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가르침’
김명길, 『학교는 시끄러워야 한다』
필자의 말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학교는 시끄러워야 한다』는 봄에 읽은 책들 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책이었다. 나이 든 교사가 교직 생활을 되돌아보며 쓴 수기라는 점에서는 『학교의 슬픔』과 같지만, 아이들은 프랑스 선생님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보다는 우리나라 선생님의 우리나라 학교 이야기를 더 즐거워했다. ‘우리 학교에도 이런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책을 읽으며 아이들은 이 말을 참 많이도 했다. 그래서인지 마음에 드는 구절로 골라온 부분도 서로 비슷비슷했다. 몇 명이나 되는 녀석들이 똑같은 부분을 골라왔다. 바로 이 부분이다.
「수진이는 영어 심화반에 편입되었다. 안 한다는 것이 통하지 않는 이 학교에서 수진이 뜻과는 상관없이 수업을 받아야만 했는데, 이 금액은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바로 오늘이 그 돈을 내는 날이고, 액수는 3만 5천원이다.
그런데 수진이네는 그 돈조차 낼 형편이 안 된다 한다. 이 소리를 듣고 가슴이 답답해 왔다. 오죽하면 이 얌전한 아이가 내게 와서 이런 소리를 할까. 나는 그 얘기를 듣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그래, 어머니께 아무 걱정 하지 마시라고 전해드려.” (…) 얼굴은 웃는 모습인데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는 이 아이를 보면서 내 가슴은 찢어졌다. 나도 모르게 수진이를 꼭 안았다. 그러면서 “수진아, 너무 걱정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물론 부모님 잘못도 아니고. 세상이 잘못된 거야.” (…) 나는 아이들에게 강제로 보충수업을 시키고 돈을 받고 있는데, 아무 죄 없는 이 아이는 겨우 3만 5천원이 없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78 - 79쪽)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신경 써 주는 선생님. 학교에 대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선생님. 항상 학생의 편에 서는 선생님. 책의 저자인 김명길은 자신은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정말 멋진 선생님이라고, 너무 좋았다고 서로 재잘대는 동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 슬며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야.
정말로 어려운 일이야.
1.
몇 해 전인가, 한창 ‘멘토’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 특히 청년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멘토 서적들이 유행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그리고 얼마 뒤, 청년들은 그들 멘토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아프면 환자지 개XX야 뭐가 청춘이야!”
아무리 듣기 좋은 미사여구로 치장을 해도, 아니 되레 번지르르하게 꾸며놓았기에 현실의 고통은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애초에 그들 멘토들 - ‘선생’들과 청년들이 서 있는 곳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들이 그토록 고통을 아름답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애초에 그들이 그 고통스런 현실에서 빗겨 서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청년들이여, 당당하게 현실과 맞서라 : 우리들은 맞설 일 없는 현실에. 그들의 말은 공허했고, 청년들은 그들의 성공을 동경할지언정 그들의 말에서 배움을 찾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저명한 멘토는 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좋은 선생은 될 수 없었다.
과연 좋은 선생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를 보고서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이가 좋은 선생이리라. 그렇다면 가르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누군가로 하여금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할 수 있을까.
『학교는 시끄러워야 한다』는 사실 일기를 모아놓은 책이다. 김명길이라는 한 교사가, 교사란 마땅히 학생들의 편에 서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나이 든 교사가 수십 년 동안 쓴 일기들을 추려 모은 책이다. 저 위, 많은 아이들이 골라온 부분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부분 중의 하나이고 그것이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까닭일 것이다. 하지만 삶은 영화가 아니기에 항상 스펙타클할 수는 없다. 현실 속 우리 삶을 괴롭게 만드는 악역은 정신 나간 연쇄살인마나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의 세력이 아니라 자기 몸, 자기 가족 걱정하기 바쁜 직장 상사나 숨 쉬듯 자연스레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이다. 여기에는 위대한 대결도, 영광스런 승리도, 하다못해 장렬한 패배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기는 김명길이 교사로서 살아낸 수십 년의 일상을 되돌아보며 그가 가진 믿음으로 인해 그가 겪은 좌절들과, 현실적인 어려움들과, 어느 사이엔가 끝나버린 만남들, 침묵하고 흘려보내야만 했던 순간들을 담담한 어조로 담아낸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은 영웅의 장엄한 서사가 아니라 지나쳐가는 하루하루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관철코자 하는 노력의 기록들이다.
「더 이상 이야기해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아 그만하자고 했다. 그리고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은실이는 오히려 내게 이야기 들어 주어서 고맙다고 한다. 언제든지 말할 상대가 필요하면 내게 오라고 했지만 은실이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저 그 애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담임으로서 그 아이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104쪽)
「"오늘 아침에는 한 학생을 그 아이의 본심과는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어쩌면 그 아이의 얘기가 맞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점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그로 인해 반 분위기를 가라앉게 한 점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좀 더 마음을 넓게 쓰겠습니다. (...) 다시 한 번 오늘 일 사과드립니다.“ 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들이 없어 내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것인지 안 받아들인다는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하고 교무실에 왔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내 마음은 편해지지 않는다. 또 한 사나흘 지나야 오늘 일을 잊겠지.」 (235쪽)
「이번에는 교무부장이 “김 선생, 아까 담배 피우다 잡혀온 세 녀석을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 하기에 “글쎄요, 저야 뭐라 말할 수 있나요. 학생과에서 할 일이지. 담임으로서야 그저 봐달라는 얘기밖에 더 하겠어요?” 했다. 다른 선생들이 웃는다. 그래도 담임이라고 애들 편을 드느냐 그런 뜻이다.
할 수 없지. 선생 중 단 한 명이라도 그놈들 편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그놈들도 숨을 쉴 수가 있지. 오늘도 이렇게 마음을 잡자. 어쨌든 나는 녀석들 편이다. 그래야 한다.」 (213쪽)
녀석들은 좋게 끝난 이야기가 담긴 날의 일기 뿐 아니라 이런 날의 일기들도 다 읽고서 왔다. 그런데도 이 선생님 참 좋다고, 이런 선생님이 우리 선생님이면 좋겠다고, 이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다고들 했다. 녀석들이 이 책에서 읽어낸 김명길의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녀석들에게 무얼 보여준 것일까?
시시한 일상. 부대껴야 하는 현실. 크고 작은 사건들 사이에서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는 시도들. 때로는 길게 남고 때로는 짧게 잊혀지는 기억들. 고민과 후회들. 다짐들.
그 모든 것.
그의 삶.
2.
말에는 위대한 힘이 있지만 삶과 동떨어진 말은 그 힘을 잃는다. 청년 멘토들의 말이 그랬던 것처럼 힘을 잃은 말은 그저 덧없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결국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삶으로써 보여주어야 한다. 완벽한 삶을 보여주어 동경을 받으라는 뜻이 아니다. 동경이란 동일시의 감정이다. 이미 모든 이에게 주어진 현실이 다른데 그저 똑같이 되고자 하는 동경은 몰이해에 지나지 않는다. 삶으로써 보여주어야 하는 가르침은 내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전혀 스펙타클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나 자신이 어떻게 나의 믿음을 가지고 나의 삶을 구성해 가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로 하여금 자신을 동경하게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쉬는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다들 저마다 흩어져서 휴대픈을 들여다보고 있거나 수다를 떨고 있는데 문득 희진이가 한탄을 했다.
“선생님, 저 여기 올 때마다 너무 힘들어요.”
그렇게 수업이 재미없나 싶어 속이 뜨끔했다. 애써 내색하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왜? 책이 어려워?”
“아뇨. 그게 아니고, 책에서는 이렇게 학교에 문제가 많고 잘못된 부분도 많다고 배우잖아요. 근데 전 내일이면 다시 그 학교에 가야 된다고요. 이제 매일 학교에 갈 때마다 책에서 짚어준 문제들이 막 눈에 보이는데, 저는 그래도 계속 학교에 다녀야 되잖아요. 그게 너무 힘들어요.”
순간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곧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첫째는, 애초에 녀석들이 제 주변을 돌아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커리큘럼을 짰음에도 이런 일이 생길 가능성을 잊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였고, 둘째는, 나 역시 학생일 때 희진이와 똑같은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였다.
생각해보면 희진이는 꾸준히 그런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학교는 시끄러워야 한다』에서조차 희진이가 골라온 부분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달랐다.
“나는 ‘소 같은 아이, 상태’ 부분에서 주인공인 상태보다는 배경인 선도부가 더 인상 깊었다. 아버지의 평가를 들었기 때문일까, 그냥 더 주목되는 인물(단체)였다. 이 글의 배경은 1981년도이니, 학생인권은 없었을 거다. 역시 그래서 아버지는 참 많이 맞으셨다고 한다. 선생님들보다 더 많이 때리는 선도부였다고. 굉장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학생들끼리 계급이 나뉘고, 감시하며, 체벌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희진이의 『학교는 시끄러워야 한다』 감상문 중에서)
그 날, 희진이에게 정확히 무슨 말을 해주었는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체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하나 깊이 고민했던 기억은 난다. 까딱하면 무책임하고 의미 없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한 마디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내일이면 다시 학교를 가야하는 희진이, 어쨌거나 학교를 졸업한 자신. 그 간극을 어떻게 건너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분명 제대로 된 말을 해주지 못했으리라. 무언가 말했다 하더라도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으리라. 결국은 그 또한 삶과 같이 가는 말이어야 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엇을 가르칠까를 고민한다는 것 - 아이들에게 무엇을 전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이 어떻게 살고자 하는가를 고민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매 시간 수업을 준비할 때마다 그 사실을 곱씹게 되고, 막막함이 찾아온다. 그것은 일생에 걸쳐 던져야 하는 물음이 아닌가. 그 대답을 구하지 못하면 가르친다는 일은 영영 불가능한 것일까.
그 무게에 짓눌리면서 문득 떠올린 건 희진이와 같은 물음을 던졌던 시절, 그 때 나의 선생님들이었다. 하루하루 학교생활을 힘겨워하던 나에게 함께 고민해보자고, 함께 바꿔보자고 손을 내밀어주셨던 선생님들이 계셨다. 하지만 모든 일이 쉽지 않았다. 나와 친구들을 힘들게 하던 것은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대안학교조차 자유로울 수 없었던 입시 위주의 이 나라 교육 구조였다. 제 아무리 교사라고 해도, 아니 한낱 교사이기에 쉬이 바꿀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작은 성과들도 있었지만 아무리 고민하고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것들 역시 있었다. 그렇게 1년, 2년이 흘렀고 그 문제들을 뒤에 남겨둔 채 나는 학교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 내가 기억하는 고교 시절의 배움은 그 시절의 기억이 전부다.
그 때 선생님들은 우리를 제자 아닌 동료라고 불러주셨고 우리는 그 분들의 바로 곁에서 함께 말하고 일하면서 그 분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분들은 힘겨워하는 학생들을 보며 교사란 무엇인지 교육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으셨다. 멈추지 않는 그 분들의 고뇌 그 자체가, 교육이라는 것에 대한, 아이들을 대하는 그 삶의 태도가 내게 남은 고교 시절의 배움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가까스로 떠올렸던 것이다.
나는, 학교 교사가 아니다. 그래서 김명길이 그랬던 것처럼 녀석들과 일상을 길게 공유하면서 보충 수업비를 대신 내주거나 교사 회의에서 교칙과 맞설 수는 없다. 내가 녀석들은 만나는 건 일주일에 두 시간, 한 권의 책을 통해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 두 시간과 한 권의 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무엇을 전할 수 있는가를, 그를 위해 나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선생님들이 이미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 삶의 태도가 이미 가르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족하게나마 그것으로 나는 내 선생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녀석들의 선생이 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글_차명식(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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