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씨앗문장

고향, 태어난 곳이 아니라 살아온 곳의 이름

by 북드라망 2018. 7. 10.

고향, 태어난 곳이 아니라 살아온 곳의 이름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순간부터 오늘날 인류는 홈-리스라는 공통운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500년 동안 우리는 방방곡곡 연결된 세계 속에서 차례차례 집을 잃어버렸고, 조상이 살던 땅에서 뿌리 뽑혔다. 그래서 오늘날 인간다운 삶을 위한 키워드는 두 가지다. 첫째는 내가 태어난 땅이 여러 세대가 삶을 지속할 만큼 풍요로운가이고, 둘째는 낯선 땅으로 옮겨 갔을 때 새로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이다. 이 두 조건 중 하나라도 갖추기 위하여 우리는 모두 필사적으로 살고 있다. 언어를 배우고, 비자를 얻고, 노동을 팔고 있다.

- 김해완, 『뉴욕과 지성』, 79쪽


우리 아버지는 1950년 1월 서울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라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형님과 누님들, 그러니까 나의 큰아버지들과 고모님들은 대부분 평양에서 태어나셨다. 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평양에서 큰 방적공장을 경영하실 정도였으니 당시로서는 큰 부자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전쟁이 나기 전에 이미 사업을 정리해 서울로 내려오셔서 다시 사업을 번창시키시고, 평양에 있던 처와 자식들을 차례로 서울로 부르셨다. 그러다가 전쟁이 터져서 할아버지는 납북되시고, 땅문서, 사진, 현금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전쟁 중에 싹 잃어버렸다. 이후에 할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한 5남매가 어렵게, 그렇게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 아버지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랐고,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할아버지의 이름도 다 커서야 알았다. 




평양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서울로 왔다가, 다시 인천으로, 다시 서울로 수원으로, 안양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명절에 친척들이 모이면 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사람도 없고, ‘우리 집안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 가족은 어찌된 일인지 그냥 모여 있기만 했다. 그러다가 아침 먹고, 점심 먹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초등학생이 되고,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점점 더 크게 이상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자신의 고향을 ‘인천’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어릴 때 내가 "아빠 고향은 어디야"라고 물으면 늘 "인천이지. 태어나긴 서울서 태어났지만"이라고 답하곤 하셨다. 그러시곤 "원래 고향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오래 산 곳이야"라고 덧붙이셨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지의 저런 정의에 완전히 공감한다. ‘고향’은 무엇보다 ‘기억’에 뿌리박힌 곳이어야 한다. 거기서 먹고, 자고, 놀면서 차곡차곡 쌓은 기억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마도 ‘뿌리를 내린다’는 건 그런 의미일 것이다. 


이제 아버지의 형제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아버지 바로 위의 형님만 남으셨다. 우리 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지난 10년 사이에 모두 돌아가셨다. 이제는 모두 모였다 하면 장례식장인데, 슬퍼할 것은 장례 첫날 모두 슬퍼하고, 그 다음부터는 가장 큰 어른이 가족사를 이야기해 주곤 하신다. 사촌들은 동그랗게 모여 그 이야기를 듣는다. 모래알 같았던 어린 시절의 명절 풍경과 대비되는 풍경이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작은고모가 아버지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그 고모님께서 지난달에 돌아가셨다. 작은고모의 장례식장에서 혼자 남은 큰아버지께서 그 역할(가족사를 이야기해 주는)을 맡은 것은 정말이지 의외였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 큰아버지가 ‘말씀’이라는 걸 하시는 걸 거의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런 분이 때때로 웃으면서, 때때로 울면서 지난 이야기들을 차례차례 풀어 놓으셨다. 구술자에 따라 조금씩 이야기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것대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처음 내려온 세대들이 대부분 떠나고 다음 세대가 남았다. 아무래도 이 가족은 지난 70여년 동안 이곳을 ‘고향’으로 만들었던 게 아닌가 싶다. 깊게 남은 슬픔을 웃음으로 바꿀 정도로 끈질기게 살아남은 셈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