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이라는 ‘일’
다니엘 페낙, 『학교의 슬픔』
필자의 말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수업 시간에 아이들은 나를 보통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좀 익숙해졌다 싶은 녀석들은 쌤. 딱히 그리 부르라 말한 적은 없지만 어느 사이엔가 다들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아마 녀석들이 느끼기에 이 시간은 책을 읽고 덤으로 이것저것 배워가는 시간 정도일 테고, 그것들을 가르쳐주는 나는 자동적으로 선생님이 된 것이리라. 그러니까 녀석들에게 선생이란 곧 가르쳐주는 사람인 셈이다.
헌데 때때로 드는 의문은 과연 선생에 대한 녀석들의 정의가 합당한가 하는 점이다. 수업 시간을 되돌아보면, 나는 아이들과 시시한 잡담과 인사를 나누고, 책에 대한 느낌과 인상 깊게 읽은 부분 그리고 그 까닭을 나눈다. 책 속의 질문들을 좀 더 확장시켜서 아이들에게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대단한 이론이나 획기적인 독서 테크닉 같은 것을 전수해주는 것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씩 만나 이렇게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것이 내가 녀석들과 하는 일의 전부다. 그럼에도 무언가 가르쳐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녀석들의 선생님, 교사일 수 있을까?
물론 교사란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교육제도가 교사에게 요구하는 것은 관리자로서의 역할이다. 일찍이 미셸 푸코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을 통해 학교가 학생들을 훈육하고 통제하는 기술에 대하여 논하였다. 그에 따르면 학교는 줄지어 늘어선 책상, 촘촘히 짜인 시간표, 반복적인 시험과 피드백 등을 통해 학생들이 특정한 규율에 익숙해지도록 훈련시키는 공간이다. 교사는 이 과정 속에서 관리자이자 평가자,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 오늘날에는 특히 학생의 더욱 세밀한 면면까지 관리하도록 요구받는다. 즉, 오늘날 교사(적어도 학교 교사)는 학생에게 교육과정이 요구하는 지식에 더하여 사회적 규범과 가치관에 대한 지식을 전수하고 학생 개인의 일상까지 관리하는 자여야 하며, 또한 그를 위한 기술을 갖춘 전문가여야 한다.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학생들을 교화해내는 의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해낼수록 유능한 교사이다.
한편 학생은 국가가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를 받는 ‘고객’인 동시에 의무적인 교육 제도를 필수적으로 이수해야하는 ‘관리대상’이다. 학생의 정체성에는 ‘공교육 서비스의 소비자로서의 권리’와 ‘훈육 대상으로서의 의무’가 미묘하게 뒤섞여 있다. 결국 교사는 학생과 이중적인 긴장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교육제도의 요구에 등을 떠밀려 학생들을 관리하려 할 때 학생들의 저항에 직면하고, 학생들이 소비자로서 권리를 행사하려 할 때 그들의 냉엄한 평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교실을 장악하리란 야망에 차 있던 교사는 늦든 빠르든 좌절에 맞닥뜨린다.
「어떤 동료들은 자신이 카라얀인 줄 알고 시골의 마을 합창단 지휘를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그들은 모두 베를린 필을 꿈꾸죠. 이해가 가는 일이에요.」 (학교의 슬픔, 162p)
결국 교사들은 저 두 개의 위태로운 다리 사이 어딘가에서 각자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와는 다른 길을 걷는 교사와 다시 충돌을 빚고, 수많은 학생들과 대면하면서 겪는 다채로운 사건들에 의해 기껏 정한 길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한 노(老) 교사가 있다.
그도 모든 교사들이 겪는 고통을 겪어왔으며, 여전히 겪고 있다. 그의 수십 년 간의 교직 생활은 결코 끝나지 않는 고뇌의 연속이었다. 그의 일은 사람을 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그 고뇌 속에서 한 가지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선생으로서, 어떻게 학생을 만날 것인가?
아마도 그 대답이 ‘교사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에 대한 또 다른 답이 되리라. 그를 알기 위해 나는 그 늙은 교사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아이들과 읽을 두 번째 책으로, 늙은 교사 다니엘 페낙의 『학교의 슬픔』을 택했다.
1.
페낙은 『학교의 슬픔』을 통하여 학창 시절 자신이 구제불능의 열등생이었음을 고백한다. 그 때문일까. 자신의 교직생활에 대한 그의 회고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 학교로 인하여 고통 받는 열등생들과의 만남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다. 어떻게 그 아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는가? 어떻게 그 아이들의 고통을 ‘치유’할 것인가?
수많은 에피소드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결론부에서 그가 내린 답은, 뭐랄까, 읽는 이에게 얼떨떨한 느낌을 안긴다. 노련한 교사가 된 그는 열등생이었던 시절의 자신과 마주한다. 열등생 페낙은 교사 페낙에게 일갈한다. “교사들은 열등생을 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런 주제에 아이들한테 어설픈 감정이입을 할 뿐이다.” 그들은 날선 대화로 서로를 할퀴며 답으로 향한다. 이렇게.
「“사회복지사가 왜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느냐고 물어볼 때 열등생이 뭐라고 대답하는지 알아? 정확히 선생님들과 똑같이 얘기를 하지. ‘그것’, ‘그것’말이야! 학교는 나한테 맞지 않아요. 나는 ‘그것’에 안 맞아요. 바로 이렇게 대답한다고. 그 아이 역시 자기도 모르게 무지와 앎 사이의 끔찍한 충격에 대해 말하는 거야. 선생님들의 ‘그것’과 동일한 ‘그것.’ 학생들은 자기들이 학교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선생님들은 그런 학생들은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양쪽 모두 똑같이 ‘그것’을 말하는 거야!”
“감정이입을 치워버리면 ‘그것’은 어떻게 치유하지?”
여기서 그는 엄청 주저한다.
(...)
“‘감정이입’보다 더해?”
“비교도 안 되지. 네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아니 대학이나 그 비슷한 곳에서는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야.”
“뭔데? 해봐.”
“아니. 정말이지 못하겠어…….”
“자, 어서!”
“난 못한다니까! 교육을 말하면서 이 말을 내뱉었다간 넌 린치 당할 거야.”
“…….”
“…….”
“…….”
“사랑.”」 (학교의 슬픔, 366 ~ 367p)
이 대답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문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그렇게 이야기를 질질 끌어놓고 내놓은 대답이 겨우 ‘사랑’이라고?”, 다른 하나는 “왜 교육에서 사랑을 말하는데 린치를 당한다는 거야?” 그리고 이 질문들은 서로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페낙이 기나긴 이야기 끝에 사랑이라는 답에 이른 이유는 교육에 있어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교육에서 사랑을 말했을 때 린치를 당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교육의 전문가가 담기에는 너무나 뻔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교사 생활을 막 시작한 젊은 교사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 어려움을 겪다가 늙은 교사에게 조언을 요청했다고 상상해보자. 그 때 늙은 교사가 ‘사랑으로 아이들을 만나라’고 조언해준다면, 단지 그 뿐이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하면서도 실망할 것이다. ‘그런 뻔한 대답이나 듣고자 조언을 구한 게 아닌데.’ 통계 자료와 아동 발달 이론, 심리학에 근거한 대화 테크닉, 각종 상담 지원 제도 따위에 비하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도무지 교육 전문가가 쓸 법한 단어가 못 된다. 심지어 아이들조차도 과연 사랑이 답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학생들은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치유를 받아야 하고 학생들도 사랑으로 선생님들을 대하면 된다고 작가는 말하지만 (...)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도 사랑으로만 해결해나갈 수 있을지 의문점이 생긴다.” (우석이의 『학교의 슬픔』 감상문 중에서)
나는 우석이의 질문에 대해 무언가 대답해야 했다. 사랑으로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고 인정해야 할까? 그건 쉬운 대답이고 틀린 대답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대답을 썼다.
“사랑, 우정, 희망, 꿈. 때때로 사람들이 이러한 단어들에 넌더리를 내는 이유는 그것들이 추하거나 싫어서가 아닙니다. 그것들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거대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것들로부터 현실감을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고, 영영 닿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쓰는 사람들에 따라 제각기 뜻이 왜곡되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일들을 얼버무리는데 쓰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단어를 논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를 아주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그 의미를 다른 사람들에게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삶 속에서 현실 속에서 우리 손에 닿고 느낄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석이의 감상문에 단 답글 중에서)
그리고 페낙은 그가 말하는 ‘사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해마다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나란히 나있는 투명 유리창에 속아 꽤 많은 제비가 천장 유리에 머리를 찧는 것이다. 퍽! 기절해 카펫 위로 떨어진다. 그러면 (...) 몸을 일으켜 손바닥을 오므린 채 기절한 제비를 감싸 안고 다시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제 친구들 쪽으로 날려 보낸다. 부활한 새는 아직 좀 비틀거리긴 하지만 되찾은 허공 속을 지그재그로 날아오른다. 그리고 남쪽을 향해 돌진해 자신의 미래 속으로 사라진다.
나의 이런 메타포가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교육에 있어서의 사랑은 우리 학생들이 미친 새처럼 날아갈 때와 비슷하다. 날개가 부러진 제비 떼를 학교생활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일.」 (학교의 슬픔, 369-371p)
다니엘 페낙이라는 교사는 꿈에만 젖은 이상론자도 허울 좋은 말만 떠들어대는 위선자도 아니다. 그는 오늘날 학생들이 일찌감치 소비자로서 길러지는 현실을 이해한다. 젊은 교사들이 ‘교육 전문가’ 역할만으로도 힘겨워하며 더 많은 전문적인 지원을 요구하는 현실을 이해한다. 파리 중심가의 학교들에서 점점 더 유색인 학생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을 이해한다. 제각기 다른 현실에 처해있는 학생들이 존재하며 그 모든 학생들이 도구화되고 있는 현실을 이해한다. 무엇보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라’는 말이 공허하게 울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그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2.
한 사람의 말은 결코 그 사람의 삶을 넘어설 수 없다. 다니엘 페낙은 성인聖人으로 살지도 않았고 혁명가로 살지도 않았다. 아이들을 사랑하고자 했지만 성인의 무제한적인 사랑을 베풀 수는 없었고, 학교라는 공간의 통제 기능과 구속력을 이해했지만 공간 그 자체를 개변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단지 교사다. 작가이기도 하지만, 결국 단지 교사일 뿐이다.
「내 직업의 일부는 스스로를 가장 많이 포기해버린 ‘내’ 학생들을 설득해, 따귀보다는 정중한 대우가 더 영향력 있는 반성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믿게 하는 것이었다. 공동생활에는 구속이 따른다는 것, 숙제 검사의 시간과 날짜는 협상할 수 없다는 것, 날림으로 한 숙제는 다음날 다시 해야 한다는 것 (...) 나와 내 동료들은 절대 그들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득시키는 것이었다.」 (학교의 슬픔, 206p)
그는 자신이 교사로서의 일을 해왔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들이 학교라는 공간의 규율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생활 규칙들, 시간표, 숙제, 시험이 아이들의 몸에 밸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관리자로서의 교사의 직무에 충실했다고.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다만 한 가지를 누락시키고 있다. 교사로서의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그가 했던 일. 해야만 했던 일.
아이들과 교신하기 위해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는 일.
아마도 그곳이 틈새였을 것이다. 직무와 일상의, 일과 삶의, 공과 사의 틈바구니. 그의 사랑은 그 자리에서 움텄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직무와 일상 사이에, 일과 삶 사이에,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선을 그으려 한다. 우리 스스로도 그러길 바라고, 주위에서도 그것을 권장한다. 헌데 이 분할 구도에서 교사의 위치는 지극히 애매하다. 교사는 직무로서 지극히 공적으로 공정하게 아이들을 감시하고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살펴야 하는 관리자로서 아이들과 밀접한 인간관계를, 일반적으로는 일상의 영역이자 삶의 영역이고 사적인 영역의 관계를 형성할 것을 주문받는다. 교육 제도는 이 두 가지를 끊임없이 통합, 재편하려 시도해왔으며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완벽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여전히 많은 교사들이 그 틈바구니에서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 증거다.
선생으로서, 어떻게 학생을 만날 것인가?
기절한 제비를 되살려 보내는 페낙의 사랑이 그 사이 어디쯤 위치하는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일평생 수많은 문들을 두드리며 아이들과 교신하려 했을 그, 수많은 제비들을 다시 깨워 하늘 저편으로 날려 보냈을 그의 목소리는 그 경계선 자체를 흐트러트리고 균열을 불러일으키는 장중한 울림이다. 아마 페낙 그 자신도 확실한 대답을 돌려주지 못하리라. 그래서 그는 그 행위들을, 자신이 쌓아온 시간들을 사랑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만나야 할지 그 정답을 알지 못한다. 실제로 어떤 만남이 될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도, 문이 영영 닫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또다시 두드린다. 그것이 전부다.
「때로는 길을 따라가는데 실패하고, 몇몇은 다시 깨어나지 못해 카펫에 그대로 남아 있거나 다음번 유리창에 목이 부러지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은 제비들을 묻어준 정원의 깊숙한 구덩이처럼 우리 의식 속에 회한의 구멍을 남긴다. 하지만 매번 노력하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학생이니까. 이 아이 혹은 저 아이에 대한 호감이나 반감(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인 문제이긴 하지만!)의 문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에 대한 우리 감정의 정도를 말한다는 건 너무 쉽다……. 지금 문제가 되는 사랑은 그런 게 아니다. 기절한 제비는 되살려야 하는 제비일 뿐이다. 그 뿐이다.」 (학교의 슬픔, 371p)
3.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학교 선생님이 아니다. 일주일 한 번, 단 두 시간 아이들과 만나 대화할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페낙이 그랬듯 몇 번이고 녀석들의 문을 두드릴 준비가 되어 있을까?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녀석들의 선생님일 수 있을까?
글_차명식(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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