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 브룩스,『세계대전 Z』
- 쌀알도 벽돌도 없이, 지옥에 가지 않을 것
어릴 때 책벌레였다. 수많은 책들을 읽어치웠다.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사전정보도 필요없었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모르면 모른 채로 읽어서 좋았고, 추천받고 읽으면 기대가 되어서 좋았다. 그림이 있으면 만화 같아서 좋았고, 그림이 없으면 어른책 같아서 좋았다. 픽션은 재미있었고, 넌픽션은 흥미로웠다. 읽는 모든 이야기들이 다 나름의 의미를 남겼다. 책을 읽을 때면 나는 나무가 되었다. 행간으로 깊고 넓게 뿌리를 뻗어, 이미지와 관념들을 모세관으로 샅샅이 펌프질 해 올렸다. 빨아들인 양분은 머리 위 무성한 이파리로 피어났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며 제각기의 방식으로 사각이는 소리를 내었다. 모든 독서가 신록같이 푸르렀다. 나는 그 시절의 어떤 독서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단 하나의, 치명적인 이야기만 없었더라면.
읽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최소한 그렇게 습자지처럼 쭉쭉 흡수하던 시절에는 접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오랫동안 후회하는 작품이 있다.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읽었던 그 이야기는, 그러나 이상한 책은 아니었다. 연령대가 맞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콧물 묻은 돈을 노린 못된 어른이 양심없이 펴낸 자극적이고 선정적이고 비교육적인 책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안데르센 선집’의 한 권, 세계적인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백 년 전 그 글을 썼던 안데르센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선집에 그 이야기를 골라 넣은 출판사 역시 그걸 읽고 한 아이의 영혼이 새카맣게 병들어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에는 트롤의 거울조각이 눈에 들어가 차갑게 뒤틀려버린 어린아이가 나온다. 나에게는 그 이야기가 『눈의 여왕』의 바로 그 거울조각이었다.
아마 아주 훌륭한 작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혹은 아이들 읽히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판단이 대세였던 것일 수도 있다. 『눈의 여왕』이나 『미운오리새끼』나 『인어공주』의 다른 판본은 숱하게 보아왔지만, 그 이야기는 이후로 어디에서도 다시 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고, 이제 와 위키피디아에서 안데르센의 작품목록을 훑어보아도 이거였거니 싶은 걸 찾을 수 없다. ‘작가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아니야?’ 아니다. 그 책 제일 끝 장의 ‘부모를 위한 독서지도’에서 ‘안데르센은 비평가들을 싫어했다’는 문장을 읽었던 기억이 있고, 수많은 자료들이 증언하는 바 실제로도 그랬다고 한다. 어쨌든, 그 독이 든 사과 같은 동화가 좀비의 잇자국처럼 내게 남긴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벽돌공이나 농부와 달리, 비평가는 죽어서 지옥에 간다. 세상에 실질적으로 소용이 되는 것을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열 살도 안 된 꼬맹이가 그 다분히 악의적인 주제의식에 어째서 그렇게 사로잡아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뭐, 좀비가 되는 데 이유가 있겠어. 안 피하고(안 읽고) 물어뜯긴 게 잘못이지. 쌀알 한 톨 키워내지 않고, 벽돌 한 장 구워내지 않는 일은 모두 무가치하다는 비뚤어진 관념이 내 머리 위 커다란 이파리로 돋아났다. 그 이야기 안에서는 신조차 비평가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뷔페식으로 골고루 종교를 섭렵하는 중이었지만, 어느 신이 진짜건 간에 신의 사랑에서 빗겨난다는 상상이 끔찍이 두려웠던 것 같다. 안데르센은 ‘남의 작품을 비판만 하는’ 직업을 비난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내 안에는, 벽돌을 굽고, 쌀알을 생산해내지 않는 책상물림 직업 전체에 대한 죄악감이 똬리를 틀었다.
나는 무럭무럭 자라서 IT 노동자가 되었다. 2비트의 세계는 벽돌도 쌀도 없는 세계였다. 나는 매일 회사에서 무언가 재미난 것들을 만들었지만, 나조차 그것을 먹거나 손에 쥘 수 없었다. 머리 위에서, 내 어린 날 돋은 나뭇잎 하나가 끝도 없이 소란하게 사각거렸다. ‘책상물림은 지옥 가’라는 그루브 넘치는 후렴구가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그런 관념에도 수명이 있다는 점이다. 나이를 먹는 게 그래서 좋다. 내 생의 경험이 여러 무늬와 색깔로 두터워지면서, 하등 쓸모없이 역효과만 내던 그 바보 같은 생각은 얇게 마모되어 갔다. 뇌리의 뒤편으로 보내져 먼지만 덮여가던 그 옛날의 쌀알과 벽돌 숭배를 새삼스레 환기시킨 건, 『세계대전 Z』의 몇몇 에피소드들이었다. 이 에피소드들은 망가진 세상의 생존자들 사이에서, 이전 시대 고소득 직종들이 쭉정이로 전락하고, 하대받던 사람들이 귀한 인재로 역전되는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당신이 예전에 끗발 있던 기업 변호사라고 치지. 살아오면서 대부분이 시간을 계약서를 검토하고, 거래를 중개하고, 전화기에 대고 수다를 떠는 게 당신의 일이었소. 당신은 그런 일에 재주가 있었고, 그래서 부자가 되었고, 덕분에 배관공을 불러서 화장실 변기를 고치게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계속해서 전화기에 대고 수다를 떨 수 있었지.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돈이 더 많이 들어왔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잡다한 일을 떠맡길 수 있는 하인들을 더 많이 고용하게 됐지. 세상이 그런 식으로 돌아갔단 말이오. 그러나 이젠 그게 통하지를 않소. 계약서를 검토하거나 거래를 중개할 필요 자체가 없어진 거요. 이제 필요한 건 변기를 고치는 거지.”
(『세계대전 Z』, 228쪽, 뉴멕시코 타오스, 아서 싱클레어 주니어 인터뷰)
이 대목을 읽으며, 쌀알을 키워내지 못하고 벽돌을 빚어내지 못하며 청소와 정리정돈조차 젬병인 책상물림으로서의 내 현실을 엄중히 돌아보게 되었을까? 영향력 있는 동화작가 안데르센 씨에게는 미안하지만, 머리 굵은 나에게 그 저주가 다시 먹혀드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저 장면을 통해 이 세상의 이치가 눈앞에 선명해지는 기분을 만끽했던 것이다. 어떤 일을 택하여 그 일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이 누구는 꼭 천국 가고 누구는 꼭 지옥 가는 폭력적인 심판의 문제가 아니며, 그냥 순전히, 우리 모두의 주사위 놀음, 운의 문제라는 확신이 분명해졌다.
계약서와 거래가 원활히 융통되어야만 할 세상이 있다. 생존이 절대가치인 세상이 있다. 문명의 재건이 급선무인 세상이 있다. 각각의 세상은 번갈아 펼쳐지기도 하고, 한 시대에 동시다발로 존재하기도 한다. 어쨌든 한 사람은 하나의 시간에 하나의 세상만을 살아갈 수 있다. 좀비 떼를 피해 북쪽으로 북쪽으로 전속력으로 달아나는 것만이 우리 취할 최선의 방도인 세상에서, 계약서는 고사하고 쌀알과 벽돌조차 대체 누구 알 바이겠는가. 평화롭던 시절 도시농부 흉내로 마음의 위안 되어주던 베란다 텃밭은 또 대체 무슨 소용이 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입맛대로 골라서 살 수가 없다. 각자의 자질을 찾아 키우는 데 최선을 다하고, 마침 그 재주가 필요한 세상에 계속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책상물림뿐 아니라 농부와 벽돌공까지 모두 우울하게 만드는 결론이라고 생각된다면(사실상 좀비의 세상에서 제일 필요한 전문가는 군인이다. 그 나머지는 그 세상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으니, 아마 안데르센의 비평가들과 발맞춰 지옥에 가게 되겠지), 책 안에는 고맙게도 일과 직업에 관한 통찰을 일깨우는 또 다른 이야기가 기다린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에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던 로이 엘리엇과의 인터뷰는 각자의 소용에 관한 희망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하루아침에 나는 아무것도 아닌 F6 등급으로 전락했지. 세상은 생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는데, 그렇게 우쭐대던 내 재능이 그걸 멈추게 할 힘이 없었단 거지.”
...(중략)
“무슨 경력? 정부가 원한 건 군인들과 농부들이야.”
(같은 책, 259쪽, 로이 엘리엇 인터뷰, 캘리포니아 말리부)
‘성인이 되고 나서 내내 영화감독만 했’으며, ‘결코 실패를 모르는 신동’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사람이지만, 뒤집히고 박살난 아비규환의 세상에서 영화 만드는 재주는 어떤 식으로도 쓸모를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로이 엘리엇은 자기 재주로 세상에 기여할 방법을 기어이 찾아낸다. 수많은 생존자들이 순전한 절망에 사로잡혀 잠자듯 죽음에 이르는 ‘자각 없는 사망 증후군’을 퇴치하기 위해, 희망적인 선전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데도. 아무도 그 소용을 알아주지 않는데도. 그 효과가 지독히 느리게, 불확실하게 나타나는 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세상 쓸데없는 헛된 짓으로 치부되던 그의 영화 작업은 결국은 사람들에게 소용이 되어주었다.
밥을 벌기 위해 하는 모든 일들이, 밥을 벌어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당장 그 소용이 보이지 않는 일들들도 마찬가지다. 딱 알맞는 때와 장소에 놓이지 못했을 뿐, 소용이 없는 일은 아닌 것이다.
쌀알도 벽돌도 없이, 우리는 아무도 지옥가지 않을 것이다.
좀비의 세상에서도, 지금의 세상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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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브룩스가 쓴 『세계대전 Z』는 전 세계에 퍼진 좀비 바이러스로 인류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통과하고 난 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 소설입니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블록버스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호평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불평을 토로하고 있는 광경을 인터넷서점의 책정보 페이지에서 구경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읽다가 중도포기를 선언하게 되는 이유는 ‘수십 명의 회고 인터뷰로만 구성된 다큐멘터리’라는 딱딱한 형식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이 모두 ‘세계대전Z’라는 인류사의 대사건을 과거형으로, 완결형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 입장에서 그 사태의 전말을 파악하려면 아주 한참을 인내하며 읽어야 한다는 점이 높은 장벽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53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분량도 한몫 하겠지요. 10,000 피스 퍼즐을 한쪽에서부터 차근차근 맞춰가는 것이 아니라, 중구난방 아무데나 한 피스씩 툭툭 떨어지는 걸 받아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심정으로 늘어놓는 형국이라면, 초반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는 것도 당연해요. 영화와는 달리 중심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매력만점 주인공을 점찍어 내세우지도 않기 때문에, 딱히 이입할 건덕지가 없는 것도 쉬 지치게 하는 요소인 듯 합니다.
하지만 포기하기 아까운 소설이에요. 얼개를 꿰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지만, 얼개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보면 굉장히 다채롭고 재미있고 다층적인 이야기들이거든요. ‘사건의 개요와 이 세계의 히스토리를 빨리 알아내겠다’는 강박감을 버리고, 인터뷰 하나하나를 독립된 단편소설처럼 읽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하나의 세계관 위에 울타리를 친 단편소설 농장을 거닌다고 상상하는 거죠. 이 농장에서 당신은 양도 보고 소도 보고 토끼한테 먹이도 주겠지만, 전체 농장의 지도를 그리는 게 화급한 용무는 아닌 겁니다. 어차피 끝까지 거닐고 나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걸요. 느긋하게 마음먹으세요. 평화롭게 둘러보세요. 눈앞에 노니는 양과 소와 토끼와, 건초와 잔디와 파란 하늘과, 땅 밑과 덤불 너머 불쑥불쑥 고개 내미는 흉악한 좀비들을 면면히 즐겁게 사귀어보시기 바랍니다.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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