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 『전문가들의 사회』
- 겁내지 않고 살아가는 길
1년 전쯤에 집으로, 엄청 두꺼운 서류뭉치가 배달되어 온 적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가 분양을 받은 상가와 관련된 소송 서류였다. 서류 제목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소유권 확인 및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이었는데, 그 '상가'와 관련된 사연은 일단 뒤로 하고 어찌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피고인 50여명에 대해 청구된 '부당이득금'이 무려 2억 얼마였던 데다가, 서류에는 읽으면 읽을수록 '소송 서류는 왜 한국말로 안 쓰는거야' 싶을 정도로 해독하기 어려운 법률용어가 난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처음에는 우리가 피고인지도 몰랐다. '부당이득'은 커녕 그 상가에서 무슨 '이득'도 얻은 적이 없었으니 당황스러움은 두 배, 아니 한 스무배쯤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날로 변호사, 법무사 등등을 섭외하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상담까지 받고 하였는데……. 첫번째 변호사가 나에게 해 준 말은, '이거 심각한 거에요. 얼른 착수하도록 하죠' 였다. 그래서 나는 착수금을 입금하고, 무슨 계약 비슷한 그런 걸 하려고 했다. 그랬으면 큰일날 뻔 했다. 두번째 변호사는 완전히 다른 말을 했다. '이거 진행 되려면 아마 1년은 넘게 있어야 할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까지 큰 일은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그리고 '아직 변호사 선임 안 해도 되니까, 다음 소장이 날아올 때까지 계셨다가 피고분들이 공동으로 선임하시는 게 좋아요' 하였다. 아, 그러고 나서야 나는 '안심' 하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사법의 체제'에 대한 나의 반감은 더욱 심해졌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만 서류를 써놔도 괜찮을 것을 그렇게까지 알아듣기 힘든 말로 써 놓아야 하는가 싶었다. 심지어 문서가 지시하는 내용이 심각하게 어려울 것도 아닌 것인데 말이다. 그래 뭐, 최대한 이해해서 내가 알 수 없는 (그 체제)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만, '예전부터 그런 것', '관례여서 어쩔 수 없음'이 진짜 이유라고 한다면, 몹시 화가 날 것이다.
일리치는 그렇게 된 이유가 '상품화된 삶'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사실 '법률' 외에도 현대적 삶의 거의 모든 부분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능력'의 환원주의와 아주 많은 관련이 있다. 과거에 인류는 보다 나은 생활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다양한 능력을 '스스로' 갈고 닦아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다 필요없다.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사면 되니까. 그렇게 되면 나머지 능력은 살아가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능력이 된다. 모두 '취미'와 '여가'의 영역에 봉인되고 마는 것이다. 당연히 삶은 의존적이 되고, 인간 각자의 자립도는 떨어지게 되는데, 내가 딱 그랬다. 법원에 찾아가고, 변호사를 찾아갈 때마다 스스로가 얼마나 바보같이 느껴졌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지금의 체제는 내 개인적으로는 '불쾌한 체제'고, 인류적인 차원에서 보기에는 '무능력의 체제'인 셈이다.
사실 나는 무언가 대단한 혁명이 일어나서 이 체제가 순식간에 바뀌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런 변혁을 이루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냥 조금 이기적인 느낌으로 내 능력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런 느낌으로 살려고 한다. 어쨌거나 나는, 뭐랄까 겁먹지 않고, '긍지'를 잃고 싶지가 않다.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으로 늘려가고 싶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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