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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

워킹데드 - 인간의 적은 언제나 인간

by 북드라망 2018. 5. 16.

워킹데드 - 인간의 적은 언제나 인간




인기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에서는 (여느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그렇듯이) 인간이 인간의 적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사실 투쟁, 경쟁 요소에 '살인'이 더해진 스토리를 가진 여느 작품들에서도 인간의 적은 늘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킹데드』와 같은 작품들에서 '인간의 적이 된 인간'이라는 요소가 더욱 도드라지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바로 그점을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적으로 등장하는 다른 작품들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을 결정적으로 가르는 요소는 다름 아닌 '문명'이다. 전자에서는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에 대한 욕심이 사건을 전개해가는 동력으로 작용하는데 비해서, 후자에서는 오로지 '생존' 그 자체에 모든 긴장이 걸려있다. 


주인공 집단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죽었으나 죽지 않은 좀비를 '워커'라고 부른다. 워커들은 어디에나 있지만 느리고 소수일 때는 그다지 무서운 적이 아니다. 이들이 위협적인 적으로 등장할 때는 큰 소리에 반응해서 모여들 때, 그러니까 엄청나게 숫자가 많아질 때 뿐이다. '워커'들의 역할은 복잡하지 않다. '워커'들의 위협 때문에 인간은 펜스나 철조망 등의 경계 바깥에서 자유롭게, 장시간 활동할 수 없다. 따라서 농경을 하기가 어렵다. 농경을 통한 식량 확보가 어려운 조건에서 주요한 식량은 '종말' 이전에 생산된 인스턴트 음식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음식은 수량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식량은 만성적인 부족 상태가 된다. 이렇게 인간들이 서로 죽고, 죽이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위협적인 조건이 만들어진다. 언제든 '워커'들에게 공격받을 수 있고, 굶어죽을 수 있는 상태에서 인간들은 어떻게 될까?


워킹데드의 세계에서 (과거에) 슈퍼마켓이었던 곳은 마치 '유전'油田과 같다. 어디에 있는지 찾아다녀야 하고, 찾은 후에는 무너진 건물 잔해를 뒤져서 쓸만한 것들을 건져야 한다. 문제는 그런 곳을 찾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고, 찾았다고 하더라도 건물 내부의 어느 모퉁이에서 갑자기 워커를 만날 수도 있다. 모든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음식이 떨어지고 수일이 지나도록 그런 건물들 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럴 때 불룩한 배낭을 메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이를 안고가는 가족을 마주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족을 모두 죽이고 빼앗을 수도 있고, 음식을 나누어 달라고 부탁 할 수도 있다. 그 가족은 어떨까? 식량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상대를 죽여버릴 수도 있고, 순순히 음식을 나누어 줄 수도 있으며, 겁을 먹고 모든 음식을 다 내놓고 살려달라고 빌 수도 있다. '문명'이 작동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상대가 암묵적인 규약에 따라 행동한다고 하는 윤리적 프로세스(또는 습관이)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상대가 '~할 수도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일단 타자를 '적'으로 가정하게끔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를 '동지'로 가정하는 것보다 '적'으로 가정하는 것이 생존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먼저 '경계'하지 않으면 부지불식 간에 죽게 된다. 


죽음을 피하는 방법, 낯선 사람에게는 일단 총부터 겨눈다


『워킹데드』의 드라마적인 세계는 바로 그러한 '경계심' 덕분에 팽팽한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경계하지 않는 사람부터 죽게 되는 세계이기 때문에 집단을 이룰 경우 생존확률은 훨씬 높아진다는 점이다. '집단' 안에서는 타인에 대한 경계를 줄일 수 있고, 여러 사람이 함께 활동하고 있는 만큼 경계할 수 있는 범위도 넓어지며, 또한 음식이나 무기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것도 훨씬 수월해 진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유를 확실하게 설명해준다고 할까? 그래서 그런지 『워킹데드』를 보는 내내 흔한 '원시인'의 표상이 겹쳐진다. 맹수들(워커)이 어슬렁거리는 동굴 밖 세계, 어쩌다 마주친 다른 부족(적으로 만나는 인간)과의 분쟁까지, 가상의 미래를 다룬 드라마에서 선사의 과거를 보게될 줄이야. 헌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워킹데드』에서 다루는 모습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고 사실상 인류의 현재이다. 가족의 울타리 바깥, 타자와의 전투가 벌어지는 사회, 이익을 앞에두고 벌어지는 이합과 집산 등등. '현재'는 역사상의 모든 인류가 경험해 왔던 그때그때의 현재인 셈이다. 드라마가 극적인 '힘'을 갖게 되는 순간은 바로 이런 형태의 리얼리티 때문이 아닐런지. 그리고 이 리얼리티의 극한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자신'이 적으로 돌아오는 상황이 있다.


인간의 가장 무서운 적은 언제나 인간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자신'이라는 인간이다. 『워킹데드』의 주인공 릭을 보면 그 점이 아주 잘 드러난다. 시즌 1부터 5까지 릭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선량한 지역 보안관이 자기 집단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을 가차없이 죽이는 '리더'로 재탄생하기까지 릭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갈등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나름의 확신을 세워가면서 난관을 돌파한다. 반대로 다섯 차례의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죽어간 캐릭터들 중 다수는 타자화 되어버린 자기자신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죽음에 뛰어들거나, 쉽게 죽임을 당하는 식으로 사라져갔다. 결국 자기가 자신을 죽인 것과 다름없는 셈이다.


주인공 릭은 끊임없이 자신의 결정이 옳은지에 대해서 갈등한다



『워킹데드』가 (인간의 대량학살 장면을 보여줄 수 없으니 '인간 아닌 인간'의 대량학살을 보여주려고 만든) 단순한 '좀비물'을 넘어서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자기자신'과 갈등하는 인간을 비추는 심도가 상당히 깊고, 모든 것이 파괴된 세계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인간들의 행동을 '리얼한 가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물론 좀비물 특유의 대량00 장면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제 곧 여름이다. 인기도 있고, 주제의식도 훌륭한 이 드라마를 아직도 못 봤다면, 꼭 한 번 보시길 바란다. 취향에 따라서는 참고보기 힘들 수도 있으니 그점은 각자 알아서들 주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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