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진 SF도 다시 보기
보르코시건 시리즈에 바치는 애끓는 참회기
참회의 여정이 시작된 건 어느 오후의 한담에서였다. 친구가 여상히 던진 질문에 ‘몰라’라고 눙쳐버리지 못한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달까.
“아아, 보르코시건 시리즈?”
질문을 들은 나는 나는 잠깐 침묵을 지켰다가, 시차를 두고 천천히 뜸을 들이며 되물었다. 단 세 개의 단어를 말했을 뿐인데 벌써 후회되기 시작했다. 안다는 투로 두 번째 음소를 높여 길게 끄는, ‘아아’ 같은 추임새는 넣지 말걸. 그냥 통째로 모르는 척 할걸. 어조에 시큰둥함을 묻히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잘 안 됐네. 그나저나 이 단어가 맞나? 보르‘코시’건? 보르‘시코’건 아니고? 헷갈려라. 사실 구태의연한 되물음 자체가, 할 말을 짜낼 시간을 벌기 위한 연막이었다. 이러쿵저러쿵 나서서 논하기도 민망하게, 내가 그 시리즈를 읽어본 지도 거의 십 년이 다 되어갔던 것이다.
“네, 그거 볼까 하는데, 어때요?”
이거 참, 안 읽은 게 아니랍시고 속 편히 ‘몰라’라고 대답하지 못한 나의 정직함을 탓할 수밖에. 안 읽기는커녕, 재밌다고 두 세 권 진도를 뽑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어땠더라. 나는 평온을 가장한 표정 뒤로 바삐 머리를 굴렸다. 마일즈 보르코시건이라는, 신체적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난 귀족 가문의 걸출한 인물이 펼치는 우주 무용담이라는 요약정보는 뇌리에 저장되어 있었다. 나는 흐릿하게 멀어진 수 년 전의 감상을 급하게 갈무리했다.
재미있었지.
그게 첫 번째 떠오른 생각이었다.
캐릭터가 좋았어.
두 번째 떠오른 인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더 안 읽어도 될 것 같다,고 판정내렸던 걸 기억해냈다. 두어 권 잇달아 재미있게 잘 읽고 나서, 그 후로는 후속작이 나와도 관심을 갖지 않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 재미는 있는데... 보다 말았어.”
“어, 왜요?”
이제는 더 방어할 재간이 없다. 나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실토했다.
“그게... 후속편이 바로 나온 것도 아니고 해서 기다리다가 시들해졌던가? 주인공이 너무 잘나서 식상했던 거 같기도 하고. 사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안나.”
“일단 재미는 있다는 거죠?”
“가독성은 보장합니다. 내 얘기는 반만 참고해. 나야 원체 스페이스오페라 장르에 점수가 박한 사람이니까.”
서너 주 후, 보르코시건에 대해 물었던 친구가 말했다.
“엄청 재밌던데요. 시리즈 거의 다 읽었어요.”
“뭐? 벌써?”
“아주 훌륭해요.”
“그럴 수가..... 재미는 있었지만, ‘아주 훌륭하다’는 인상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한의 경계』라도 읽어보세요. 단편집인데 맘에 들 게 확실합니다.”
그 순간이, 고통스러운 참회의 여정에 발 들여놓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을 당시의 나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친구의 안목을 신뢰하는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저지르고 말았다. 헤어져 집에 돌아가는 길에 추천받은 단편집 『무한의 경계』를 구입해버린 것이다. 십년 만에 다시 만나는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보르코시건 시리즈였다. 책을 펼쳐든 나는 미용실에서 잡지책 뒤적이는 모드로 가볍게 읽기 시작했다. 내 통절한 반성의 여정의 서막이었다.
반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언행에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었는지 돌이켜보는 일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불길한 전조를 느꼈고, 첫 번째 챕터를 다 읽었을 때에는 이미 끔찍한 깨달음의 나락으로 떨어져내리는 중이었다. 나는 명명백백한 죄인이었다. 십년 어치의 죄인이었다. 내 마음의 법정에서, 나는 억울한 원고이며 동시에 참회하는 피고였다. 십 년 동안의 내가 십 년 동안 몰랐던 결핍을 깨닫고 십 년 전의 나를 원망스레 손가락질했다. 보르코시건 시리즈에 관한 한, 나는 백 번이라도 반성하고, 백 번이라도 참회함이 마땅했던 것이다.
홈쇼핑 방송을 보다보면 흔히 들을 수 있는 멘트가 있다. “지금 안 사시면 후회합니다.” 그것은 내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상투어였다. 안 샀는데 뭘 안다고 후회한다는 거야? 하지만 다시 만난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홈쇼핑의 세계에 대한 내 이해의 지평마저 넓혀주었다. 그 판에 박힌 멘트에는 아주 중요한 말들이 생략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 멘트는, 지금 안 사면, (세월이 흐른 뒤 이 물건을 경험해보게 되는 평행우주의 몇몇 버전에서, 미리 사서 미리 경험하지 않았던 지난 시간을) 분초 단위로 후회하게 된다는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랬다. 그 일이 나에게 벌어지고 있었다. 나를 사로잡은 후회의 감각은 우리 은하계의 모든 쇼 호스트들을 한껏 만족시킬 만큼 통렬한 것이었다. 보르코시건이라는 보물창고를 더 일찍 섭렵하지 않은 과거의 나를 초 단위로 거슬러 올라가며 때려주고 싶었다. 이 시리즈의 존재를 아예 몰랐다면 차라리 죄가 아니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심지어 일부를 읽어보기까지 했으면서도,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용서받을 길은 전혀 없었다. 왜 나는 그때 섣불리 ‘더 안 읽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나는 이 훌륭한 소설을 여러 편이나 더 빨리 내 인생에 들여놓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 이 말이다......
시리즈의 중심인물인 마일즈 보르코시건은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티리온 라니스터를 연상케 한다. 굽은 등과 작게 오그라든 키, 유리 같은 뼈대 등 불구의 몸을 타고 난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의 자제. 스스로를 증명해보이고 싶다는 야망이 도드라기지기는 할지언정, 뛰어난 지략과 선량하고 올곧은 성품을 역전하지는 않는다. 너무나 분명한 단점과, 그만큼 분명한 장점들이 어우러져 빚어지는 캐릭터가 얼마나 입체적인지, 일반적이지 않은 설정(‘왜소증 약골이 용병부대의 대장이라고?’)과 일반적이지 않은 전개들에 당연하다는 듯 설득당하게 되는 것이다.
티리온 라니스터 - [왕좌의 게임]
『무한의 경계』는 세 개의 단편소설들로 이루어져 있다. 기존에 발표된 장편의 경우에도 그러했지만, 어느 것을 먼저 읽어도 상관이 없다. 이는 보르코시건 시리즈의 장점이다. 앞뒤 순서가 중요하지 않고, 하나하나가 독립된 작품으로서 재미를 보장한다는 것. 세 편이 다 재미있고 속도감 있게 읽히는데, 각각이 다루는 주제의식이 결코 가볍지 않다. 영아살해라는 문제, 이형(장애인)의 문제, 그리고 종교의 문제. 이 묵직하고 복잡다단한 주제를 능란하게 풀어나가는 작가의 솜씨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이 이야기들의 어떤 인물도 흐릿하지 않으며, 어떤 인물도 평면적이지 않다. 선악은 간편히 나뉘지 않는다. 대개의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기대할 수 없는 미덕이다.
겸허한 독서를 통해, 내가 얻은 교훈은 이것이다. 섣부른 판단으로 십년 짜리 화를 부르지 말자는 것. 그러니까, 꺼진 SF도 다시 보자는 것. 꺼진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하나의 작가, 하나의 시리즈에 대한 최종판단은, 진짜로 최종의 최종에 이르러서나 내릴 일이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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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 깊은 참회를 촉발시킨 건 과거의 제 잘못된 판단이지 소설의 작품성 자체는 아니에요. 후지다는 게 아니라, 제가 지금 보르코시건 시리즈를 가리켜 『전쟁과 평화』나 『죄와 벌』에 맞먹는 수준의 세계명작이라고 웅변중인 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전쟁과 평화에 관한 이야기들이긴 합니다. 일단 주인공이 군인이니까요. ‘죄와 벌’이라는 주제도 완전히 논외인 건 아닙니다. [무한의 경계]의 단편 하나도 그 테마를 다루고 있지요.) 보르코시건 시리즈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뿅뿅 총 쏘면 윽윽 나쁜 놈들이 죽어나가는 호쾌한 대중소설에 이게 다 웬 호들갑이냐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좋은 SF는 드물고, 좋은 스페이스 오페라는 더더욱 드물지요. 저처럼 스페이스 오페라를 읽고 실망하고, 읽고 실망하고, 읽고 실망하기를 거듭한 끝에, 장르 자체에 대한 냉소를 기본으로 탑재하게 된 사람에게 있어, 짜릿한 오락성과 깊이 있는 주제의식, 공평무사한 균형감각에 안정적인 문체까지 모두 잡은 스페이스 오페라란 마치 유니콘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한 가지 더 고백할게요. 아시다시피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긴 모험의 여정 끝에 집에 돌아와 파랑새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집에 뒀던 유니콘을 아예 팔아치운 인간이에요. 예전에 기계적으로 보르코시건의 후속 시리즈를 샀다가, 읽지도 않고 중고서점에 팔아치웠던 걸 기억해냈거든요. 속죄의 글을, 쓰지 않을래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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