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이루어졌거나, 결코 이룰 수 없는 '벗어나기'
비트겐슈타인 말대로, 존재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아주아주 짧은 찰나에서 수도 없이 많은 존재들이 생겼다가 사라진다. 들뢰즈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는 그저 아주 어렴풋이만 알 것 같다. '질문'으로 (미래의)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 잡으려고 했던 것은 멀리도 아니고, 아주 살짝 비켜선다. 그러면 다시 질문하겠지. 그러면 그것은 또 살짝 비켜서고 말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바뀌는 것이 없는 채로……, 무언가를 보태거나 빼는 방식으로, '안정'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조금씩 비켜서며 손에 잡히지 않는 '존재' 덕에 '불안'은 여러 상태들 중에 특정한 어떤 상태가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조건이 되고 만다. 그러는 사이에도 몸의 세포들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고, 의식은 끝도 없이 널뛰기를 한다.
그러는 사이에 좋든 싫든 무언가가 변하게 마련이다. 만약 원하는 바대로의 인간이 되었다면, 이미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 그렇다면, 어느 쪽이어도 절망할 필요가 없다. 전자라면, 이미 그러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후자라면 자신이 어떻게 하더라도 될 수 없는 것이니까 자신을 탓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지각할 수 없는 '생성/되기'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니까. 우리는 그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청소를 좀 더 열심히 하고, 미래를 향하고, 과거를 향하고 있는 질문의 머리를 '지금/여기'로 돌려오고, 마음을 좀 더 편안하게 갖는 것. 그런 정도의 노력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잘 사는 법'을 연습한다고 손해를 보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모른다, 자기가 '지각할 수 없는 생성/되기들'이 그 사이에 벌어질지도. 그렇게 믿으며 사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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