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라는 ‘평등’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필자의 말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학교’를 다루었던 봄 시즌을 마칠 즈음 나는 그간 던진 질문들을 되돌아보았다. “선생은 어떻게 아이들과 만나야 하는가.” “학교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아이들은 학교를 왜 가는가.” 새삼 아이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싶었다. 분명 밑도 끝도 없는 물음으로 느껴졌으리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근본적인 것을 건드리는 질문들은 대개 그러하다. 당혹스러움과 곤란함,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한 가지 질문이 더 남아있다. 그것은 앞선 질문들을 모두 아우르는 질문이며, 그럼으로써 교육에 있어 가장 ‘극단적’인 담론들을 만들어낸 질문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그 질문으로부터 학교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상상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 질문으로부터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 스승을 주장했다.
그 질문이란 이것이다 - “배우려는 자는, 의존적이어야 하는가?”
존 테일러 개토가 『바보 만들기』를 통해 학교를 성토한 가장 큰 까닭은 아이들을 수동적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는 촘촘히 짜인 시간표, 정해진 커리큘럼, 반복되는 평가와 피드백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스스로 해 나갈 힘을 앗아간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대해 누군가는 반드시 반문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아이들에는 그럴만한 능력이 부족한걸요.” 아이들에게는 자신의 공부를 직접 구성할만한 능력이 없다는 의미다. 학교 교육은 그런 아이들을 ‘돕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마련해준다. 아직 미성숙하고, 무력한 아이들을 위해.
이 반문에는 설득력이 있다. 어느 수준의 도움이 필요한가에는 의견 차가 있을지언정 아이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의 진실처럼 보인다. 아니, 아이들만이 아니다. 뒤늦은 공부에 나선 만학도, 토익토플 점수가 절실한 대학생, 옷 만들기에 관심을 갖게 된 주부. 나이와 상관없이 배우려는 자들에게는 도움이 - 기댈 곳이 필요한 것이다. 교육 제도에 기대고, 교육 기관에 기대고, 교사에게 기댄다. 과연 누가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겠는가? 어지간히 대담한 이가 아니고서야 교육은 근본적으로 배우려는 자가 의존할 곳을 찾는 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1.
물론 그처럼 ‘어지간히 대담한 이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애초에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교육의 본질처럼 보이는 그 의존성이 지극히 불평등한 관계를 생산한다는 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 중 하나가 자크 랑시에르라는 사람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우리가 상상하는 소위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반드시 지적인 우열 관계가 깔려 있음을 말한다. 제자에게 무언가를 잘 설명하고, 잘 이해시키고, 그러한 열망과 의지와 선의에 불타는 스승일수록 제자를 “지능의 세계에 세워진 위계”에 옭아 넣고, “누군가 그에게 설명해주지 않으면 자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만든다. 랑시에르는 그러한 사제 관계를, 가르쳐 줄 자를 찾지 못하면 스스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바보 만들기’의 교육을 배격했다. 그에 따르면 스승이란 무언가 특정한 지식을 전달하는 자가 아니라 단지 제자로 하여금 배우려는 의지를 갖게 하는 자이다.
“해방하지 않고 가르치는 자는 바보를 만든다. 그리고 해방하는 자는 해방된 자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걱정할 일이 없다. 해방된 자는 그가 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어쩌면 아무 것도 배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기술을 가지고 만들어낸 모든 생산물에는 똑같은 지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 무언가를 배우라, 그리고 그것을 이 원리,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과 연결하라.” (41-42p)
랑시에르가 말하는 진정한 배움이란 무언가를 스스로 배우고 그 배움을 평등의 원리 아래 다른 것들과 연결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런 배움이야말로 평범한 이가 자신의 존엄함과 지적인 능력, 그 능력의 결정권을 깨닫는 진정한 ‘지적 해방’이자, ‘보편적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배움을 행하는 스승은 풍부한 지식이나 유능한 교수법을 갖춘 자가 아니다. 그는 무지하며, 앎을 주입하는 자가 아닌 배움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자. 그럼으로써 교육의 지적 불평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다. 그런 스승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것마저 제자들이 배우도록 만드는 힘을 갖는다. 랑시에르는 그를 ‘무지한 스승’이라 부르고, 프랑스의 교사 ‘조제프 자코토’의 일화를 통해 그것을 설명한다.
조제프 자코토는 프랑스의 저명한 교수로서 네덜란드 왕의 초청을 받아 네덜란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헌데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네덜란드 학생들 대부분이 프랑스어를 몰랐고 자코토 역시 네덜란드어를 몰랐다. 학생들과 자코토 사이에는 통하는 언어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자코토는 학생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고, 마침 그즈음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으로 출간된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책을 교재로 정했다.
자코토는 통역자를 시켜 학생들에게 그 책에 실린 네덜란드어 번역문을 가지고 프랑스어 텍스트를 공부하도록 했다. 학생들이 제 1장의 절반 정도를 읽어낸 후에, 그는 그들로 하여금 익힌 내용을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그 외 나머지 부분은 이야기 할 수 있을 만큼만 읽도록 했다. 그 지시 외에 자코토가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프랑스어의 가장 기본적인 문법조차 설명해주지 않았다. 학생들은 그러한 자코토의 ‘방치(?)’ 속에서 마치 아기가 모국어를 배울 때처럼 스스로 프랑스어를 익혀나갔다. 자신들이 아는 단어에 상응하는 프랑스어 단어와 그 단어들의 형태 변환을 스스로 찾아냈고, 자기들끼리 단어를 조합해 프랑스어 문장을 만드는 법도 배웠다. 그들의 문장과 맞춤법은 점점 더 정확해져 곧 작가 수준에 이르렀다. 마치 한국에서 그토록 많은 영어 교육을 받아도 영어를 익히지 못하던 사람이 외국에 나가 살게 되면서 스스로 빠르게 영어를 익혀나가듯, 그들은 자코토의 배움을 받고 싶다는 일념 하에 스스로 프랑스어를 깨쳤다. 자코토가 한 일은 아주 짧은 지시뿐이었다.
“관찰하기, 기억에 담아두기, 되풀이하기, 검증하기, 알려고 하는 것과 이미 아는 것을 연관시키기, 행하기, 행한 것에 대해 반성하기 (...) 어떤 인간의 말이 그들에게 전달되고, 그들은 그 말을 분간하고, 그것에 답하고 싶어한다. 학생이나 식자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마치 당신을 시험하는 자에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말을 건네는 누군가에게 대답하는 것처럼. 평등의 징표 아래.” (27p)
랑시에르는 이처럼 교육의 의존성에 대한 물음을 던짐으로써 교육의 가장 근본적인 영역에 도전한다. 지식을 가르치지 않는 스승이라는 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시도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들이 그를 통해 일궈내려 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온당한 것으로 들린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평등. 정말이지 당연한 것으로 들리고, 어느 사이엔가 이미 이룩된 것처럼 받아들였던 그 평등이 이토록 대담한 시도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그 놀라움만이 우리 곁에 남는다.
그리고 나는 문득, 그 놀라움 속에서 지금 나와 녀석들이 서 있는 자리를 찾아본다.
나와 아이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돌아본다.
2.
‘학교’를 주제로 한 봄 시즌을 마치고 다음 시즌을 준비할 때쯤 나는 이따금씩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는 거 아냐?’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뜻밖이었다. 그동안 내가 수업한 일 자체가 그리 많지 않거니와 온전히 1년 치 수업 전체를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들 순수하게 좋은 뜻에서 그런 말을 건넨 것이었고 나는 가볍게 웃으며 ‘에이, 이제 시작인데 아직 모르죠’ 하고 대답하곤 했다. 그런데 내가 가르치는데 재능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잘 가르친다는 것을 무엇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을까?
학교나 학원교사에게는 성적이라는 명확한 지표가 있다. 10점이든 100점이든 성적이 올라가면 잘 가르친 것이다. 지극히 객관적이고 정확한(적어도 그렇게 믿어지는) 수치화된 기준이 그들이 지닌 가르침의 능력을 증명한다. 헌데 내가 ‘가르치는’ 것들은 어떤가. 신학교에서 쫓겨난 소년의 이야기, 늙은 교사들의 수기, 학교가 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는 바보들을 만들어낸다는 비판. 어지간한 괴짜 교사가 내는 시험이 아닌 이상에야 시험지에서 그런 것들을 볼 기회는 없다고 생각해도 좋으리라. 그렇다면 누군가 내게 교육의 증거를 요구했을 때 나와 아이들은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내가 정말로 교육을 하긴 한 것인지 의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당당하다. 나는 물론 아이들을 가르쳤다. 단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식으로는 하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녀석들과 함께 읽은 책을 가지고 시험 문제를 내거나 성적을 매길 필요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덕분에 나는 선생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녀석들의 머리에 지식을 밀어 넣으려 용을 쓰지 않아도 되고, 녀석들은 숫자 몇 개에 일회일비하면서 내게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 것 없이도 우리들 사이에는 배움이 오가고, 우리는 흐릿하게나마 학교가 아닌 곳에서도 배움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나와 녀석들은 ‘평등’한가?
사실, 시험과 성적 없이도 내가 ‘가르치는데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설명하는 재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역사적 사건이 나올 때면 나는 금방 녀석들에게 익숙할 법한 예시를 찾아낸다. 그리고는 가장 쉬운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예시를 들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서는 녀석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법한 언어로 그 개념을 풀어낸다. 미리 준비할 때도 있었고 즉석에서 할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때로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나는 그 때마다 작은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랑시에르에 따르면, 나는 그 때마다 녀석들과 나 사이의 지적인 위계를 강화하고 있었던 셈이다. 과민한 지적이라 코웃음 치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지적에 분명 진실이 담겨 있음을 안다. 한 번이라도 그런 방식으로 녀석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고 나면 쉽게 그 방식을 버리기 어렵다. 그 뒤로 녀석들은 이해하기 힘든 무언가를 맞닥뜨릴 때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침묵을 지키면서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곤 했던 것이다. 어쩌면 시험도 성적도 없는 이 수업에서 아이들이 순순히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적 우열로 만들어낸 권위. 이해시키는 자, 설명하는 자의 권위. 문득 두려움도 더해진다. 아이들이 나와 헤어진 뒤에도 계속해서 설명해줄 누군가를 찾지 않을까 하는. 아이들 스스로 자신 안의 지적 능력을 인지하고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한 힘을 얻는 것을 내가 방해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리는 학교 밖의 틈새에서, 제도에 기대지 않고 성적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수업한다. 그러나 나는 무지한 스승은 되지 못한 채, 아이들로 하여금 보편적 가르침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지는 못했다. 우리의 수업에서 녀석들과 나는 평등하지 않다. 그것을 깨달았지만, 나는 그를 극복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다.
3.
설명하기를 잘하고 좋아하는 나지만 어느 순간엔가 항상 아이들에게 설명하기를 멈추는 지점이 있다. 무언가에 대하여 가치판단을 할 때다. 나는 결코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단정 짓지 않는다.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내 능력을 통해 상반되는 입장들을 치우치지 않고 최대한 녀석들에게 전달하려 애를 쓴다. 완벽하게 옳은 것처럼 보이는 입장 속에 존재하는 모순과 한계를 짚어주고, 완벽하게 틀린 것처럼 보이는 입장 속에서 녀석들이 공감할만한 주장을 짚어낸다. 그 뒤에 녀석들에게 묻는다. “자, 너희는 어느 쪽이, 왜 옳다고 생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한쪽의 편을 들어주는 녀석이 있다. 또 양쪽 다 옳은 것 같다고 두 손을 들어버리는 녀석도 있고, 왜 이렇게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시냐며 우는 소리를 하는 녀석도 있다. 나는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뒤에도 끝끝내 무엇이 옳다 그르다 정해주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너희들은 스스로 답을 낼 수 있게 될 거고, 답을 내야만 하는 상황이 닥쳐올 거라고. 너희가 앞으로 만날 사람들과 겪을 경험들과 배울 공부가 그 답을 만들어낼 거라고. 그리고 그 과정이 바로, 너희 각자를, 너희라는 사람들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이다. 또한 그것은 내가 거쳐 온 길이기도 하다. 한 때는 흑백처럼 너무나도 확실해 보였던 옳고 그름이 회색이 되고, 연회색과 진회색이 되고, 흑백이 뒤바뀌기도 한다. 분수령이 닥쳐오는 그 순간까지도 결정은 매번 쉽지 않다. 그것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 세상을 대면하는 일, 삶의 어려움이다.
그 어려움은 만인에게 동등하다. 상반된 입장을 녀석들에게 풀어 설명해주는 순간에조차 나 역시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고민하고 자문한다.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 순간, 이렇게 끝내도 괜찮은 걸까 찝찝한 기분이 슬며시 올라오는 그 순간은 녀석들이 오늘의 질문을 간직하다가 언젠가는 자신의 답에 도달하지 않을까 작은 희망을 품는 순간이기도 하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나는 녀석들을 가르쳐주고, 이해시켜야 하는 학생들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쉽지 않은 세상과 마주하는 동지들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해줄까? 아이들이 그런 ‘가르침’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까? 자기들이 배움을 얻고 있다고 생각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내게 작은 확신을 주는 사실이 있다. 내가 가르치는 곳은 학교가 아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강제로 나와의 책읽기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내 수업에 강제로 출석해야 할 까닭이 없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계속해서 이 수업에 와주고 있다는 점, 내가 그 아이들에게 이 수업에 오게 만드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
오직 그 사실이, 나에게 이 수업이 뭔가 휘청대면서도 분명히 나아가고 있다는 희미한 확신을 준다.
글_차명식(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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