삶이 계속 힘들어지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뇌 속에 들어있는 욕망은, 욕망하는 것이 자기 의무라서 그 행위를 하는 거지 삶 전체를 보면서 욕망을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작동을 하되 불필요하게 자기 삶을 좀먹는 데까지 가지 않도록 보는 훈련을 해야 하죠. 그것을 지혜 있는 눈이라고 말하고, ‘나는 왜 아무것도 안 보이지. 내일 모레 죽어’ 이렇게 하는 것은 욕망이 전혀 또 다른 것이죠. 내려놓는다고 하는 욕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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