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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는 이렇게 SF를 읽었다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 추억의 호더

by 북드라망 2018. 5. 30.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 추억의 호더  


이것은 지구인들이 외계문명과 조우하는 이야기다.

이것은 한 학자가 새로운 앎, 낯선 관점에 눈뜨는 이야기다.

이것은 다 키운 아이를 잃은 한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있기 때문에, 선언적인 선택을 해나가는 이야기이다. 

과정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간 축 위의 모든 것이 추억인 사람의 이야기이다. 


* * *




나는 물건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이다. 한번 정든 물건은 쉽게 버리지 못한다. 내 주제를 깨달았기에 망정이지, 하염없이 천진난만하게 살아왔다면 지금쯤 이 구역의 악명 높은 호더(hoarder)가 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내게 축적의 욕망만이 주어졌을 뿐, ‘잘 축적하는 능력’은 허락되지 않았음을 일찌감치 파악하였다. 세상 온갖 종류의 물건들에 다 매혹되곤 하면서도 쉽게 사들이거나 모으는 취미를 붙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잘 못 버리고, 잘 못 정리하는 기질이 어떤 참사를 초래할지 그려볼 수 있었던 덕분이다. 사물의 제자리에 대한 둔감함이나, 엔트로피 증가율에 대한 나의 높은 관용도는 아버지 계보로부터 온 유전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아슬아슬하게 목숨이 부지되는 테트리스 고급 단계처럼 정체모를 잡동사니들이 절묘하게 맞물려 쌓여있는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설 때마다 왠지 모르게 정답고 포근한 기분이 들곤 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참고로, 어머니는 버리기도 잘 버리시고 정리하기도 잘 정리하시며 깔끔하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인데, 우리 부녀는 어머니 평생에 걸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골칫덩이로 살아온 셈이다. (엄마 미안해요!) 


스스로가 못 버리고 못 정리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 물건을 살 때 자연스럽게 신중해진다. 쓰레기를 쌓아놓고 살고 싶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적확한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바가지를 쓰지 않으면서, 미감에 거슬리지도 않아 오래도록 만족감을 안겨줄 이상적인 단 하나를 찾아내기 위한 여정에 기꺼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거치는 모든 감정들, 고민과 망설임과 실망과 결단과 뿌듯함이 결국은 높은 확률로 잊히지 않게 된다. 여기에 악순환의 징조가 서린다. 이미 내 것으로 소유하기도 전에, 물건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감정이 이미 너무 많다. 


어차피 잘 못 버리기도 하지만, 정서적인 기억이 스민 물건을 버리기는 더더욱 쉽지 않은 법이다. 어쩌다가 버리더라도 오래도록 후회하곤 하는 것이다. 나는 유행이 너무 지나 더 입기 민망해 십 년도 더 전에 처분해버린, 고등학교 때 샀던 감색 잔꽃 무늬 블라우스를 지금껏 그리워한다. 쇼윈도로 들여다보고 한눈에 반해 이끌려 들어간 홍제동의 작은 보세가게에서, 부드러운 백열전구 조명 아래 그 차갑고 매끄러운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금만 깎아주세요’라고 조르던 순간의 머쓱하고도 설레던 기분이 그 블라우스에 깃들어 있었다. 

   

이런 애착은 직접 구입한 물건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할머니로부터 선물받은 체리가 그려진 립밤(소중히 간직만 하다가 다 굳었다)부터, 중학교 때 교내합창대회를 위해 급우들과 맞춰 입었던 회색의 ‘캔자스 유니버시티’ 면 티,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친구가 형광펜으로 내 이름을 흘려써 준 노란색 포스트잇까지, 별별 이상하고 쓸모없는 것들이 손닿는 데 서랍 속에 뒹굴고 있다. 내가 그 물건들이 버리지 못하는 것 역시 정서적인 기억 때문이다. 이제는 기억으로만 남은 감정들의 실체를 그들이 증거하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절의 가냘프고 파리한 순간, 연기처럼 흩어져갔을 뻔 한 기분의 한 자락들이 거기에 물화되어 남겨져있다. 그러니까, 내 중구난방 축적의 진짜 기준은 ‘소용’이 아니라 ‘정서’다. 물건 욕심이 아니라 추억 욕심이다. 나를 켜켜이 부풀려 높이 고양시키는 작은 기쁨의 트리거들. 


정리를 잘 할 줄 모른다고 해서, 잘 정리된 환경의 쾌적함을 모르는 건 아니다. 미니멀 라이프의 유행 속에 나도 관련된 책들을 탐독했었다. 여러 권 읽고, 여러 번 감탄하고, 여러 번 의지를 새롭게 다졌으나, 당연히 한 번도 효과는 없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걸 알면서도 계속 다시 찾아 읽는데, 이쯤 되면 그 장르에 대한 나의 태도를 ‘불가능에 대한 선망 중독’ 쯤으로 규정지어도 좋을 법 하다.

 



그 주제의 책들에서 공통되게 강조하는 건, 잘 버리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추억이 담겨있어 아까운 물건들은 사진을 찍어놓고 버리라’는 조언에 경악했었다. 쓸모가 아닌 추억 때문에 간직하는 물건들이니까, 추억으로만 남기고 실제의 부피는 소거시키라는 논리였고, 경우에 따라서는 유용할 것도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마음 속으로 고개를 가로지으며 단호히 중얼거린다. 그래도 나는 안돼. 경험적으로 내가 사진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고 있다. 디지털 파일이건 필름을 인화한 사진이건, 하드디스크나 구두박스 안에 뚜껑 닫아 처박아놓고 결국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나는 추억을 잊고 살기 위해 그 물건들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다. 

‘추억에 집착해서 현생을 이렇게 엉망진창 만들고 싶어요?’라고 그 전문가는 일갈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입니다, 추억 없이 내 현생이 어떻게 성립하나요?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는 과거뿐 아니라 미래까지도 자유롭게 추억할 수 있게 된 사람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루이즈는 언어학자다. 지구에 외계인이 나타났을 때, 군과 정부가 급히 꾸린 연구팀에 들어갔다. 목적은 외계인과의 소통이었다. 아주 기초적인 단어로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언어와 문자를 연구해나가던 루이즈는 외계언어의 세계관으로 사고체계가 동화되어 가기 시작하고, 이윽고 현재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통시적인 인지를 발달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사이사이에, 루이즈가 딸을 낳아 키우던 과정의 달콤쌉쌀한 에피소드들과, 그 아이를 잃은 고통이 끊임없이 병치된다.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는 10년도 더 전이었다. 헷갈려서 여러 번 다시 읽었던 게 생각난다. 3인칭이다가 1인칭이다가 오락가락하는 시점, 과거를 술회하는 것인지 현재를 설명하는 것인지 문단마다 바뀌는 시제 등 혼란을 일으키는 장치들이 여러 번 반복되어 갈피를 잡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작품이었다. 하나하나의 사소한 결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거대한 슬픔으로 가는 길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담담히 그 운명적 선택을 수행해나가는 주인공의 태도는 숫제 아름다울 지경이었다.  


루이즈가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갖게 된 건 헵타포드 외계인의 언어에 숙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시간을 통시적으로 다룬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문장 안에 농축시키는 이 언어는 결국 사용자의 사고체계를 목적론적으로 변형시킨다. 소설에서도 주지하고 있다시피, 목적론 자체는 오류가 아니다. ‘빛이 목적지점까지의 최단경로를 알기 때문에 물속에서 굴절된다’와 ‘물의 굴절율이 공기와 다르기 때문에 빛의 경로가 꺾인다’는 결국 빛이 정해진 한 지점에 가닿는 방식을 설명하는 다른 설명들일 뿐이다. 그 신비롭고 초월적인 분위기 때문에 헵타포드 외계인들이 마치 코스모스 버전의 예정설을 전도하러 온 게 아닐까 싶어지긴 한다. 그러나 나는 이와 비슷한 세계관의 소유자들을 전혀 종교적이지도 금욕적이지도 않은, 블랙 유머의 형식 속에서 만나본 적이 있다. 커트 보네것의 『제 5 도살장』 속 트랄파마도어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내게 『네 인생의 이야기』는 커트 보네것의 『제 5 도살장』에 보내는 지적인 화답처럼 느껴진다. 『제 5 도살장』 속 외계인 트랄파마도어인들은 모든 시간을 동시에 볼 수 있었고, 우주가 어떻게 종말을 맞이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자기네 종족의 조종사가 비행접시의 새 연료 실험을 하다가 시동 단추를 누르게 되고, 그 길로 우주 전체가 사라지게 될 운명이었다. “그걸 안다면 그걸 막으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주인공 빌리에게, 트랄파마도어인은 침착하게 설명했던 것이다.  

“그 조종사는 늘 그걸 눌렀고, 앞으로도 늘 누를 겁니다. 우리는 늘 누르게 놔두었고 앞으로도 늘 놔둘 겁니다. 그 순간은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습니다.”




‘쭉 뻗은 로키산맥을 보듯이 모든 시간을 보는’ 트랄파마도어의 외계인들은 유쾌한 버전의 헵타포드였다. 그들은 인생에 불유쾌가 한 세트로 오는 것임을 잘 알고,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안의 좋은 순간들에 집중하는 지혜에 몸을 맡긴다.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헵타포드의 언어와 사고체계에 익숙해진 루이즈는, 자신의 모든 말, 행동, 선택의 귀결들을 디테일하게 그냥 ‘알’게 된다. 식료품점에서 파는 샐러드볼을 보는 순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이 먼 미래에 그 물건에 얼굴을 긁혀 반죽을 뒤집어쓴 채 울다가 응급실에서 크게 한 바늘 꿰매게 되리라는 사실을 ‘기억’해내는 식이다. 그토록 전방위적인 앎을 견지한 채, 그녀는 절박하기까지 한 심정으로, 단호하게 샐러드볼을 집어다가 계산대에 올려놓게 되는 것이다. 훗날 그것이 사랑하는 딸을 다치게 하리라는 걸 앎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녀의 모든 선택은 그런 식이다. 그녀는 그 남자와 결혼한다. 슬하에 딸을 둔 채 이혼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아이를 잉태한다. 그 애가 스물 다섯 살에 산악등반을 하다가 사고사 하게 되리라는 걸 눈앞에 빤히 그리면서도.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그 일로, 악몽에 시달리기까지 하면서도.


헵타포드는 언설로 표현하지 않았고, 트랄파마도어인들은 과하게 단순화시켜 말한 진실을 그녀는 영민하게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앞에 당도한 이 생이라는 초콜릿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달콤쌉쌀한 것이며, 쌉쌀함 없이 달콤함만을 취할 수는 없는 일이며, 나의 최선은, 가장 정갈하게 포장을 벗겨 한 알 한 알의 맛을 최대한으로 감각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수면을 비춘 빛은 물 아래 한 지점에 가 닿는다. 그 도달점의 좌표가 유동적이며 수행자-빛의 의지에 따라 결말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식 세계관에서는, 결국에 어느 지점에 가닿을 것인지, 결말의 값이 무엇이 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반면, 빛이 가 닿을 지점이 미리부터 정해져있다고 보는 외계인들의 사고방식에서는, 불변의 결말보다는 시시각각의 과정을 깊게 향유하는 데 의미가 있다. 그들은 영원히, 주사위를 다시 던진다. 인생이여, 백만 번이라도 다시 한 번! 그렇다- 트랄파마도어인들은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우주에서 지구인들만 유난히 발전시킨 개념이라고 하였다. 




실제의 쓸모를 다한 물건들은 공간을 번잡스럽게 만들기만 할 뿐이라는 건 오해다. 그 번잡함을, 반드시 소거해야할 할 군더더기로 보는 것도 오해다. 다층적인 감정의 기억이란 결코 군더더기가 아니며, 오히려 실제적인 효력을 갖기 때문이다. 

쓸모를 다 하고도 간직된 물건들에는, 다른 시간대로부터 의미를 펌프질해 올려 지금의 현실을 두텁게 재구성해주는 헵타포드적 마력이 깃들어 있다. 과거의 정서들이 이 ‘물건’들을 매개로 현재로 소환되어 지금 당장의 기분을 호전시킬 때, 이들은 과거와 현재 사이를 아우르는 통시성을 확보해 주는 물리적인 교두보로 기능한다. 


그러고 보면, 지구인의 세계관에서 추억이 언제나 일방향으로, 과거로부터 현재로만 향하게끔 되어 있는 건 나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구태여 미래까지 추억할 수 없게 생겨먹은 우리의 세계관은, 버릴 줄 모르고 정리할 줄도 모르는 수집가에게 있어 얼마나 복인가. 추억의 방향성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면, 나는 수습 불가의 전방위 호더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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