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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차명식의 책 읽습니다

학교라는 ‘공간’ - 헤르만 헤세,『수레바퀴 아래서』

by 북드라망 2018. 7. 3.

용인 수지에 있는 문탁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20대 청년 차명식 님이 문탁넷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 함께 인문학 책을 읽었던 기록을 나누는 글입니다. 10대와 20대의 생각과 이야기가 한 권의 책을 소재로 엮어지는, 소중한 글입니다. 한 달에 한 번 매월 첫 주 화요일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학교라는 ‘공간’

헤르만 헤세,『수레바퀴 아래서』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필자의 말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0.   

“자, 이거 봐. 페이지 수로 들으면 많아 보이지만 두께도 요것밖에 안 되고, 그리고 책 모양 자체가 홀쭉한데다 여백도 많지? 그러니까 한 페이지 당 내용도 얼마 안 돼.”  




쉽게 읽어올 수 있는 분량이라고 열을 올려가며 광고를 해봤지만 다들 하나같이 표정이 시큰둥했다. 아무래도 영 약발이 듣질 않는 모양새다. ‘다음 주에 수업할 책은 집에 가서 생각할래요.’ 그런 꿍꿍이들이 훤히 다 보였다.

어쩌겠나, 이 이상 달리 할 말도 없는 걸. 결국 이쪽이 먼저 손을 들고 항복했다. 펼쳐들었던 책을 닫으면서 그대로 수업을 매조졌다.  


“좀 지루해보일수도 있겠지만 아주 유명한 소설이야. 너희랑 통하는 부분들도 꽤 있을 거고……그러니까 다들 빠짐없이 읽고 인상 깊은 부분을 골라오도록!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언제나처럼 마지막 인사할 때가 가장 힘차다. 제각기 짐을 주섬주섬 챙겨서는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서 총총걸음으로 하나 둘 교실을 빠져나간다. 마지막 녀석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닫았던 책을 도로 집어 올렸다. 솔직히, 중학생 때의 나였더라도 이 책이 썩 달갑게 보이지는 않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분량이 적어봐야 무얼할까. 인문학 공부에도 동영상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영상은 고사하고 사진 한 장 없는 책인걸. 게다가 고루한 어투하며 생소한 외국 이름들, 무엇보다도 ‘세계문학전집’이라는 타이틀부터가 숨이 막힐 수도 있겠지. 그래도 거짓말은 없다. 아주 유명한 소설인 것도 사실이고 읽다보면 자기들 이야기와 통하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걸 위해 짠 커리큘럼이고 그에 맞는 책들을 고르다가 정한 작품이니까.

올해 첫 시즌인 봄의 커리큘럼 테마는 ‘학교.’ 책 제목은, 헤르만 헤세 - 『수레바퀴 아래서』.   

 


1.   

『수레바퀴 아래서』는 약 1800년대 후반, 독일의 작은 시골에 사는 한스 기벤라트라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어릴 적부터 영특했던 한스는 주변 어른들, 특히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장차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간다. 그러나 신학교의 권위적인 분위기와 위선적인 태도는 소년을 숨 막히게 만들었고, 오직 예술가 기질이 다분한 친구 하일너와의 우정만이 한스의 숨통을 트여주었다. 그리고 그 하일너가 마침내 교장에게 맞서다 퇴학을 당함으로써 한스는 더 이상 신학교 생활을 버틸 힘을 잃고 만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한스는 기계공 일을 시작하지만 어린 시절과는 너무나 달라져버린 주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어릴 적 친숙하던 이들도, 낯익었던 거리의 모습도 사라지거나 변해버렸다. 그에 더해 마을 처녀 엠마와의 풋사랑마저 실패로 끝맺으면서 결국 한스는 그 해 가을밤 쓸쓸한 주검이 되어 발견된다.

 

사실 중학생들과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읽는 소설치고는 조금 지나치게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까지 고심했던 경쟁작(?)인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가 좀 더 나았을까도 싶다. 그쪽이었다면 좀 더 훈훈하고 따뜻한 분위기인 학교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었으리라.


다만 『사랑의 학교』 대신에 『수레바퀴 아래서』를 고른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었다. 아미치스가 그려낸 학교에는 근대 학교에 대한 일종의 로망이 드러나 있다. 『사랑의 학교』. 교사는 학생들에게 자긍심과 애국심을 설파하고, 학생은 그런 교사에게 존경을 표하며, 학생들 사이에는 서로간의 차이를 개의치 않는 공고한 유대가 존재한다. 당대 사회의 고단한 현실 속에서 학교는 굳건한 방파제가 되어 아이들을 길러낸다.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모판 위에서 아이들은 스폰지처럼 배움을 흡수함으로써 현실을 극복하고 박애를 실천할 수 있는 인간들로 성장한다. 그 안에는 국가가, 학부모가, 교사들이 꿈꾸는 학교의 이상향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러나 모델하우스를 보며 경탄하는 것과 그 집에서 몇 년을 실제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아닌가?


실제로, 그 아이들의 학교는 어떤 곳이었나? 실제로, 이 아이들에게 학교란 어떤 곳일까? 아미치스가 그리듯, 쿠오레Cuore(사랑)가 가득한 곳인가? 존경받는 교사와 사랑받는 학생이 있고, 넘쳐흐르는 우정으로 충만한 친구들과 함께하는 장소였나? 매일매일 성장하는 자신을 느끼며 고단한 현실을 이겨낼 힘을 키우는 안식처였나?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실 그건 아미치스도 마찬가지다. 만일 현실에 저와 같은 학교들이 많았다면, 아미치스가 구태여 글로써 저런 학교의 모습을 그려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므로.    





2.

그 다음 주 수업.

오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하는 녀석이 있었다. 정우다.   


“저 이런 내용 별로 안 좋아해요. 별로 재미없었어요.”   


하지만 숙련된 조교는 이런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는다. 쓰던 것을 놓고 차분히 되물었다.  


“왜?”

“주인공이 너무 안쓰럽게 살고, 불쌍하잖아요. 좋을 때는 별로 없고 계속 다른 사람들 시선만 의식하면서 살고…. 왜 그렇게 사는지 이해가 잘 안 갔어요.”

“저도요. 한스가 너무 불쌍했어요. 특히 자기 점수 떨어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같은 부분이요. 무슨 망상에 빠진 것도 같고…….”

“어른들이 다 한스를 제대로 봐주지 않았잖아요. 한스의 고통을요.”  


저마다 돌아가면서 한마디씩을 꺼낸다. 물론 다 똑같은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예 모르겠다며 팔짱을 끼고 입을 꾹 다문 녀석도 있고, ‘모세오경이 뭐에요?’하고 단어 같은 것을 물어오는 녀석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주인공인 한스의 삶이 너무 가여웠다는 이야기였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뭐가 한스의 삶을 그렇게 힘들게 했지?”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조심스럽게 하나 둘 입을 연다.   


“친구가 퇴학당한 거요. 그, 하일너요.”

“선생님이나 아빠의 기대감을 만족시키지 못한 거요.”

“얘는 그냥, 빚덩어리에 파묻혀서 산 것 같아요. 돈 말고 선생님들이랑 아버지의 기대, 학교 시험이랑 성적, 그런 빚덩이요. 정말 솔직히 말하면 한스는 죽는 게 나았다는 생각도 들어요. 더 이상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힘이 없었잖아요.”

“저는요. 이 부분이 인상 깊었어요. 262페이지요.”  


윤지가 책에서 자신이 골라온 부분을 읽어주었다.


「장례식에는 조합원이며 호기심에 가득 찬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한스 기벤라트는 또다시 유명인사가 되어 모두의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교사들과 교장선생, 마을 목사도 그의 운명에 동참했다. 그들 모두는 프록코트를 입고, 장중한 비단 모자를 쓴 채 장례 행렬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를 속삭이며 잠시 무덤가에 서 있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라틴어 선생이 한층 더 우울해보였다. 교장선생은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래요, 선생님. 저 아이는 훌륭하게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뛰어난 아이들이 도리어 불운을 맞게 된다는 건 정말이지 슬픈 일이지요!”」 (262p)

 

“왜 이 부분이 인상 깊었어?”

“한스가 살아있을 때에도 계속 기대하고 죽은 다음에도 기대했었다고 하잖아요. 그럼 한스가 살아있을 때 더 잘 봐줬어야지 왜 죽은 다음에 아쉬워하는지 마음에 안 들어요. 학교 선생님들한테도 다 책임이 있잖아요.”


다들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확실히 비슷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다들 이야기가 모아져서 말문이 트였을 때가 보통 슬슬 준비해왔던 질문을 던질 시점이다. 막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여태껏 팔짱끼고 뒤에 앉아있던 녀석 하나가 퉁명스레 내뱉었다. 중학교 3학년인 우석이다.   


“우리 학교는 안 이래요.”  


평소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다가 뜬금없이 툭툭 개그를 쳐 아이들을 웃기는 게 장기인 녀석인데, 오늘은 웬일로 처음부터 퍽 진지한 말투였다. 나는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 너희 학교는 어떤데?”

“우리 학교는요. 그냥 보통 학교지만요. 애들도 선생님들도 다 공부만 위해 학교를 다닌다는 생각 같은 건 안 해요. 난 이게 마음에 들어요.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공부만 시키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활동을 하거든요.”  


그러더니 팔짱을 풀고는 가만히 책을 노려본다.   


“기술가정 시간에 선생님이 그랬는데, 우리가 일상생활이랑 집에서 배우는 단어가 1000개라고 치면 학교에서 공부로 배우는 단어는 30개 정도밖에 안 된대요. 하버드에서 다섯 살부터 열 세 살짜리들 연구하니까 그렇게 나왔대요. 그러면서 선생님이 우리가 학교를 다니는 건 친구들이랑 즐겁게 놀기 위한 거랬고요. 한스네 학교랑은 달라요.”  


침묵.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 잠시 뜸을 들였다가, 녀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 학교를 친구 만날려구 다녀요. 다들 그런 거 아녜요?”



3.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의 유년 시절을 담은 자전적인 이야기로 평가받는다. 한스가 그랬던 것처럼 헤세도 어려서 신학교에 들어갔고, 한스가 그랬던 것처럼 신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쫓겨났으며, 한스가 그랬던 것처럼 견습공과 서점 직원 등을 전전하다가 자살을 기도했다.


그런 헤세가 그리는 학교의 모습은 우리가 학교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부정적인 면모들로 가득하다. 학생들은 권위와 규율, 인습에 짓눌리고, 교사들은 오직 학생들의 학습적 성취에만 관심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오직 관리 대상일 뿐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학생에 대한 존중도 보이지 않는다. 작중 한스는 모범생으로서 여러 교사들에게 애지중지 받는 존재였지만 아이들이 지적했듯 그의 내면을 이해코자 한 교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헤세가 그리는 학교는 일상의 삶과 대립하는 공간으로서 드러난다. 학교에서는 모세오경과 호메로스의 시를 가르칠지언정 누군가와 평범히 말하고, 친구를 사귀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하고, 연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고매한 지식의 상아탑은 시시한 일상의 삶과는 유리된 별천지인 것이다. 권위, 규율, 지식, 이성, 순종. 이러한 학교의 미덕들에 어긋나는 것들은 자동적으로 배제된다. 격정적이면서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그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한스의 친구 하일너가 퇴학당한 것처럼.


그 별천지에서 한스 기벤라트, 혹은 헤세는 조금씩 생명력을 잃어간다. 오히려 그에게 구원의 계기가 될 수도 있었던 시기는 그런 학교를 떠나 다시 그가 살던 거리로 돌아왔을 때였다. 학교와는 대립되는 공간 - 시내의 거리에서 한스는 처음으로 풋사랑을 깨닫고 노동의 기쁨을 맛본다. 일상과, 보다 진정한 의미의 ‘삶’과 맞닥뜨린 것이다.

 

한스는 자신이 하일브론의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제 막 눈뜨기 시작한 남성다운 혈기가 그저 낯설고, 초조하고, 피곤하기만 한 상태로 어렴풋이 이해될 뿐이었다. (...) 자신의 죽음을 부르는 나뭇가지에 추파를 던질 때만 해도 한스는 작별을 고하는 자의 애절한 우월감을 가지고, 지금과 다름없는 사람들과 사물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시금 과거로 되돌아와 놀라움에 미소 지으며 잃었던 현실을 되찾은 것이다.(215p)

 

「한스는 정신을 가다듬고, 열심히 일을 계속해 나갔다. 소년 시절의 장난기어린 놀이를 그만둔 뒤로 이제껏 무엇인가 눈에 드러나는 유익한 물건을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기쁨을 맛본 적이 없었다. (...) 한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동의 찬가를 듣고 또 이해했다. 그것은 적어도 초보자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고, 산뜻한 매력을 풍기는 것이었다. 한스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존재와 인생이 커다란 선율에 어우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238 - 239p)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학교 밖에서 배운다.’


대표적인 학교제도 비판자 이반 일리치의 이 강렬한 테제는 처음 들을 때에는 어색할지 몰라도 두어 번 곱씹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를 일깨운다.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사랑하는 것, 느끼고, 놀고, 저주하고, 정치하고, 일하는 것! 그 모든 것을 우리는 교과서와 교사를 통해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소 6년에서 최대 십 수 년에 이르는 학교 교육을 통해 배운 것들 중 얼마만큼이나 이후의 우리 삶에 사용하던가? 신입사원들이 도통 일머리가 없다며, 대체 대학교에서는 무얼 가르치는 거냐는 인사담당자들의 한탄은 더 이상 새롭지도 않다.


한스 기벤라트는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그의 몸과 마음은 그 새로운 만남을 쫓아가기에는 너무 지쳐있었다. 결국 그 때문에 그는 첫 번째 풋사랑이 실패로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래성처럼 스러지고 만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다. 넌지시 물어볼 생각이었다. 아이들에게 ‘너희에게 학교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져, ‘학교에서 너희가 배우는 것은 무엇이냐’를 거쳐, 이와 같은 이야기로 이끌어갈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학교는 안 이래요.’로 시작된 녀석의 당돌한 대꾸는 나에게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여지를 주었다.   

 


4.   

수업이 끝나갈 즈음 나는 아이들에게 ‘나에게 학교란 무엇인가’를 가지고 짧은 글을 써볼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뒤에도 곧바로 돌아가는 대신 아이들의 글을 읽었다. 그 중 문득 지아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학교란 공부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게만 말할 수 없다는 의견에 동감한다. 이야기하면서 나왔듯이 학교에서 우린 인간관계도 맺고 공부 밖의 여러 가지를 한다. 학교에선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닌데 왜 학교라 하면 공부가 떠오르고 칠판이 떠오르고 교과서가 떠오를까. 내가 하루에 친구와 문자가 아닌 직접 얼굴을 보며 잡담을 나누는 70%는 학교에 있다. 그밖에 내가 친구와 노는 것도 학교가 대부분이고. 물론 공부도 거의 학교에서밖에 안하지만 공부 이외의 많은 것들은 난 학교에서 한다.” (지아의 ‘수레바퀴 아래서’ 감상문 중에서)

 

아이들은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그만큼 학교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어울린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학교는 아이들에게 일상의 커다란 조각이었고 가족 외의 수많은 타인들과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최초의 공간이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가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못하는 것은 많지만,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들을 스스로 배운다. 아이들은 교사 혹은 친구들을 통해 자신과 다른 생각,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을 대하는 수많은 순간들을 마주한다. 그 과정에서 대화하는 것, 생각하는 것, 사랑하는 것, 느끼고 놀고 정치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오롯이 배워나간다. 오늘날 예전에 비해 학교별로 학생의 생활수준이나 문화가 획일화된 경향이 나타나면서 아이들 사이에 차이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아지긴 했으나 최초로 타자와 마주하는 공간이라는 학교의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자, 다시 질문하자. 학교란 무얼 하는 곳일까? ‘공부하는 곳’이라는 대답이 가장 먼저라 해도 ‘친구를 만나러 가는 곳’도 결코 틀린 대답은 아니다. 이미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학교를 만난다. 오직 ‘공부하는 곳’으로서의 학교의 엄숙하고 권위적인 얼굴 조금씩 학원으로, 독서실로 빠져나간다. 아이들은 여전히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그 긴 시간 속의 틈새들은 조금씩 늘어간다. 누군가는 그를 ‘공교육의 붕괴’라 부르고, 또 많은 교사들이 학교가 역할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나, 글쎄. 문제는 그 빈틈을 낡은 방식으로 덕지덕지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새롭게 채울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언젠가 나에게 다시 한 번 이 책으로 수업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정우와 우석이, 지아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말하고 싶다. 학교가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며 너희들을 책상에만 잡아두려고 할 때. 또 연애 금지라든가 성적 우열반 따위로 너희들을 갈라놓으려고 할 때. 학교에서 어떤 친구와 어울리는 게 좋고 어떤 친구와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 그럴 때마다 너희의 학교를 ‘공부하러 오는 곳’이 아닌 ‘알지 못했던 새로운 친구를 만나러 오는 곳’이라고 생각해보라고. 그 새 친구와 말하고, 놀고, 싸우고, 힘을 합쳐 무언가를 해내러 오는 곳이라고 상상해보라고. 그렇게 학교를 사용하라고.


어쩌면 바로 그 순간에야 학교는 아이들에게 있어 진정한 삶의 현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다소 난잡한 모습이 될지라도, 적어도 그 어지러운 모습이 이상 속의 사랑의 학교보다는 장차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들과 훨씬 닮아 있으리라. 


글_차명식(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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