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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

[불교가좋다] 치(癡)심을 바꿔야 합니다

by 북드라망 2019. 4. 29.

치(癡)심을 바꿔야 합니다




질문 1. 스님도 고민이 있으신가요? 

스님도 혹시 고민이 있으신지, 지금 고민이나 화두가 있으시면 듣고 싶고, 혹시 그 문제의 대처방법이 뭔지, 어떻게 대처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정화스님 : 저는 그냥 놔두는 편이예요. 그것에 대처하는 게 아니고 그냥 그러려니 해요. 그래서 별로 고민이 없어요.​

 



질문 2. 글을 쓸 때 다른 욕망이 자꾸 올라옵니다

저는 지난 8월 달부터 원고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요즘 글이 잘 안 써지니까 희한한 욕망이 올라옵니다. 예를 들면 과자를 먹고 싶다는 욕망이 세분화되어 올라옵니다. 이거 말고 다른 과자, 술도 다른 술, 커피도 다른 종류의 커피. 이런 식으로 세분화된 욕망이 올라오고, 그런 욕망이 올라왔다는 것을 제가 캐치를 하고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하는 순간 그 욕망이 저를 더 휩싸더라고요. 그래서 이 메커니즘이 도대체 뭔가? 무슨 상황인가? 싶습니다.

 

정화스님 :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 탐, 진, 치에요. 자, 그러면 바꿔 말해서 ‘탐진치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지 마세요’ 라는 말이에요. 우리를 이루는 가장 기본 속성이 탐욕과 분노와 무지에요. 내가 생각을 하면 탐욕이 나오고 분노가 나오고 무지가 나온다는 말이에요. 자, 거기에 대해서 내가 ‘내 인생이 왜 이래?’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냥 우리를 이루는 것의 근본이 그 자체인 거예요. 바꿔 말하면 탐욕과 분노와 무지는, 우리가 비난할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또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아까 말했잖아요. 글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과자가 먹고 싶었다고. ‘과자가 먹고 싶다’라고 의식하기 전에 내 탐욕의 무의식이 움직여가지고 ‘과자가 먹고 싶다’가 올라온 거예요. 거기다 내가 대놓고 ‘너는 왜 그렇게 욕심이 많니?’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말하면 안 돼요. 

 

‘나를 이루는 기본 속성 하나가 올라왔구나’라고 자기를 보는 것만 필요해요. 거기에 대해서 시비하면 안 돼요. 수행하는 사람도 똑같이 탐심이 쭉 올라와요. 그런데 탐심이 말로 나가면(탐심을 말해버리면) 중생이지만, 수행하는 사람들은 여기까지 탐심과 분노가 올라와도 말에는 연극을 담아서 탐심이 없는 것처럼, 분노가 아닌 것처럼 말하는 훈련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이 안에 있는 탐심과 분노한테 ‘그렇게 안 해도 돼’라고 하는 이야기를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안에서 그 전의 도로하고 다른 도로를 조금씩, 조금씩 열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탐진치) 자체는 문제 삼으면 안 돼요. 한 번도 우리가 의지적으로 그것을 해결해볼 수 있는 역량이나 힘이 있던 적이 없었어요.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보면 분노가 나게 돼 있어요. 그런데 뒤의 무지는 그것들이 자기를 괴롭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들이 기본인 것에는 분명하지만 자기 삶을 괴롭히고 있는 거예요. 그것이 괴로운 줄 알면 수행하는 사람들처럼 연극을 하는 것이죠. 


연극을 해서 내부의 장치를 바꿔 가는 훈련을 하지 않는 것이 무지입니다. 이 훈련이 언제부터 시작됐냐 하면, 6000년 전 언어가 발명되고 제사가 발명되고 종교가 발명된 때예요. 인도의 강에서 6000년 전의 결가부좌하는(명상하는 자세) 흙으로 만든 조각상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인류가 ‘야, 인생이 꼭 이런 것만은 아니래’라고 뭔가 하기 시작한 때가 유물로 보면 한 6000년 전인 거예요. 그 뒤로 한 3000년쯤 지나니까 인도에서 굉장히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막 나타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탐욕을 이렇게 바꾸면 내 삶의 결과가 괴로움으로 방출되지 않겠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됐어요. 탐심과 치심을 다스리는 방법이 형성 돼 가는 거예요. 

 



두 번째로, 글 쓴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머리를 심하게 굴린다는 말이에요. 가만히 있어도 하루에 먹는 에너지의 20%를, 포도당만 놓고 보면 60%를 머리 굴리는 데 써요. 그런데 글 쓸 때에는 머리를 과도하게 굴리는 거예요. 그러니 글을 쓰고 있으면 에너지를 얼마나 쓰겠어요. 그래서 ‘탄수화물이 필요해요’라고 무의식이 말해서 욕망이 올라올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내게 크게 좋은 건 아니니까, 하루 세끼 먹고 충분히 감당할만하니까, 잠시 일어나서 머리를 천천히 굴리는 상태로 자기 신체를 바꿔야 해요. ‘그걸 먹고 싶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시비하면 안 됩니다. 

 

 

질문 3. 감정적인 교감을 할 수 있는 관계만 원합니다

동의보감에서 남성은 정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고 여성은 감정적인 소모가 많아서 감정 컨트롤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양생, 잘 사는 삶이 결정된다고 하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엄청 감정적인 소모가 많은 사람인 거 같아요. 깊은 관계일수록 감정적인 교감을 원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계속 그런 방식으로만 관계를 맺었는데, 최근에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조금 느낍니다. 어떻게 제 습관을 바꿔볼 수 있을까요?

 

정화스님​ : 공감한다는 것, 공통으로 완벽히 공명한다는 것은 100% 틀린 말입니다. 감정에서조차도 자기 해석기가 따로 있어요. 상대의 감정을 거울 뉴런에 비춰서 ‘아~ 저 사람이 아프겠다’고 내가 느끼는 것인데, 이 거울 뉴런 작용의 공명파가 똑같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느끼고 있지만 상대의 뉴런은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방의 감정에 맞추려고 하는 것은, 맞출 수 없는 것을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공감한다고 생각하지만) 내 거울 뉴런에 비친 해석이지, 상대와 똑같이 느끼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공감 자체를 존중하는 것에서 끝내야 합니다.

 

두 번째로 남성과 여성은 강도의 망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여성은 종로 도로를 달리는 차라고 비유하면, 남성은 을지로를 달리는 차인 것이에요. 여성의 감정은 종로로 나 있고, 남성의 감정은 을지로로 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서로 들여다보고 있지만, 저기서 쌩쌩 소리만 나고 통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래서 ‘왜 이해 못 하냐’고 하면 ‘난 을지로를 달렸는데’라고 하는 것이죠. (을지로에 있는 차는) 종로가 어떤 사정인지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성의 거울뉴런은 을지로를 달리도록 되어 있고, 여성의 거울뉴런은 종로를 달리도록 되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멀찍이 떨어져 있고 샛길로만 기운이 왔다 갔다 하니까 완전히 막혀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요 도로가 다른 것입니다.

 

우리 뇌는 회백질, 백질, 흑질, 이 세 가지가 다 있는데, 이 세 가지가 작동하는 강도가 남성과 여성이 일차적으로 다릅니다. 여성 안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이 도로망의 강도가 종로와 을지로처럼 다르게 나 있는 것입니다. 종로를 달리고 있으면, 을지로를 달리는 차한테 을지로의 도로상황이 어떠냐고 물어봐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내가 공명하는 것도 종로 사정이지 을지로 사정이 아닌 거예요. 그런 사정인 것을 먼저 알아야 하고, 내가 종로를 달리는 것에 대해서 내가 살아온 역사이니까 부정할 것은 없어요. 상대와 뜻이 안 통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원래 뜻이 안 통하는 거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부모님하고 형제들하고 잘 맞습니까? 잘 안 맞잖아요. 일란성 쌍둥이도 도로가 다릅니다. 부모 자식 간에는 유전적 차이가 있지만, 일란성 쌍둥이는 거의 차이가 없어요. DNA가 만드는 도로에는 차이가 없는데, 이 도로에 끼어드는 것들이 차이가 있는 것이에요. 둘의 도로는 똑같이 종로인데, 한 친구는 아침에 다니는 차고 다른 친구는 저녁에 다니는 차 같은 거예요. 같은 종로인데도 시기가 다릅니다. 종로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아침 사정이고, 점심 사정인 거예요. 

 

이렇게 비슷하게 이해할 뿐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으니까, 자기 이해를 존중할 뿐이지, 상대방에게 자신을 맞추려 하거나 상대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란다면 이것이야말로 탐진치 중의 무지입니다. 나도 상대에게 맞춰줄 수 없고, 상대도 나에게 맞춰줄 수 없어요. 노력하면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잘못된 전제입니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 대해서는 너무 상대를 이해하려고 불필요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어요. 동시에 나도 ‘나 좀 이해해다오’라고 하기보다 ‘저 사람이 날 이해했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요. 듣고 싶은 얘기를 들으려고 하는 게 아니고, 듣고 싶은 얘기를 들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질문 4.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탐진치'는 왜 집착과 자아를 만들고, 부처님은 어떻게 이에서 자유로워 지셨나요

탐진치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작년에 법구경을 가지고 공부했는데, 거기에도 그 말이 자주 반복됩니다. 인간이 태어나면 불교에서 말하는 오온, 감각기관을 가지고, 자기가 세상을 구성해서 ‘나’라는 집착을 만들고, 그게 고통의 원인이라는 내용이 계속 반복이 되어요. 그러면 탐진치가 사람의 조건인데 왜 꼭 집착을 만들고, 자아를 만드는지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게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탐진치가 강하고, 어떤 사람은 더 약하고,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이를 부수고 자유를 얻었다 할 때에, 부순다는 것이 나라는 몸 자체의 부숨, 태어난 조건의 부숨인데, 그것이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정화스님​ : 부처님은 굶어죽지 않으셨어요. 그 말은 먹고 싶은 욕망이 올라오면 먹었다는 말이에요. 부처님이 일생동안 잠을 안 잤던 게 아니에요. 자고 싶을 때 잤다는 거예요. 부처님은 일생동안 가르쳤어요. 가르치고 싶을 때 가르쳤어요. 일생동안 수행을 했어요. 수행을 하고 싶을 때 했어요. 그런 것이 다 욕망(탐)이에요. 그다음에 자기 자식한테 화도 냈어요. 분노(진). 그런데 뒤에 무지(치)가 바꿔요. 부처님은 뭘 욕망하고, 어떻게 분노할 것인지를 아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욕망을 관찰해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욕망이 요구한 대로 가려고 합니다. 자기가 불구덩이로 가고 있는데도 계속 가는 거예요. 

 

욕망의 방향성이 문제인 것입니다. 글을 잘 쓰기를 욕망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잘 쓴 기준을 정해놓고 거기에 못 미치게 되면 자기를 자책해요. 쓰고 싶은 욕망을 넘어서기 시작하면 그걸 가지고 내 자아를 어떻게 구성하고 싶은지로 가는데, 이때부터 허구로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으로 자기를 충족시킬 수 있겠어요. 계속 자기 책망을 하거나 자기 비하를 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욕망하고 있는 것이죠. 성내는 것도 마찬가지죠. 부처님도 자식이 잘되라고 성을 내는 것이죠. 근데 그걸 담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성을 내야 하는 것일 때 내는 것도 아니고, 힘 있는 사람이 자기가 내고 싶을 때 내는 거예요. 그 분노가 효과가 있겠습니까.

  

탐욕과 분노의 기본 속성에 대해서도 이해가 없었고, 그 방법론에서도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것이야말로 아까 말했던 치심이에요. 탐욕과 분노가 전혀 다른 식으로 변질되어서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오는 과정에서 옛날에 부린 탐욕, 옛날에 냈던 분노의 속성에 끌려가서 그냥 화를 내거나 욕심을 내는 거예요. 지금 어떤 시기인지 상관없이. 지금 상황은 다른데, 옛날 것을 가지고 온 것이죠. 이것을 집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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