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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는 이렇게 SF를 읽었다

옥타비아 버틀러, 『킨』 - 우리가 헤엄치는 물

by 북드라망 2018. 5. 2.

옥타비아 버틀러, 『킨』 - 우리가 헤엄치는 물



한때 수영은 내가 할 수 있다고, 심지어 제법 잘하는 편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운동이었다. 달리기고 배드민턴이고 탁구고 줄넘기고, 젬병이 아닌 운동이 하나도 없었는데, 유독 수영만큼은 괜찮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로서는 굉장히 특이한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겁이 많고 운동신경이 형편없는 아이였다. 스스로의 신체 역량에 대한 믿음은 날 때부터 영점에 수렴했는데, 전생에 느린 발로 어기적대며 뛰다가 소에 받히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이런 기억이 남아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걸음마를 하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내 무릎만 남과 달라서 앞쪽으로 꺾여버릴지도 모르니, 함부로 걸음을 떼지 말아야지! 부모님 말씀으로도 걸음마가 유난히 늦은 아이였다고 하니,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아마 두 발로 서기 시작할 무렵 텔레비전같은 데서 학 다리가 앞으로 접히는 걸 보았던 게 틀림없다. 서기 전에 봤다면 아예 일어설 생각도 안 했을 테니 그나마 다행인가. 믿거나 말거나지만. 


 엄마는 그런 나를 수영교실에 등록시켰다. 초등학교 1학년때의 일이다. 

“아프리카에 불시착했다고 쳐봐. 너는 달리기가 느려서 사자한테 잡아먹히고, 나무에도 못 올라서 곰한테도 잡아먹힐 거야. 수영을 배워두면 적어도 악어한테서는 도망칠 수 있지!” 

신박한 논리인 데다가 악어의 수영능력을 무시하는 어폐까지 있었지만, 체육이라면 질색하던 나를 회유하기에는 충분했다. 되바라진 겁쟁이 초딩은 체육은 싫어도 살고는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수영만큼은 잘 배울 운명이었던 건지, 운좋게 연거푸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다. 병아리처럼 짹짹대는 아이들을 능숙하게 잘 다뤘고, 물이 ‘재미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솜씨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중급반쯤 되었을 때 몇달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레인 중간에 서서 자세를 봐준 다음, 학생의 조그만 몸뚱이를 장난스레 번쩍 들어올려 저쪽으로 휙  던져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어린 시절 받은 수영 강습을 통틀어 가장 즐거운 기억이다. 젖은 몸이 힘차게 물 밖으로 끌어올려져 공기를 가르며 1미터쯤 붕 날다가 다시 물 속으로 풍덩 떨어질 때마다, 나는 그 소름이 오소소 돋는 시원함, 고양감, 높이와 속도, 물보라의 격한 감촉, 물밖 세계의 호루라기소리며 고함소리며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순식간에 까마득히 멀어지게 만드는 물속 세계의 둔중한 고요를 있는 있는 힘껏 만끽했다. 순전히 던져지고 싶어서, 선생님 앞에선 일부러 미적미적 자세를 흐트러뜨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모두가 나 같았던 건 아니다. 어떤 아이들은 던져지는 걸 무서워했다. 물을 먹었다고, 코로 물이 들어왔다고, 아프다고 울부짖었다. 선생님은 그 아이들은 다시는 던지지 않도록 조심했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어린 나는 수영을 배웠고,  만년 운동낙제생답지 않게 제법 잘 하기까지 해서, 세상 모든 운동을 싫어하는 가운데 이것 하나만은 싫어하지 않는, 일종의 인생 스포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모두 지난 일이다.

 

나는 더 이상 수영을 하지 못한다. 어느날 갑자기 발병한 성인아토피 때문이다. 피부를 발진으로 뒤덮어 미친듯이 가렵게 만드는 여러 요인들 가운데, 실내수영장 물이 있었다. 예사로이 수영을 한 다음 이박삼일씩 발진과 가려움증에 시달리기를 수 차례 반복한 뒤, 나는 마침내 수영과 결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과거 어느 시점까지는 건강과 즐거움의 원천이었던 그 깊고 풍부한 물이 이제는 내 몸에 독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영영 물에서 나왔다. 내가 그 물 속에서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을 잘 했는지, 물의 어떤 감촉을 좋아했고 물살을 가르는 어떤 요령을 터득했었는지는, 한바탕 꿈처럼 아득해져버렸다. 


  머리 꼭대기까지 푹 잠기는 꿈. 

 독이거나 독이 아닌 흐름 속에 하염없이 유영하는 꿈. 

 흘러가버린 꿈.

 

 한 시대를 산다는 게, ’머리 꼭대기까지 푹 잠겨’ 헤엄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떤 세대에게는 반공의 조류에 푹 잠겨 헤엄치는 것이 인생이었고, 또 다른 세대에게는 세계화의 조류에 푹 잠겨 헤엄치는 것이 인생이었다. 우리의 일상이, 우연한 사고가, 심지어는 사소한 트윗 한 타래, 댓글 한 줄씩이 모여 넘실넘실 이른바 ’역사의 조류’를 구성하는 가운데, 각자의 생으로도 쉼없이 무언가가 밀려들어오고, 무언가가 밀려나간다. 새로운 상식이 밀려와 주위를 채우면, 관습적이던 생각 한 뭉치가 썰물에 녹아 사라진다. 엇갈리는 조류 속에 용케 남은 어떤 물은 독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는 무해하고 당연하던 것들이,  불길한 거품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한 시대에 악이었던 것이 더 이상 악이 아니게 되는 것. 한 시대에 선이었던 것이 악으로 재조명되는 것.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런 변화는 대개가 점진적으로 단계를 밟아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의 사람들은 시대에 보조를 맞추며 서서히 익숙해지고, 체념하거나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어나간다. 한때 내가 좋아했던 수영 수업에서처럼 물속으로 갑자기 던져지거나, 반대로 성인아토피 걸린 사람마냥 갑자기 물 밖으로 끄집어내어지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런 일이 생겼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장편소설 『킨』의 주인공 다나의 경우다.


1970년대 후반 현재, 꿈많은 작가 지망생이며, 가난하지만 행복한 신혼을 누리고 있는 이 젊은 여성이 어느날 맞닥뜨린 운명은 황당하고 가혹하다. 집안에 있는데 느닷없이 격한 현기증이 덮쳐오면서, 1815년으로부터 1835년 사이 언젠가의 미국 남부 어느 농가로 내동댕이쳐지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것은 전혀 영적인 시간여행이 아니어서, 다나는 제 생생한 피와 살, 명징한 정신을 그대로 지닌 채  생경한 시대에 불친절하게 놓여진다. 맨몸으로 맞닥뜨리기에는, 특히 다나에게 조금도 친절할 수 없는 곳이다. 노예제도가 횡행하는 시대, 미국 남부의 옥수수 농장이 젊은 흑인 여성에게 어떻게 우호적인 공간일 수 있겠는가. 


남자처럼 바지를 입고, 읽고 쓸 줄 알며, 백인의 말씨를 지니고 노예다운 굴종 없이 ‘건방진’ 그녀를, 어쨌든 농장 사람들은 받아들인다.  홀연히 나타나 며칠이고 몇달이고 머물다가 눈앞에서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그 초현실성조차 묻고 넘어간다. 마녀로서의 가능성이 그 현재적인 가치보다 중요하지 않아서인지 일종의 체념적 수용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곳 사람들은 그녀에게 적응하는 한편, 그녀를 그곳에 적응하게 만든다.  


갑자기 독소로 가득찬 물에 내던져져 머리끝까지 잠긴 채 기약없는 세월을 버텨내야 한다면, 일단 적응하는 게 선결 과제일 것이다. 소설은 그 모멸스러운 과정을 실감나게 그려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노예제도는 끔찍한 악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시스템이다. 그들중 누구도 특별히 악하지 않다. 나름의 방식으로 합리적이다. 그 모두가 그 악을 호흡하고, 그 악을 학습하고, 그 악에 푹 잠겨서 그 익숙한 질서 속에 제 자리를 찾고 나름의 안온함을 확보한다. 그리하여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그 악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것이다. 만민평등과 인권의 현대적인 개념을 존재 깊이 각인한 채로 이 상황에 들어오게 된 다나조차도 그런 행보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눈앞의 채찍질, 코앞의 발길질을 모면하기 위한 본능적인 반응을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게으른 검둥이들!” 세라는 누군가에게 압력을 행사해야 할 때면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하러 힘들게 일하겠어요? 얻는 게 뭐가 있다고.”

세라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내가 등가죽을 벗겨놓을 테니까. 저것들이 안 하는 일을 내가 떠맡을 생각은 없거든. 안그래?” 

277쪽 


농장의 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여장부 타입의 노예 세라와 다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는 악한 시스템의 피해자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대처 속에 어떻게 부역자가 되어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개인의 성실함은 아이러니하게도 일종의 독이다. 공평함의 감각 속에서, 원망의 화살은 가해자보다는 동료 피해자들을 향한다. 노예제도의 최대 수혜자인 농장주들은 잔혹한 감독관을 따로 둠으로써 적의의 방향을 교묘히 호도한다.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필부필부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시스템에 적응하고 시스템의 목소리에 순응하는 것이 결국에는 악의 재생산에 부역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풍경이다.  (가만, 이것은 명절날 며느리가 종처럼 종종거리며 식사 시중을 들고 부엌 일을 하고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결국은 시어머니나 동서나 시누이 등 다른 여자가 그 일을 떠맡게 될 때의 바로 그 딜레마가 아닌가!)  안온하게 잠겨있는 물 속에서는 모든 것이 둔중해지는 법이다. 진실은 명징하지만, 아득히 먼 수면 밖에서 웅웅거릴 뿐이다. 다나는 그 안에서 이 시스템의 부당함을 설파하려 애쓰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누구도 구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아주 작은 흐름을 일으키기는 한다. 노예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 것이다. 언젠가는 썰물을 일으킬, 씨앗같은 밀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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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그 역사적인 이벤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빠른 물살처럼 흘렀다. 그 조류가, 70년 강고했던 어떤 절대적인 것들을 흐물흐물 무너뜨리는 게 선연히 눈에 보였다. 긴 세월 절대악으로 상정되던 집단의 계승자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선을 넘어 다가왔다. 빨간 털로 뒤덮인 멧돼지가 아니고, 아무 때나 벼락같이 포효하는 괴팍한 괴물도 아니었다. 그는 문명인처럼 말하고, 농담을 건네고, 예의를 지키고, 후루룩 냉면을 먹었다. 아내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가 끝내 괴물로 남아 있기를 바라던 사람들로서는 당혹스러울 순간들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으로 그 장면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북한에 대한 적의와 적화통일의 공포에 사로잡혀 평생을 보낸 세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 공포에 속절없이 좌지우지 되는 동안 망가져가던 나라 꼴을 생각했다. 그들은 주사파가 북한에 나라를 갖다바치려고 하고 있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삼일절에 박근혜의 사진을 들고 종로 거리에 운집했었다. 언젯적 주사파인가. 화가 치밀기보다는 애잔함이 밀려와서, 나는 그 무리가 헤드라이트 불빛에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은 토끼같고 노루같다고 생각했다. 공포에 머리 끝까지 잠겨 감각이 둔중해져버린 사람들. 물살이 일 때마다 필사적으로 팔을 내젓는 가련한 존재들. 하지만 결국은 어떤 물도 고여있지 못한다. 독이 되어버린 물은 더더욱 그렇다. 


그들도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게 될 것이다. 

바야흐로, 썰물의 시간이다.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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