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카프카와 함께

카프카, 어느 투쟁의 기록

by 북드라망 2017. 12. 14.

어느 투쟁의 기록


 

나는 벽을 사랑하여요


“아아,” 하고 쥐가 말했다. “세상이 날마다 좁아지는구나. 처음만 해도 세상이 하도 넓어서 겁이 났었는데. 자꾸 달리다 보니 마침내 좌우로 멀리 벽이 보여 행복했었지. 그러나 이 긴 벽들이 어찌나 빨리 마주 달려오는지 어느새 나는 마지막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모퉁이엔 내가 달려 들어갈 덫이 놓여 있어.” - “넌 오직 달리는 방향만 바꾸면 되는 거야” 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었다.(카프카,「작은 우화」)



카프카의 유고 중에는 쥐가 벽을 만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쥐는 무척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요. 허방 속에서 허우적댈 수는 없기에 기대어 설 수 있는 벽을 만나 반가워했지만, 오히려 그 벽에 훅 압사될 지경에 놓입니다. ‘아, 어쩌지?’ 그때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나 출구를 알려주지요. ‘고개를 돌려!’ 그랬더니? 아뿔싸! 고양이가 꿀꺽!! 카프카는 고양이가 정말 나쁜 동물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 우화를 썼을까요? 이 짧은 우화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작품이 ‘벽’에 대한 우화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카프카는 ‘벽’을 사랑했지요. 그는 아버지도 없고, 학교도 없고, 회사도 없고,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그 어떤 질서도 없는 자유의 시공을 획득하려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벽을 끌어안고서 숨구멍을 찾으려 했지요. 우리는 타인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니까요. 아버지 어머니 없이는 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으며, 지긋지긋한 선생님이나 벅찬 회사가 있기에 세상 돌아가는 온갖 법칙을 깨우칠 수 있거든요. 무릎을 내리누르고, 의지의 마디마디를 꺾는 타자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속물적인 아버지의 간섭, 불가촉 천민이나 다름없는 체코의 유태인 생활, 저 위대한 베를린에서는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변방의 독일어 쓰기. 카프카는 이 모든 조건을 온전히 긍정했습니다. 그것들은 분명 나를 가두는 한계지만, 우리는 그 벽을 부등켜 안음으로써 벽 안의 세계와 그 너머를 공부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카프카의 출구 찾기 방법은 독특합니다. 벽 앞에서 또 다른 벽을 발견해 나가는 식으로 진행되거든요. 한 때 쥐는 벽이 있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 벽에 기대어 살 수는 없었어요. 나에게 안정감을 주고, 삶의 터전을 일구게 하는 것들이란 나의 활동반경을 제한하는 벽이기도 하니까요. 이 쥐는 참으로 예민합니다. ‘사방이 뚫려 있어서 못살겠다, 벽이 다가오니 못살겠다!’ 언제나 어디서나 못살 것 같은 지점만을 딱! 발견하거든요.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살 길을 뚫지요. 저는 이 쥐가 벽 발견하기를 좋아하는 녀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쥐는 뒤에 고양이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헌 벽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고양이의 입이라는 새 벽을 보고 싶어한 것은 아닐까요? 쥐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을 겁니다. ‘달리는 방향만 바꾸면 된다고? 옳거니!’



고개를 돌려라, 다시! 


카프카는 벽 앞에서 울부짖으며 반항하기 보다는 새로운 벽을 찾아나서는 이들을 그렸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고개를 돌리지요. 아버지만을 우러러보기를 요구하는 집 안에서 아들은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쳐다봅니다. 조련사의 손끝을 따라가고 있어야 할 때 원숭이는 피다 만 담배를 떠올리지요. 관객 앞에서 굶음을 연기해야 하는데 예술가는 그만 자신의 굶음을 응시합니다. 섬의 꼭대기에 앉아 깃발을 흔들며 구조선이 올 망망대해를 보고 있어야 하는 조난자는 훌훌 털고 일어섭니다. 무인도의 곳곳을 탐험하며 새로운 발견에 나서고 싶으니까요. 이들은 ‘그래야만 하는 명령’ 앞에서 뜬금없이 딴 곳을 쳐다봅니다. 돌아다본 곳에서 다시 또 벽이 덮쳐온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말이죠.


「작은 우화」의 쥐가 겪는 드라마의 확장판은 「굴」입니다. 여기에도 쥐처럼 들짐승이 하나 나오는데요. 녀석의 목표는 오직 하나 굴을 파는 것입니다. 굴이란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서 설치하는 방어막이지요. 적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지만, 딱 그만큼밖에 운신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벽입니다. 이 녀석의 특기는 언제 어떻게 맞닥뜨릴지 모르는 오만 가지의 공격, 가능한 모든 적을 향해 사방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마치 반갑게 적을 맞이할 채비를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녀석도 「작은 우화」의 쥐처럼 가능한 모든 벽을 떠올리지요. 그러다보니 살려고 만든 굴이 오히려 생명의 위협이 되기도 하는데요. 사방에서 포위될 것을 대비해 굴의 한 가운데에 중앙광장을 만들고 식량을 비축했지만, 고립되어 잡힐지도 모르게 되거든요. 그래서 여러 개의 입구가 있는 작은 광장들을 다시 파들어 가봅니다만, 이 부산한 굴파기가 오히려 적의 주목을 끌 게 됩니다. 스스로 적이 되어 자신의 굴을 시험하고, 자신의 굴 안에 갇혀 자신의 굴을 파괴하기! 진정한 적은 머릿속에 출몰하며, 참된 투쟁은 벽을 짓찧고 있는 그 이마 위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나 녀석에게는 벽이야말로 가능성의 출발점입니다.


굴 안에서는 늘 나는 끝없이 시간이 있다 – 내가 거기서 행하는 모든 것이 훌륭하고 중요하며 어느 정도 나를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두 번째 통로에서 시작하여 한중간에서 검사를 중단하고는 세 번째 통로로 넘어가는데 거기서부터 발길 닿는 대로 성곽광장으로 되돌아와 버리니 이제 아무튼 다시 두 번째 통로를 새로이 시작해야 하고 그런 식으로 작업을 가지고 유희를 함으로써 작업량을 늘리고 혼자서 웃고, 기뻐하고, 많은 작업으로 뒤죽박죽이 되지만 일을 그만두지는 않는다. 너희들 때문에, 너희로 하여 나는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며, 그 무엇을 위해서도 나의 목숨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겠다. (「굴」)


우리를 살게 함으로써 가두는 것이야말로 벽! 그렇다면 고개를 돌리고 또 돌리면서, 낯선 벽들의 출몰 속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가면 됩니다. 이런 투쟁이 언제 끝나느냐고요? 피곤하지 않냐고요? 카프카는 벽을 사랑하는 이에게 끝이란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나와 함께 벽은 자라나고, 벽과 함께 삶은 멈추지 않을 것이니까요.


왜냐하면 삶은 네가 잃어버린 시간만큼 더 긴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바로 그 정도의 길이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어떤 길을 시작했다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계속해서 그 길을 가라. 너는 이길 수밖에 없다. 너는 결코 위험에 처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너는 끝에 가서는 넘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가 이미 첫걸음을 떼어놓자마자 뒤돌아서 층계를 내려갔다면, 너는 처음에 곧장 넘어졌을 것이다. 아마가 아니라 분명히 말이다. 그러니까 네가 만일 이 통로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면 문을 열어라. 그 문 뒤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면 또 다른 층이 있다. 네가 위에서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곤란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계단으로 뛰어올라라. 네가 올라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계단 또한 멈춰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올라가고 있는 너의 발밑에서 계속해서 앞쪽으로 자라날 것이다.(「변호사」)

 


사진은 터키의 카파도키아 입니다. 끝없이 지하로 뚫려 있는 고대 도시. 벽이 출구를, 출구가 벽을 부르며 이어지는 미로 도시입니다.


글_오선민(고전비평공간 규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