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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카프카와 함께

채식은 나의 삶, 육식은 나의 문학

by 북드라망 2018. 1. 11.

채식은 나의 삶, 육식은 나의 문학




카프카는 채식주의자


아셔요? 카프카는 채식주의자였습니다. 얼마나 철저했는지! 베를린으로 이사를 갈 것인지 말 것인지, 노동자 재해 보험공사를 계속 다닐 것인지 그만 둘 것인지를 결정할 때에도 우선은 채식을 계속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따져보았지요. 약혼을 앞둔 펠리체가 요리 실력을 자랑할 때에는 정말 단호했습니다. ‘우리집에서 필요한 것은 고기가 아닐 것이오!’ 폐결핵을 앓을 때에 의사가 육식을 권하자, 과감히 치료를 거부하기도 했지요. 채식은 나의 삶! “아니, 나는 방 하나와 채식 식단만이 필요하며, 그 밖에는 어떤 것도 필요없다!”(일기, 1914년 3월 9일)




카프카가 채식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프라하에서는 자연요법을 표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기나 생선 먹지 않기, 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하고 하늘을 보며 잠들기, 정원일 하기 등 자연과 밀착된 삶을 궁리했는데요. 그들처럼 카프카도 건강을 위해선 의사가 아니라 자기 몸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왜 굳이 고기가 문제 되었느냐구요? 카프카에게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은 카프카가 자주 앓았던 감기나 폐결핵 등의 질병에 육식 위주의 식단이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딴 데 있었지요. 카프카는 육식에서 무시무시한 ‘탐욕’을 읽어냈던 것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1913년 10월 가르다 호수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난 한 공과대학의 교수를 회상하면서, 카프카는 일기에 이렇게 적습니다.


그륀발트 교수는 리바 여행 중이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독일 뵈멘풍인 그의 코, 빈혈기가 있는 수척한 얼굴에 부어오르고 물집이 생긴 붉은 뺨, 아래 얼굴을 온통 뒤덮은 연한 황금색 수염. 식탐과 알코올 중독에 사로잡혀 있다. 뜨거운 수프를 삼킴. 껍질을 벗기지 않은 살라미 조각을 베어 물면서 동시에 핥는다. 이미 따듯해진 맥주를 한모금씩 심각하게 마신다. 코 주위로 땀이 난다. 가장 탐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냄새 맡는 것만으로는 실컷 맛볼 수 없는 역겨움[1913년 10월 15일]


역겨움이라니요! 카프카는 타인을 이런 저런 잣대로 평가하는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게다가 그가 딱히 좋다 싫다라고 진단했던 현상은 거의 없었지요. 그는 사건의 이면에서 꿈틀대는 만 가지의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였거든요. 도대체 저 그륀발트 교수는 뭘 그렇게 잘못했던 걸까요? 있다면 그의 죄는 하나였습니다. 바로 소시지를 좋아했다는 점!


교수가 살라미 한 조각을 베어 물 때 카프카는 자신의 무릎이 꺾일 정도로 절망합니다. 겨우 자신의 빈혈과 물집 잡힌 뺨을 해결하기 위해 식탁 위로 의식을 집중하는 모습이라니! 소시지를 문 것도 모자라 핥기까지? 아, 정말이지 철저하구나! 자신의 몸집을 불리기 위해서라면 타인의 삶이란 뜯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태도, 그것이 육식의 참된 의미였습니다. 카프카가 채식을 그토록 중요시한 까닭은 평범한 일상의 차원에서 쉴새없이 이루어지는 자아의 탐욕을 온 몸으로 거부하기 위해서였던 것이죠.



문학의 육식 


아셔요? 그럼에도 카프카는 육식이 난무하는 장면을 몇 번이나 그렸습니다. 사실 카프카의 작품에는 사이좋게 앉아 함께 식사 하거나, 차 마시며 대화 나누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먹음, 그것도 함께 먹음, 게다가 육식 파티는 아주 특별한 장면이 되지요. 카프카의 문학에서 육식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1919년 단편집 『시골의사』에 발표되었던 「재칼과 아랍인」의 한 장면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체가 놓이자마자, 재칼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재칼들은 하나하나가 마치 밧줄에 묶여 어쩔 수 없이 잡아당겨지듯이, 몸을 뒤로 빼면서, 배를 땅바닥에 질질 끌면서 다가왔다. 그것들은 아랍인들을 잊어버렸다. 증오심도 잊어버렸다.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고 있는 시체의 현존이 모든 것을 녹여버렸고, 다만 그것들을 매료시켰다. 벌써 한 마리가 목에 달라붙었고 단번에 동맥을 찾아냈다. 가망은 없어도 거대한 불을 어떻게 해서든지 끄려고 미친 듯이 뿜어대는 작은 펌프처럼, 그것의 몸의 모든 근육은 제자리에서 늘어나기도 하고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자 이미 모두가 같은 일을 하면서 그것들은 시체 위에 산을 이루고 있었다.(「재칼과 아랍인」) 




참으로 잔인합니다. 무시무시합니다.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고 있는 시체, 사방으로 튀겨 나가는 살점들, 그리고 피, 피! 아, 그 속에 낙타와 재칼의 무리가 함께 엉겨붙어 있군요... 그럼, 사막 한 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살과 피의 난무는 그륀발트 박사의 식사와 무엇이 다를까요? 뜯기며 뜯는 밤, 검은 하늘 아래 붉은 모래산. 찢어진 낙타의 뱃속에 고개를 박고 뼈를 핥을 때, 재칼은 더 이상 먹이와 분리되지 않는 포식자입니다. 그 순간 인간을 향한 증오가 그들을 떠나지요. 무리는 산 채로 죽어가는 먹이 속에 녹아들어갑니다.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재칼들은 얼어붙은 밤을 뜨거운 살육으로 녹이면서, 적막했던 사막에 생의 또다른 풍경을 선사하지요.


카프카는 육식자 중의 육식자 재칼을 육식하는 인간과는 전혀 다르게 그렸습니다. 그들은 살아있는 육체를 보면 저절로 주둥이가 열리고, 이빨에 힘이 돋고, 뜨겁고도 쓴 열기가 입 사이로 흘러나오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들은 그들의 살아 있는 육체만 보아도 탈주하지요.” 재칼의 무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순수입니다. 자타의 낡은 구분을 벗어나는 천진한 탈주! 사실 그들은 오랫동안 사막의 패권을 다투어왔던 아랍인에 대해서도 죽일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만 인간의 피를 마심으로써 낡아 문드러진 문명과 자연의 대립을 종식시키려고 했을 뿐이죠. 아랍인들은 죽은 낙타를 던져주면서 재칼을 자신의 개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비웃었습니다. 허나, 재칼의 무리는 벌써 흥건한 낙타의 피 속에서 현존하는 모든 경계를 잊은 상태로 도약하고 있었습니다. 존재와 존재가 한 입에서 만나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만 있다면! 이것이 카프카 문학의 육식 이미지입니다.


카프카는 인간의 육식만이 아니라 맹금의 인식(人食)에 대해서도 그렸지요. 유고로 남은 작품 「독수리」입니다. 이 짧은 이야기의 마지막은 정말 아찔합니다. 독수리에게 두 발을 쪼이고 있던 한 사나이가 고통을 참지 못해 신사에게 독수리를 쏴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독수리가 곧장 그의 입 속으로 달려듭니다. 이 사나이는 어떻게 되느냐구요? 그는 해방됩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냐구요? 그는 직전까지 자신이 느꼈던 고통이 단지 발이 아파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굴레 자체가 주는 아픔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제 나는 독수리가 모든 것을 알아들었음을 알았고, 그것은 날아올라, 몸을 한껏 뒤로 젖히더니 창을 던지는 사람처럼 그 부리를 곧장 나의 입을 통해서 내 몸 깊숙이 찔러 넣었다. 나는 뒤로 넘어지면서 해방감을 맛보았다. 모든 심연을 채우고 모든 강둑을 넘쳐흐르는 나의 피 속에서 그 독수리가 헤어날 길 없이 빠져 죽어갈 때.(「독수리」)


모든 심연을 채우고 모든 강둑을 넘쳐흐르는 나의 피! 카프카는 우리가 뜯고 뱉어야 할 것은 타인의 삶이 아니라 ‘자기’라고 하는 살덩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입 속으로 달려들었던 독수리도 헤어날 길 없는 자유를 맛보며 사라지지요. ‘인간’과 ‘독수리’가 떠난 광야, 우리도 초원을 달려보아요.


인디언이 되었으면! 질주하는 말잔등에 잽싸게 올라타,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거듭거듭 짧게 전율해 봤으면, 마침내는 박차를 내던질 때까지, 실은 박차가 없었으니까, 마침내는 고삐를 집어던질 때까지, 실은 고삐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눈앞에 보이는 땅이라곤 매끈하게 풀이 깎인 광야뿐일 때까지, 이미 말모가지도 말대가리도 없이.(「인디언이 되려는 소망」)


글_오선민(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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