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
-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다', 이 말에 너무 크게 감동하여서, 며칠 동안, 아니 몇주 동안 마음 속으로 내내 읊으며 다녔던 적이 있다. 그 말에 비춰 보면,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일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의 태고난, 혹은 고유한 어떤 '본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맺고 있는 '사회적관계'가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결정한다. 나는 여전히 이 말을 좋아한다. 내가 본성적으로 주어진 그 어떤 '자유'도 없으며,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책무' 같은 것도 없다는 걸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한 것이 없지는 않다. 예전에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보아야 할 것은 어떤 개체가 아니라, 사회라고 생각했었다. 그걸 바꾸면 개체는 '자연적으로' 바뀐다고 생각했으니까.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적이게도 그럴리가 없다. 그런 식으로 변하지 않는다. 솔직히 변하기는 하는지 잘 모르겠다. '본성'과는 별개의 어떤 근본적인 지점(그게 생물학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에서부터 극복할 수 없는 제약 같은 게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는 나 스스로가 할 수 없다고 해서, 모두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성급한 일반화 또는 확대해석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변할 수 있을까, 없을까 사이의 묘한 경계지대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는 것 같다.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이른바 '실천')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들을 '인간'이라는 두루뭉술한 범주로 묶지 않고, 그대로 보고, 듣는 것 뿐이다. 그게 최선이 아닐까 싶다. 평생 뭘 해야할지 모르는 채로 애매한 공간에 갇혀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굳이 내가 살 곳을 나의 '자유'로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게 판타지라고 하더라도, 나는 기꺼이 그 경계에서 살기를 원한다. 잘 듣고, 잘 보는 것이 어쩌면 전부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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