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아빠의 은밀한 숨구멍이 막힐랑 말랑
이제 생후 9개월 차에 가까워졌다. 8개월 말호봉이랄까. 요즘 우리 딸은 밤에 자주 깬다. 심한 날은 거의 한두 시간 간격으로, 그나마 좀 괜찮은 날은 자정 전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깨다가 자정 이후에야 자는 것처럼 잔다. 그래서 피곤하다, 몹시 피곤하다. 그러나 물론 아빠의 피로는 엄마에 비할 것은 아니다. 솔직히 아빠는 일단 잠이 들고 난 다음엔 딸이 깨는지도 잘 모른다. 사랑하는 딸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잠 깨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정말 잘 모르겠다. 엄마는 깊이 잠든 것 같은데도 딸이 깨면 바로 일어난다. 아빠가 가장 늦게 잠들기 때문에, 이미 잠자리에 든 엄마가 딸이 깰 때마다 같이 깨는 걸 보았다.
아빠는 늦게 잔다. 20살 이후로 언제나 늦게 잤다. 아침에 꼭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늦게 일어났다. 꼭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경우에는 온몸으로 수면부족을 감당했다. 일찍 자는 것보다는 그게 더 좋았다. 음, 처음엔 좋았던 것 같은데, 나중엔 일찍 잘 수가 없게 되었다. 말하자면, 일찍 잠드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사실 이곳, 우리 집은 예전엔 야행성 동물들의 둥지마냥 해가 지고 나면 오히려 더욱 활기가 도는 집이었는데, 딸이 오고 난 후부터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저녁 8시가 되면 이른바 ‘아빠방’에 있는 작은 스탠드를 제외한 모든 불이 꺼진다. 엄마가 딸을 안고 얼러 재우고 나면, 엄마도 금방 잠자리에 든다. 이 모든 수면 돌입과정이 끝나고 나면 대략 9시 전후가 되는데, 이 시간은 아빠에겐 초저녁이다. 사실 아빠도 이 시간에 자보려고 몇 차례 시도를 해보기는 했다. 간혹 너무 피곤한 날, 눕자마자 잠이 들기도 했는데, 일어났을 때의 기분이 너무 상쾌했다. 온 가족이 같이 잠들고 일어나는 기분도 꽤 괜찮기도 했다. 그러나 몸 상태가 좀 좋은 날, 그러니까 피로가 좀 만만한 날엔 도저히 잠이 들 수 없었다. 그래서 요즘은 시도도 잘 안 한다. 물론 막 그렇게 열심히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뭐랄까, 그 시간에 자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그대로 잠들면, 그냥 자버리면, 아... 안 돼! 그렇다. 안 된다. 그럴 수는 없다.
아빠는 맞벌이 가정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유년기 이래로 늘 집에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던 사람이다. 게다가 성격이 특별히 사교적이거나 외향적인 것도 아니어서 노는 것도 주로 혼자 노는 걸 좋아했다. 아빠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그 많은 취미도 대부분 혼자, 방구석에서 즐기는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이 아빠는 그야말로 뼛속까지 ‘집돌이’다. 아빠의 이런 점은 ‘육아’에 있어서 양날의 검이 되었는데, 딱히 ‘바깥’에 목마름을 느끼지 않다 보니 집에서 애를 보는 걸 잘 견디는 것까지는 좋으나, 꼭지만 돌리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콸콸 쏟아지던 ‘혼자만의 시간’이 대폭 사라지다 보니 그야말로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아빠는 도저히 일찍 잠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흑. 엄마와 딸이 잠들고, 집안 불은 다 꺼진, 9시 이후의 그 시간이 얼마나 달콤한지, 하루에 두 번쯤 있으면 좋겠다 싶지만, 다들 알다시피 ‘저녁 9시 이후’라는 시간은 하루에 딱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그 시간은 유사 ‘혼자’인 시간으로 가용 가능한 신경의 10%쯤은 엄마와 딸이 자는 방으로 향해 있으나 나머지 90%는 그야말로 먹고 마시고 씹고 뜯고 즐기는 데 쓸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아빠가 밤마다 피의 축제를 벌이는가 싶겠지만 그럴 리가.
그 시간에 아빠는, 소설을 읽거나,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글을 끼적거리거나, 유튜브를 뒤적거리면서 올드록 넘버들을 찾아 듣(보)거나 한다. 이번 주에는 아끼고 아껴둔 <왕좌의 게임> 시즌7을 봐버렸다. 원래 계획은 시즌8이 나오면 한꺼번에 보는 거였는데.... 왜 그런 계획을 세웠는가 하면, 시즌7을 다 보고 나면 시즌8이 너무 보고 싶을 게 뻔해서였다. 시즌7을 다보고 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역시 계획대로 할 걸 그랬나 보다. 시즌8이 너무 보고 싶다. ㅠㅠ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만화 <원피스>가 87권까지 나온 걸 확인했으니 말이다.(현재 80권까지 봤다.) 앞으로 세 권만 더 나오면 한 방에 열권쯤 읽으리.
각설하고, 얼핏 보더라도 아빠가 그 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모두들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요즘 우리 딸이 자주 깬다. 그래서 아빠의 달콤한 시간도 자꾸 깨진다. 존 스노우와 대너리스가 드래곤을 앞에 두고 막, 눈이 맞느냐 마느냐 하는 막 그런 순간에 어둠 저편에 들려오는 ‘으애앵~ 으애앵~’. 뭐 별 수 있겠는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달려가는 수밖에. 그렇게 달려가 보면 우리 딸은 엎드린 채, 어딘가로 떠나려는 것처럼 범퍼를 두드리고 있다. 바로 그 순간 아빠는 조금 움찔하게 되는데,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고 방으로 달려오는 사이에 살짝 마음에 일었던 어떤 원망 비슷한 것이 조금 민망해서다.
이 시기 아기는 본격적으로 낯가림을 시작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워낙 개인차가 크기 때문에 빠른 아기들은 백일 무렵부터 하기도 하고, 늦는 경우엔 10개월쯤에 하기도 한단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 딸은 요즘 들어 부쩍 낯을 가리는 듯 보이는데, 심한 편이 아니어서 그런지 ‘아, 얘가 이제 낯을 가리는구나’ 하는 의식 없이 보면 전혀 낯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히 이전하고는 느낌이 다르다. 8개월쯤 되면 원근감도 생기고 입체를 지각하기도 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세상이 드디어 3D로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인 셈인데, 그래서 그런지 처음 보는 사람이나 오래간만에 보는 사람을 유심히, 정말 유심히 쳐다본다. 그뿐 아니다. 집에서는 소리도 지르고, 울고 웃고 하다가도 밖에만 나가면 금방 쫄보가 돼서 이리저리 눈알만 굴리던 녀석이 며칠 전에 갔던 소아과 로비에서 소리를 꽥 지르고 헤헤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전엔 전혀 볼 수 없었던 행동이다.
우리 딸의 뇌 속에선 감각과 지각이 매일매일 폭발 중이지 않을까 싶다. 과장 좀 보태자면 매일 보는 엄마 아빠도 매일매일 새롭게 보일 정도로 감각의 길이 새롭게 생겨날 것이다. 밤에 자꾸 깨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어른들이 큰 노력 없이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이유는 일상적으로 느끼는 감각이 매번 새롭지 않기 때문이다. 매번 새롭게 느끼면, 잠깐은 좋겠지만 그 얼마나 피곤한 일이겠는가. 매번 새로운 정보를 처리해야 하니 말이다. 반면에 아기에게는 언제나 모든 것이 새롭다. 얼마나 피곤할까. 여하간 우리 딸이 밤에 자주 깨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발달하는 기관들로 들어오는 다종다양 형형색색의 감각들을 처리하느라 수면상태를 유지하는 힘이 약해진 것이다. 쉽게 말해 피곤해서 잠꼬대를 하고, 잠꼬대를 하다 보니 깨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그녀의 피로를 이해하고 나니, 원망 같은 건 금방 사라지고 만다. 뭐 얼음과 불이 만나는 그 결정적인 순간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우리 딸이 안 깨고 잘 자고, 일어나 잘 먹고, 잘 노는 게 중요하지. 그렇게 달려가서 다시 잠 드는지 좀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번쩍 안아 올리는데, 올리자마자 폭 안겨온다.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그럴 때면 아빠는 어쩐지 조금 찡해지곤 한다. 무엇보다 우리 딸이 의지를 가지고 몸을 움직여온다는 사실이 뭉클하고, 내가 해낸 일이 뿌듯해서다.
밤에 잠을 잘 자지 않는 아빠, 낮에 햇볕 받는 걸 영 싫어하는 아빠는 우리 딸이 태어나기 전까지 인생은 결국 어떻게 해도 허무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늘 사로잡혀 있었더랬다. 그래서 언제나 ‘살아서 뭣하나’ 하는 생각과도 자주 다투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 따위 전혀 하지도 들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우리 딸이 고 물만두 같은 주먹으로 쾅 부숴 버린 것 같다. 아빠는 여러모로 딸에게 고맙다.
_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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