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칼지, 『노인의 전쟁』
- 할머니의 난꽃향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코 끝이 간지럽다. 살풋 스친 난꽃 향은 내 착각일까. 은은하고 우아하면서, 다른 누구에게도 없는 향, ‘할머니 냄새’. 공항 입국장에서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달려가 품에 쏙 안길 때, 그 특유의 향기는 할머니의 부드럽고 하늘하늘한 손길보다 더 확실하게 그녀의 귀향을 확신시켜 주었다. 진짜구나. 진짜 우리 할머니가 오셨어. 할머니가 머무는 곳에는 언제나 그 향기가 남았다. 할머니가 마침내 바다 건너 당신 댁으로 돌아가시고 나면, 나는 함께 지냈던 방에서 그 향기의 여운이 서서히 엷어져 가는 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자기 스타일이 확실했다. 외출할 때면 사과 모양의 금 귀고리를 커다란 녹색 보석이 박힌 악세서리로 바꿔 달고, 무릎 아래로 떨어지는 고운 원피스의 매무새를 정돈한 뒤, 예의 난꽃 향수를 착착 뿌렸다. 정성들여 빗은 머리에 클래식한 모자를 얹고, 섬세하게 꽃수가 놓인 레이스 양산을 손에 걸었다.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멋쟁이였고, 죽을 때까지 멋쟁이였다. 그녀는 칭송을 즐겼고, 칭송이 아닌 말들을 못 견뎌 했으며, 나를 사랑했다. 나도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할머니의 확고한 스타일만큼이나 분명한 원칙이 있었다. 단둘의 외출이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할머니는 결코 내 손을 잡아주는 법이 없었다. 조금 떨어져 걸으며, 양산 그늘 아래 웃음을 띠고 이쪽을 바라보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사랑스러움과 자랑스러움으로 환히 빛나던 그 때의 표정들. 외출할 때면 유독 그녀가 자주 취하던, 거리를 두거나 피하는 자세에서 내가 한 점 서운함도 느낀 적 없다는 건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다. 무던하기보다는 오히려 예민한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알았던 것일까? 할머니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 예쁜 아이가 우리 손녀예요’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보다, 손녀를 둔 나이든 여성, ‘할머니’로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는 진실을.
늙음이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만큼이나, 그에 대한 심적 저항도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죽음을 기피하고 생을 추앙하는 문화에서 젊음이 각광받고 늙음이 배척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세계관에 입각해서 보면, 늙음은 빠른 절정 이후의 기나긴 내리막이다. 반짝임이 영영 죽어버린 사금파리다. 생기탱천한 아름다움은 이미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지 오래, 김빠진 시간만이 망망대해처럼 지루하게 펼쳐져있는 쓸쓸한 여분의 생인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나이든 사람이 젊음을 그리워하고, 노화의 모든 징후를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청춘의 마지막 한 오라기라도 붙잡아보려 애쓰는 게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린 손녀의 할머니가 아닌 척, 슬쩍 뒤처져 딴전을 부리던 우리 할머니의 애처로운 행동조차도. 할머니는 젊음을 사랑했다. 노화를 혐오했다. 수많은 보통의 사람들처럼.
소설 『노인의 전쟁』에서 CDF(우주개척연맹)은 인류의 조상별인 지구에서 상시적으로 모병활동을 벌인다. 일반적인 군대들과 정반대로, 대상은 노인들로 국한된다. 75살까지 살아있을 경우, 지구에서의 모든 이력과 법적 권리를 포기하고 입대해 우주로 떠난다는 것이 계약의 골자다. 계약서에는 다음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본인은 우주개척방위군에 자원함으로써, 우주개척방위군에서 전투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어떤 내과적, 외과적, 치료적인 계획이나 절차에도 동의한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이 문장에서 노인들은 늙음을 ‘치유’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젊음을 되돌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발견했던 것이다. CDF는 특정한 문화권의 노인들이 공유하는 특정한 정서를 제대로 꿰뚫어보고, 이를 절묘하게 이용하여 필요한 인적자원을 꾸준히 조달해내는 데 성공한다. 아래는 『노인의 전쟁』 2권 격인 『유령여단』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들은 노년까지 살아남기 좋은 경제 환경이 구축되어 있고, 사회적으로는 ‘젊음’에 대해 바람직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심리적으로는 노화와 죽음에 관해 몹시 불편하게 생각하는, 살기 편하고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들에서 신병을 모집했다. 이런 사회의 노인들은 CDF에 딱 좋은 열의 넘치는 지원병이 되었다. - p74, 존 스칼지, 『유령여단』
‘사회적으로는 젊음에 대해 바람직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심리적으로는 노화와 죽음에 관해 몹시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심리. 이 대목이 나의 할머니를 연상시켰다. 애써 거리를 두고 살랑살랑 걸으시던 그 자태가 눈에 선했다. 할머니뿐 아니라 할아버지도, 이제 당시의 그분들과 비슷한 나이가 되신 내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어린 날 산같이 높고 바위같이 단단해보였던 그들의 어떤 연약한 순간들, 그것이 연약함인 줄도 모른 채 무심히 눈에 담았던 장면들이, 사뭇 다른 의미를 띠고 확대되었다가 멀어져갔다. 스냅사진처럼 기억에 남은 장면들에 처음부터 깃들어있었을 비릿한 쇠 맛이 비로소 입안에 맴돌았다. 그것은 늙음 앞에 무턱대고 뒷걸음질 치고 싶은 맹목적인 공포의 아린 맛, 쓰고 시고 아프고 애처로운 맛이었다. 새로운 조망 앞에서 내 마음에는 미움도 멸시도 없이, 아득한 안쓰러움만이 차올랐다.
이윽고 방출되었던 안쓰러움이 역류해 와 나를 휩쓸었다. 늙음을 두려워하는 속내라면, 나라고 예외가 될 수 없는 법이므로.
결국 청춘을 예찬하고 노화를 혐오하는 경향을 내면화 하는 건 조부모와 부모 세대만의 비참이 아니다. 국경을 넘어 대중문화를 공유하는 글로벌 시대의 지구인 그 누구라고 피할 수 있을까 싶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노화 공포에 푹 절여진 걸어다니는 피클들이다. 강에 풀썩 던져진 마른 솜이불처럼 꾸역꾸역 그 경향을 온몸으로 빨아들이고, 꼬르륵 가라앉아 노화로부터 꽁무니를 빼고 청춘의 뒤를 좇으며 너울너울 헤엄쳐 다니는 해파리들이다. 보고 듣고 겪는 것 모두에 그런 경향이 내재되어 있으니, 레토르트 식품만 20년어치 챙겨 통신두절의 패닉룸에 틀어박하지 않는 이상, 저 문화적 세뇌를 어떻게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노인의 전쟁』이라는 소설 제목에 대해 첫눈에 뜨악함밖에 느끼지 못했던 건 딱히 내 탓만도 아닌 셈이다.
영화 <데드아미>(Dad's army)
‘전쟁’이라니, 밀리터리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노인’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불러일으키는 반감이야말로 만만치 않았다. 대체로 나는 내가 읽을 소설의 주인공이 생기있고 영리하고 반짝이고 호감가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아주 젊지는 않아도 최소한 거동이 힘들 정도로 늙지는 않았기를 기대한다. 외모가 아주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 자태의 묘사 속에 어떤 식으로든 개성과 매력이 담겨있길 원한다. 그런데 노인의 전쟁이라고? 일흔 다섯 살의 미국 할배가 군대에 입대하는 이야기라고? 쭈글쭈글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근육이 다 빠진 앙상한 엉덩이를 엉거주춤하게 내밀고 서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소총을 잡으려고 애쓰는 장면을 상상하게 만드는 저런 제목은, 글쎄, 책을 기꺼이 골라쥐게 만드는 데 유리한 조건은 확실히 아니었다.
하지만 이 책은, ‘노인’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킨 부정적인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나를 사로잡았다. 여기에 좋은 소식이 있다.
첫째, 주인공 존 페리가 어떤 젊은이라도 단숨에 찜쪄먹을 매력에 빛나는 할아버지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첫 페이지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는 언제 어느 때라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 성격인 데다가, 기본적인 시민으로서의 양식이 있는 사람이다. 지하철에서 임산부를 밀치고, 효도라디오의 트로트 메들리로 만인의 고막을 테러하고, 아무한테나 반말하며 쓸데없이 화를 내는 그런 노인이 아니다. 일흔 다섯 살 이후의 지구를 후손들 손에 깔끔히 맡기고 떠나는 결단을 보면, 태극기 집회같은 걸 쫓아다니며 좌빨 박멸 박근혜 석방을 부르짖지도 않을 게 자명해 보인다.
둘째, 그는 물론 내내 ‘할아버지’이지만, 외면상으로는, 소설 초반의 아주 잠깐동안만 그렇다. CDF의 괴팍한 모병정책의 비밀은 특별한 기술력에 있었다. 노인들 각자의 DNA를 바탕으로 20대의 젊고 개량된 육체를 육성해낸 뒤, 이쪽 육체에서 저쪽 육체로 의식을 전이시키는 기술이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입대한 노인들은 모두 새로운 젊은 육체를 받아 우주 곳곳의 전장들을 누비고 다닐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자네들이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자네들이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 만큼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CDF가 노인들을 병사로 삼는 이유 중 하나다. 자네들 모두가 은퇴했으며 경제적인 방해물이라서 데려오는 게 아니다. 또한 자네들이 자기 목숨을 넘어서는 삶이 있다는 것을 알 만큼 오래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네들 대부분은 가족을 부양하고 자식과 손자들을 키워 보았을 것이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표를 넘어서는 일을 하는 가치를 이해하고 있다. 이런 개념을 열아홉 살짜리의 뇌에 박아넣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자네들은 경험으로 안다. 이 우주에서는 경험에 의미가 있다.” p206, 『노인의 전쟁』
신병훈련소 안토니오 루이즈 상사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우리의 문화가 젊음의 매력에만 열광하고 있는 동안, CDF는 현명하게도 늙음의 이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청춘에게는 깃들 수 없는, 갈고 닦인 경험의 힘을. 젊음의 상실을 애도하면서 망각되기 일쑤인 나이듦만의 저력을. 이것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젊음과 연륜이 더 이상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게 될 때, 무게추가 더 이상 한쪽으로 과도하게 기울지 않는 세상이 될 때, 인류가 어떤 초유의 가능성들을 맞게 될지 설레게 만드는 통찰이다.
한 가지 더. 정교한 상상과 유쾌한 필치로 엄청난 가독성을 보장하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 존 페리가 온 존재로 증명해주는 건, 한 사람을 생생한 매력덩어리로 만드는 조건이 반질반질하게 잘 닦인 육체의 젊음이 아니라 건강한 인성과 늙지 않은 유머감각, 그리고 뚜렷한 주체성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독자를 매료시키는 순간들은 유전자 변이를 거친 그 초록색의 강건한 신체가 외계 종족의 점액질 머리를 통쾌히 날려버릴 때가 아니라(물론 이 장면들도 매력만점이긴 했다), 시민적 양심과 실용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소신있게 말하고 행동하고 수용하고 결정을 내리는 모든 순간들에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참으로 잘 늙은 사람이었다.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찬스를 얻는 것보다 더 부러운 건, 그런 사람으로 늙어갈 수 있었다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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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할머니는 내 방에 시세이도 젠 향수 병을 남겨놓고 가셨다. 나는 그것을 서랍 깊은 곳에 보관해왔다. 작년에 먼 이국땅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 병은 내 화장대의 다른 향수들과 나란히 화장대를 장식하고 있다. 다 쓴 공병이지만, 지금도 뚜껑을 열면 할머니의 난꽃 향이 진하게 풍긴다. 늙는 게 세상 제일 무서웠을 귀여운 우리 할머니, 내 사랑스러운 걸어다니는 피클, 반백년 선배격의 노화의 바다 속 해파리. 이제 내가 잘 이해하게 된 두려움에 사로잡혀, 레이스 그늘 아래 이쪽을 곁눈질 하던 그 멋쩍고 연약하던 얼굴이 새삼 많이 보고 싶다.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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