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슬럼프와 이유식과,
아기의 낚시와 아빠의 자기극복
우리 딸이 태어난지 6개월 무렵이 되었을 때, 나는 어쩐지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체력적으로는 항상 몸이 무겁게 느껴졌고, 심리적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갑갑했다. 그래서 그 무렵엔 여러 일상적인 일들을 하나하나 할 때마다 마음을 다져야 했다. 힘이 드니까 괜히 아기에게 짜증을 내지는 않을까, 또는 나도 모르게 힘이 빠져서 안고 있던 아기를 놓치진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던 중에 문득 생각했다. 사람마다 느끼는 피로감이야 다들 제각각이고, 일찍 피로감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럴 수도 있는데, 나 스스로 익히 아는 바 나는 피로감을 거의 광속으로 느끼는 타입이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객관적’으로는 충분히 견딜 만한 상태임에도 ‘피로’의 ‘ㅍ’만 봐도 ‘아 피곤해’ 소리가 절로 나오는 평소의 나라면,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한계’가 객관적으로는 전혀 ‘한계’가 아닐 수도 있다. 아, 그러니까 지금은 사실 ‘한계’가 아니다. 이상하기 그지없는 추론과 결론이지만, 거기에 다다르고 난 후에 슬럼프라면 슬럼프일 수 있는 그 상태에서 벗어났다. 벗어나고 나니 변한 건 아무것도 없...지는 않고 일은 더 많아졌음에도 몸과 마음은 더욱 가뿐해졌다. 일이 많아진 이유는 우리 딸이 본격적으로 이유식을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유식, 아... 이유식. 그것은 아마도 육아의 꽃이 아닐까? 분유는 어른 입장에서 보자면 어쩐지 ‘음식’ 같지가 않다. 사실 신기하기도 했다. 종종 아빠는 분유병을 보면서, 그걸 빨아먹는 딸을 보면서, ‘이것만 먹어도 되는 걸까’ 생각하곤 했다. 뭐 그것만 먹어도 된다. 놀랍게도 이유식을 시작하기 이전의 아기들은 ‘물’을 마시지 않아도 된다. 물 마시는 걸 아주 좋아하는 아빠로서는 그게 너무 신기했지만, 이쪽 계통(육아계?)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다. 뭐 여하튼, 그래서 분유만 먹을 때는 시간마다 따박따박 분유통을 아기 입에 물리면서도, 아기가 그걸 먹고 쑥쑥 크고 있는 걸 보면서도, 어쩐지 아기가 무언가를 ‘먹고 있다’는 실감이 좀 적었다. 반면에 이유식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이건 음식의 굵기와 묽기, 양념이 조금 다르다 뿐이지 그야말로 ‘밥’의 영역에 있다. ‘젖’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그야말로 문명의 산물이다. 재료들에 불(火)과 물(水)이 닿아 만들어지고, 그릇에 담겨, 숟가락으로 퍼먹어야 하는, 그야말로 인간의 음식인 것이다. 우리 딸은 그렇게 인간의 세계에 한 발 내딛었고 아빠는 감격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여전히 짐승에 가까운 모습으로 밥을 먹는다.
이유식을 만드는 일은 딱히 고되지는 않다. 게다가 아빠는 요리하는 걸 좋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물론, 이유식은 ‘요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맛’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유식에는 간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원재료를 송송 썰어서 아기가 잇몸으로만 씹어도 충분히 넘길 수 있을 정도로 푸욱 익히고, 잘게 부수는 게 전부다. 물론 원재료의 맛이 있으니 아예 ‘맛’ 자체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만드는 이의 감각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니까 그걸 먹을 아기에 대한 애정, 아빠로서의 책임감이랄지 그런 것들을 제외한 조리과정 자체만 두고 보면 철저하게 기능적이다. 재료의 선택도 그렇다. 보통 쌀만 들어간 10배죽으로 시작해서 재료를 하나씩 추가해간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싶으면 쌀과 고기를 기본으로 해서 채소를 바꿔가는 식이다. 물론 생선이나, 고구마, 과일 등을 넣어주기도 한다.
이유식 만들기의 4할은 재료를 씻고 써는 일에 있다. 푹 삶아서 갈거나 빻는 일은 1할쯤 될까? 나머지 5할은? 설거지다. 설거지, 이유식을 만들고 나면 정말 산더미 같이 설거지가 쌓인다. 도마, 냄비, 계량용 그릇, 믹서, 절구통, 절구, 거름망, 소분용기, 주걱, 아기가 먹을 것이다 보니 한번 입에 들어간 숟가락을 다시 쓸 수 없으므로 여러 개의 숟가락까지. 좁은 부엌이 미어터진다. 그렇게 만든 이유식 이래봐야 총량이 고작 600ml 남짓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그렇게 설거지 거리가 쏟아진다고 해도 다 괜찮다. 뭐 설거지야 후루룩 해버리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아기를 재워놓고 이유식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아기가 중간에 깨는 경우다. 냄비 속에서 밥알은 눌러 붙고 아기는 울고, 와중에 택배 기사님까지 벨을 누르시면, 현관벨이 울리는 가운데 꼭 받아야 할 전화까지 온다면 그야말로 멘탈이 무너진다. 다행인 건 매번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랄까? 그러나 한번 그런 일을 겪고 공포가 각인되면, 이유식 제조를 할 때마다 불안해진다.
그러나 이유식 만들기는 이유식 먹이기에 비하면 훨씬 할만하다. 창조성을 발휘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원료를 변형시켜서 다른 가치를 가진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뭐랄까 인간의 그런 어떤 그런 본질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그런 어떤 그런 것이기도 하니까. 말하자면 ‘참아야 할 요소’가 훨씬 적다. 그러나 ‘먹이기’는 다른 문제다. 먹이기는 영양공급이자 교육이며, 동시에 놀이인 총체적인 문명화 과정이다. 요약하면 ‘인내’다. 물론 이상적인 그림도 있다. 미끈한 유아용 식탁에 알록달록한 유아용 식기, 밥풀 하나 묻지 않은 턱받이를 찬 세상 사랑스러운 아기의 모습 말이다. 그러나 그건 그냥 이상인 거고, 현실은 다르다. 완전 다르다.
식탁 앞에서 우리 딸은 한 마리 맹수와도 같다. 이유식을 떠먹여주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숟가락을 낚아챈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간다.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밥풀과 고기들, 청경채, 당근, 고구마, 단호박, 비트, 시금치, 아아... 흘러내린 친구들이여... 아빠가 숟가락을 뺏으면, 이유식 범벅이 된 손으로 발을 잡는다. 허리를 굽혀 발가락을 빨아야 하니까. (반찬 같은 건가?) 다시 이유식이 입 앞으로 간다. 이번에도 숟가락을 확 잡아채는데, 그야말로 전광석화다. 그러고는 숟가락을 마구 흔든다. 이유식들은 벽으로, 바닥으로, 아빠의 안경으로 산개한다. 뭐 괜찮다. 원래 이유식의 절반은 버리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단 두어 번의 장난이 가져오는 결과가 파국적이어서 그렇지 대체로 아주 잘 받아먹는다. 사실 장난을 치는 건 그다지 곤란하지 않다. 오히려 진짜 아빠가 힘든 건 기다리는 것이다. 이유식을 퍼서 숟가락을 넘겨주고 난 다음, 아기가 돌려주거나 아빠가 도로 빼앗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 그게 사실 가장 힘들다. 왜냐하면 이유식만 하루 종일 주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유식을 먹인 다음엔 이어서 분유를 먹여야 하고, 분유를 먹인 다음엔 다음 이유식을 만들거나, 빨래를 하거나, 어쨌거나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언제나 마음이 급해지고 만다. 그렇다.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전혀 우아하지 않다.
그런데, 숟가락을 아기의 입에 넣어줄 때, 아기가 그걸 가지고 장난칠 때, 아빠의 마음이 몹시 급해질 때, 우리 딸이 괜히, 정말 괜히 아무 이유 없이 아빠를 보고 웃을 때가 있다. 뭐 이유식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빠는 괜히 조금 미안해진다. 어쩐지, 아기가 아빠의 급한 마음을 알아채고 ‘아빠 좀 봐주세요, 재미있어서 그래요’ 이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아주 잠깐 미안한 마음이 스치고, 아빠는 잽싸게 그 마음을 스스로에게 감춘다. 아빠도 원래 재미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웃는 딸을 보면서 같이 웃고, "아이고 맛있다, 맛있네" 하면서 장단도 맞춘다. 아기가 매번 태어난 상태 그대로라면 아빠는 아마 슬럼프를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아기는 매번 변하고, 시기마다 새로운 잠재성을 펼친다. 그 유동성이 있어서, 어느 순간 보여주는 ‘의미’를 담은 아기의 웃음이 있어서 매번 닥쳐오는 난관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물론 넘어설 때마다 골병이 드는 것 같고, 어쩐지 낚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그거야 뭐 ‘자식’된 자의 본성이니 기꺼이 받아들이리.
_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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