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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불교가 좋다] 너무 잘 살려고 하지 마세요

by 북드라망 2019. 3. 19.

너무 잘 살려고 하지 마세요

 

 


성찰을 잘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질문 : 제가 사주 상으로 목, 화, 토 이렇게 발산하는 기운이 많고 수렴하는 기운이 거의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휙휙 새로운 걸 시작하고, 전환하는 건 빠르게 하는데 자기 성찰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이게 잘못됐다’라고 하면 ‘아 그러면 그렇게 안 하면 되지’, ‘아 그러면 이제 다음에는 이거 안 할 테니까 다른 거 할게’ 이런 식으로 가고 거기에 대해서 제가 성찰을 잘 안 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글을 쓸 때) 그냥 사건 위주로만 쓰고 그거에 대해서 제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런 건 잘 안 쓰게 돼요. 그래서 성찰이란 게 욕망을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습을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때 상황을 볼 수도 있을 거고, 여러 가지가 있을 거 같은데 성찰을 한다면 어떤 걸 봐야 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정화스님 : 사실상 산다는 건 별거 없어요. (웃음) 그래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면 돼요. 아까 수렴하는 기운이 부족하다 했죠. 그 수렴하는 기운을 아무리 가지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됩니다. 또 뭔가 좀 많으면 많은 대로 살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한테도 피해 안 주고 다른 사람한테도 피해 안 주면서 살면 돼요. 너무 잘 살려고 하지 마시고.

 



예를 들면 자주 지각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 사람들이 제일 늦게 왔을 때 자기도 모르게 주목을 받잖아요. 그때,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이익이다’라고 하는 생각이 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지각하려고 해서 하는 게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이익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늦는 거예요. 그 무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가 살아온 과정에서 익힌 여러 가지 습이에요. 습. 그래서 한편으로는 ‘나는 왜 지각하지’ 이렇게 말해도 마음속 다른 깊은 곳에서는 ‘내가 주목받았어, 그것이 나한테 이익이야’ 이런 생각이 들어있는 거지요. 그것은 굉장히 고치기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매일 지각하는 사람은 안 해야지 해도 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각하는 것에 대해서 ‘아 나는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거기에 대해서 누가 말하면 적당히 (대응)하고, 또 내가 지각한 것에 대해서 너무 나를 탓하지도 말고. 그냥 이렇게 살면 돼요. 그래서 거기도 부족하면 부족하신 대로 살고, 또 내가 좀 잘하고 있으면 잘하는 대로 살고. 이렇게 하면서 경험이 많이 모여야 합니다. 

 

지난번에 다른 강의에서 말했듯이 인류가 내일이라고 하는 것을 사유하게 된 지가 약 5만 8천 년 밖에 안 됐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는 인류의 사고 속에 ‘내일’이 없었어요. 옛날 인류의 뇌에는 각자 일을 하는 부서 같은 것이 지금보다 많았습니다. 이 부서들을 융합해서 폭발적으로 하나의 사건을 만드는 일이 약 6만 년 전에 태초로 일어납니다. 그 뒤부터 인류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연속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됐다는 모양이에요. 

 

그 전에는 아무리 내가 내일을 생각하려고 해도 안 되는 거예요. 근데 경험들을 다양하게 해서, 그 경험들이 어느 순간 하나로 묶어지는 겁니다. 그 묶어지는 것도 내가 하려고 해서 된 게 아니고 경험하다 보면 안에서 무언가 묶어지는 게 있어요. 그 묶어진 것이 내가 살아온 것하고 다른 방식으로 나와 세계를 보는 것이에요. 그것을 우리가 뭐라 부르냐 하면 성찰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성찰. 

 

그래서 젊을 때는 너무 지치지 않는 상태에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하다가, 이틀 했는데 싫으면 하지 말고, 또 다른 것 하고. 다른 사람이 뭐라 하면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세상을 보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자기한테 뭐라고 하면 안 돼요. 이렇게 하는 것이 쌓이다 보면 그것들이 안에서 저 스스로 융복합이 일어나요. 그리고 행동이라든가, 말하는 것이라든가, 생각하는 것에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밑에 쌓인 것들이 모여서 융복합이 내부적으로 일어나야 돼요. 근데 경험이 적은 사람들은 그게 일어나기 어렵죠. 

 

대부분 안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젊어서부터 어떤 질문에 콱 꽂혀요. 이게 성찰이 질문에 따라붙는 거예요. 보통은 경험을 많이 한 뒤에 그 경험들에서 뭔가가 나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질문을 먼저 던져요. (아직 답이 없어요) 이 상태에서 계속 행동하고 공부를 하다 보니 행동이 질문에 수렴을 해요. 그래서 어느 정도 쌓이면 이 질문이 툭 터집니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제가 늘 말씀드렸듯이 아인슈타인이죠. 그래서 (성찰은) 그와 같은 일생일대의 질문이 있거나, 아니면 일생일대의 질문이 없어도 경험을 많이 하다 보면 일어나요. 우리 뇌는 그런 여러 경험들이 뭉쳐서 갑자기 확충이 돼요. 그러다가 사고가 전환이 일어나는 거죠. 

 

젊었을 때는 자기에게 부족한 것을 한 5% 정도 더 하면 됩니다. 자기에게 부족한 것을 20%, 30% 하면 좌절이 빨리 와요. 할 수가 없어요. 보통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서 약 5% 정도 더 하면 돼요. 그리고 좀 지나친 것은 조금 덜 하고, 이렇게 하면서 경험을 계속 쌓아 가고 안에서 융합이 일어나면 그때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세상 보기가 일어나는 겁니다.

너무 거기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심각하게 생각 거의 안 하죠? (웃음) 혹시라도 하면 하지 말라 그랬을 거예요.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과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충돌합니다

질문 : 저는 사주 상으로 수기가 많아서 고립이 된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저는 의도치 않아도  자주 혼자 있게 되는 거 같아요. 근데 사람들하고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은데 혼자 있다는 게 편하다고 생각해서 자꾸 ‘같이 있고 싶다’, ‘혼자 있고 싶다’가 충돌하게 돼요. 이럴 때마다 어떡해야 될지 잘 모르겠어요.

 

정화스님 : 네. 그것도 걱정할 게 전혀 없어요. (웃음)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혼자 있으면 답이 돼요. 그리고 그 혼자 있는 것에 대해서 ‘이래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을 하면 안 돼요. 내가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여도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내 안에 들어있는 모든 무의식적인 인지가 나로 하여금 ‘지금 혼자 있고 싶어요’라고 의식하게 만드는 거예요.

 

근데 이 의식을 내가 다른 식으로 전환하려면 굉장히 힘들고 어려워요. ‘난 이게 안 하고 싶어’라고 하는 생각으로 이 생각이 바뀔 수 있으려면 ‘안 하고 싶어’라는 생각을 하루에 강도 있게 열심히 해서 100일, 1000일을 해야 방향이 틀어지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는 무의식이 ‘나는 혼자 있고 싶어’라는 것을 의식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그때는 특별히 문제가 안 되는 이상, 혼자 있는 것이 정답이에요, 내 인생에서는. 그다음에 또 어느 날은 ‘나는 누구하고 같이 있고 싶어’라고 생각한다면, 마찬가지로 자기가 쌓아 놨던 모든 것들이 안에서 작용을 해서 ‘누군가하고 같이 있고 싶어’라고 하는 의식적 상황을 만들어 주는 거예요. 내가 의식하는 게 아니에요. 몸이 그렇게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는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이 정답이에요. 

 



그렇게 올라오는 생각에 대해서 여기 계신 누구도 ‘잘못 살았어’라고 말할 수 없어요. 스스로도 자기가 살아온 삶 자체를 볼 때, ‘난 왜 인생을 이렇게 살았어’라고 말하지 않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해야 돼요. 그래서 방금처럼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왜 나는 혼자 있고 싶어?’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아 지금은 혼자서 편히 있고 싶어 하는구나’하고 혼자 있으면 돼요. 그다음에 누구하고 만나고 싶으면 ‘지금은 몸이 누구하고 만나고 싶어 하는구나’ 하면서 가능하면 만나면 되는 겁니다. 그 두 개 중에 어느 것이 더 나다운 것이라고 할 수 없어요.

 


하심을 가지고 배우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질문 : 저는 평소에 남의 말을 잘 안 듣고, 저대로 잘하려고 하다 보니까 오만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관계 속에서 배운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고, 배운다는 것도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어떤 책을 읽어도 잘 와 닿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심을 가지는 것, 배우는 것은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하는 건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정화스님 : 너무 하심 하려고 할 거 없어요. 다들 자기 잘났다고 사는 거예요. 다들. 그러니까 내 스스로 하심 하려고 안 해도 다 잘났다고 사니까 다 비슷비슷해요. 내가 높이려고 하는 것도 아무리 높이 올라봤자 거기서 거기고. 내려도 거기서 거기예요. 근데 자칫 어떤 경우가 있냐 하면, 하심으로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경우가 있어요. 진실로 하심이 아니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아까 말한 지각하는 사람에 대해 말했듯이) 늦게 온 사람이 늦게 갔을 때 다른 사람의 주목이 이익이라고 생각하듯이, 마음을 내리는 것이 일종의 이익인 것처럼 판단하니 그런 일을 하기가 쉬워진 거예요. 

 

근데 어떤 경우는 방금처럼 다른 사람 말 안 듣는 사람들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의 기운은 아까 말한 수의 기운 중 하나예요. 여러분들 모두 다 수기가 있어요. 목화토금수가 강도의 차이만 있지 다 있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것이 좀 더 강한 거예요. 근데 그렇게 형성되어진 것에 대해서 내가 나를 비난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습니까? 비난할 수가 없어요. 내 신체와 사유망이 그렇게 형성돼서 내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고치려고 하지 말고, 고쳐지지도 않으니까. ‘아 나는 이렇게 돼 있구나’하고 자기를 본 다음에, 다른 사람을 보고 ‘아 저 사람은 저렇게 돼 있구나’라고 훈련하는 거예요. 내가 뭔가를 안 받아들이는 것이 나쁜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나한테 말해주는 것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둘이 만나는 열쇠와 자물쇠의 구성요소가 다른 거예요. 그러니 나는 여기서 계속 튕길 수밖에 없는 것이죠. 서로 안 맞는 사람이 많아요. 

 

다른 사람 말이 안 들리는 것에 대해서는 연기를 잘 배우셔서 속으론 안 듣고 있는데 겉으로는 듣는 척하는 것만 조금 하면 돼요. 너무 (연기를) 안 하면 살기 힘들어요. 전부 다 그걸 열심히 하고 있어요. 본인만이 아니라 수기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상당히 의도적으로 해야 됩니다. 아닌 사람들은 그 연기가 수월해요. 또, 남성보다 여성이 더 수월해요. 감정에 공감하는 강도가 여성이 더 셉니다. 여성 중에서도 수기가 많은 사람은 이걸 하기가 어려워요, 수기가 튕겨내기 기운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속으로는 전혀 아닌데도 겉으로는 듣는 척하는 것을 나는 좀 의도적으로 해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할 필요는 있어요. 마음에 안 들지만 그냥 듣는 척하는 거예요.

 



세상이 다 그래요. 왜냐하면,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온전히 자기 몫이에요. 정답이 없어요. 안에 어떤 지도가 들어있느냐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달라요. 그래서 설사 둘이 뜻이 맞았다고 해도, 내용을 정말 들여다보면 엉뚱한 것을 가지고 맞다고 손잡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습이 다르니까. 불교적으로는 이것을 업이 다르다고 합니다. 뇌에는 생각의 지도가 있는데, 어떤 식으로 도로망이 나 있는가에 따라서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지도가 전부 다 다릅니다. 그런데 맞는 척하고 있는 거예요. 누구든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계를, 여기에서 스무 명이 보고 있는데 똑같이 해석된 경우가 단 한 건도 없습니다. 빨강이라고 말을 했는데 실제 신체가 해석하는 색은 하나도 똑같은 게 없어요. 우리 눈이 해석하는 색깔만 해도 몇백만 개 돼요. 빨강을 구분할 때 절대 똑같이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제 이 빨강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 있잖아요. 이 감정을 보내는 것도 사람마다 전부 달라요. 그러니까 본질적으로는 약간의 공집합이냐 약간 더 큰 공집합이냐 하는 차이지 모두 똑같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누구나 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저절로 연극을 하고 있는 거예요. 


기왕 연극을 하는데, 불편한 연극을 할 필요가 없어요. 누가 이야기할 때, 내 얼굴에 불편한 기색을 띠면 나도 불편해져요. 내가 얼굴이 딱 불편하면, 그래서 얼굴이 불편한 순간 이 안에서 ‘불편한 감정을 표출하시오’라고 말해요. 그럼 보통 말투에 배어서 나가요. 그럼 뇌는 ‘내가 잘 행동했어’라고 또 합리화를 시켜요. 내가 화를 냈는데, ‘잘했어’라고 말을 해요. 그럼 이 관계에서 또 안 좋은 것이 오는 거예요. 그럼 나는 또 안 좋은 것을 수용해서, 안에서 이것을 해석할 때 안 좋은 감정을 끄집어 와서 해석을 해야 돼요. 그래서 같이 연극을 하는데, 나도 안 좋고 너도 안 좋은 쪽으로 연극하지 않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남 소리를 안 듣는 것 자체는 안들을 수 있는 조건이니까 괜찮아요. 근데 그때 내가 표정 변화나 심리상태를 잘 꾸며서 나도 괴로움과 접속하는 강도나 빈도수를 줄이고, 상대한테도 그런 빈도수를 줄어들게 할 연습은 필요해요. 그래서 그걸 잘하면 됩니다. 단, 하루 이틀 해선 안 되니까 백일이고 천일이고 그걸 염두에 두고 계속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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