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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카프카와 함께

1912년, 큰 일이 일어난 해

by 북드라망 2018. 2. 22.

1912년, 큰 일이 일어난 해



사기꾼의 탈을 벗기다


『관찰』(1913)은 수줍은 문학청년을 책상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공격적 작가로 변신시켜준 단편집입니다. 실제로는 1912년 말에 출판되었습니다. 카프카는 일기와 문학 노트에 써 두었던 여러 작품을 고르고 다듬은 다음, ‘관찰’이라는 이름으로 엮었는데요,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모든 단단한 지반들이 ‘단지 그렇게 보일 뿐’임을, 단 한번의 산책으로도 그 점을 알 수 있음을 그려냈습니다.




카프카는 『관찰』에 실릴 작품들의 순서에도 고심을 했습니다. 반드시 첫 작품은 「국도의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며, 출간 직전에 급히 라이프치히의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요. 저녁 무렵 부모님의 집 정원에서 슬며시 빠져나와 잠을 자지 않는 남쪽 나라로 달려가 버리는 아이의 이야기로 자신의 문학을 시작하려 했던 것입니다. 인디언처럼 고함을 지르면서 뛰어오를 때 엉덩이 밑에서 이는 바람을 느끼는 아이. 순식간에 가족을 고장 내고, 뜬금없이 고개를 돌리면서 생의 낯선 풍경을 찾아나서는 이 작은 존재. 아이는 앞으로 출현할 그레고르 잠자, 카를 로스만, 그리고 K를 예고했습니다.


그럼 『관찰』의 두 번째 작품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사기꾼의 탈을 벗기다」에서 문제가 되는 인물은 사기꾼입니다. 그는 어떤 존재일까요? 산책자, 무엇보다 길 위의 유혹자입니다. 화자는 그가 사기꾼인줄 알면서도 끌려다닙니다. 고급 주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왜냐하면 사기꾼이 길 위에서 침묵을 만들면서 화자의 마음에 영원의 바람소리를,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는 불굴의 음악 소리를 일깨웠습니다.


나는 초대를 받았지 않은가, 나는 곧바로 그 점을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몹시 가 있고 싶은 곳으로 올라오도록 초대를 받은 것이지, 여기 아래 집 문 앞에 서서 상대방의 양쪽 귓가 저편을 바라보고 있으라고 초대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와 더불어 침묵하고 있으라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우리는 마치 이 장소에 오랫동안 머물기로 결심이나 한 듯했다. 그러자 그 주변의 집들, 또한 그 위로 별들에 이르는 어둠도 역시 곧장 이 침묵에 동참했다. 어디로 가고 있는 길인지 알고 싶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보이지 않는 산책인들의 발자국 소리, 언제나 건너편 길 쪽으로 휘몰아쳐가는 바람소리, 어느 방인가 닫혀진 창문에서 흘러 나오는 축음기의 노랫소리-그런 소리들이 이 침묵 속에서 들려왔다. 마치 침묵이 옛날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 모든 것들의 소유물인 것처럼.(「사기꾼의 탈을 벗기다」)


카프카는 이후로는 더 이상 ‘사기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완성했던 1912년 무렵 그의 마음 속에는 한 사람의 사기꾼이 있었죠. 카프카는 자신의 사기꾼을 어느 대중 강연에서 설명했습니다. 1912년 2월 18일에 쓰여진 「유태인 독일어에 대한 강연」원고를 잠깐 읽어보겠습니다.


그것은 외래어들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외래어도 은어 안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들이 받아들여졌을 때의 신속함과 발랄함을 유지합니다. 민족 이동의 역사가 온통 은어 속에 배어 있습니다. 독일어도, 히브리어도, 프랑스어도, 영어도, 슬라브어도, 네덜란드어도, 루마니아어도, 게다가 라틴어조차도 은어 안에서는 호기심과 가벼운 마음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상태에 놓인 각 국어를 한 묶음으로 만들기만 하는 데도 대단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총명한 사람은 이 은어에서 세계어를 만들어낼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비록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사기꾼의 언어만은 흔히 은어를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별적인 언어보다 언어적 관계를 덜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은어가 꽤 오랫동안 무시되어온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이 잠자코 있으면 여러분은 어느새 은어 가운데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은어가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 그때는 여러분이 예전에 갖고 있던 안정을 더 이상 다시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은어의 참다운 통일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너무나 강하게 느껴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은어가 무서워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만약 그 은어로부터 이러한 공포에 저항하고 보다 강력한, 여러분에 대한 자신감이 솟아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이 공포를 혼자서 견뎌낼 수 없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 한 이 자신감을 누리도록 하십시오!


여기에서 사기꾼은 은어를 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은어를 통해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는 존재이지요. 이 강연에서 ‘은어’란 이디시어를 말합니다. 이디시어는 주로 동유럽 출신의 유태인들이, 독일어권 영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히브리 문자로 자신들 고유의 유태적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쓰던 말입니다. 유태인이지만 독일어의 세례를 받았던 카프카에게 이디시어는 문법부터 배워야 하는 외국어였습니다. 그것도 프라하의 창창한 유태 청년이라면 굳이 익힐 필요가 없는! 빈티나는 떠돌이의 말을 써대면서 제도에 안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11년과 1912년 무렵의 카프카는 바로 이 은어와 자신이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동유럽 유태인 유량극단의 이디시어 연극을 관람한 뒤 부터였죠. 이 말은 독일어와 공존하지만 독일어로는 수렴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순결한 고대 히브리어를 연상시키지도 않았죠. 낱말 하나하나에는 단지 동유럽 여기저기에서 숨쉬는 자유롭고 희안한 삶의 뉘앙스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카프카는 걸어 다니는 말, 이 언어에 덕지덕지 붙은 생의 숨결, 그 다채로운 기운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카프카는 유랑 극단의 배우 뢰비가 프라하에서 보내는 한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삶의 한 순간을 낯설지만 강렬하게 체험하는 한 사람의 산책자로 말이지요.


나 때문에 거의 매일 반 시간씩 기다리곤 하는 뢰비가 어제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며칠 전부터 나는 기다리는 동안 항상 저 사람들의 창문 쪽을 바라봅니다. 내가 보통 때처럼 정해진 시간 전에 도착하면 먼저 불빛이 보이지요. 그러면 나는 그들이 아직도 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다음에는 불이 꺼지고, 옆방의 불빛만 남아요. 이건 그들이 저녁 식사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방에 다시 불이 켜지면 그들이 양치질을 하는 것이고, 그다음에 다시 불이 꺼지면 그들은 이미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고 나서 다시 불이 켜지는데 … (일기, 1911.12.24.)


 

산책자의 작은 문학


1912년은 카프카에게 중요한 한 해였습니다. 8월 말에 펠리체 바우어와 만나, 9월부터 말 그대로 불꽃튀는 연애를 시작하면서 창작의 에너지 또한 폭발하게 되지요. 그러나 1911년의 마지막 달로부터 『관찰』에 실릴 원고를 다시 고치게 된 이 해 봄이야말로 카프카라는 문학 세계에서 결정적인 시기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문체를 확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동유럽 유태인들의 연극에서 받게 된 인상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카프카는 자신의 문체에 대해 탐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이 연극은 서유럽 지향적 유태연극이나 시오니즘에서 주장하는 고대풍 유태 연극과는 달랐습니다. 독일 정통극과는 천지차이가 났지요. 그것은 이디시어가 만든 효과였습니다. 프라하의 언어 환경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디시어를 전달하기 위해, 배우들은 독일어에 길들여진 청중 앞에서 온 몸으로 의미를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관객이 언어를 겪어낼 것을 요구했습니다. 비참할 정도로 가난한 유랑단의 무대는 현란한 수사와 정통적 은유라고는 모르는, 언어 그 자체의 본질을 보여주기도 했지요. 떠돌아다니느라 제대로 훈련받을 수 없었지만 생에 대한 이해로 충만한 배우의 발성과 몸짓을 보며, 카프카는 인간의 말이 철통같은 문법과 고매한 용법을 통해 민족의 기억을 실어나르는 순결한 매체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자신이 오랫동안 숭배했던, 저 위대한 괴테조차 독일정신과 손을 맞잡는 순간 말의 생명력을 억누르는 독일어의 심판자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괴테

괴테는 그의 저작들이 가진 힘 때문에 독일어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산문의 형식은 자주 그의 영향력으로부터 멀어졌었지만, 결국에는 바로 요즈음에 그러하듯이, 그만큼 더 그에 대한 동경이 강해지면서 다시 그에게로 되돌아갔고, 심지어는 괴테의 글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괴테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표현들을 사람들이 본받기도 했다. 괴테에 대한 그들의 무한한 종속성이 완벽해지는 것을 보며 즐기기 위한 것이다.(일기, 1911년 12월 25일)


유랑단의 무대에는 어떤 연극 예술론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음성과 움직임의 부분적 특수성이 있었습니다. 형편없는 연극단의 처지는 매번 일관성 없는 무대를 만들어 냈지요. 날마다 바뀌는 문제적 상황, 고민거리의 중첩. 덕분에 배우의 얼굴에는 윤곽의 변화가 심했고, 갑자기 신체 부위가 돌출하거나 발음이 비틀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음성의 한 조각, 동작의 한 부분이 매번 의미의 중심점을 이동시켰기 때문에 프라하의 문예 비평가들은 연극이 저급하다며 질색을 했습니다. 하지만 카프카는 배우의 입매, 치마 주름, 얼룩덜룩한 화장과 같이 전체 줄거리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작은 조각들의 윤무야말로 말을 에워싼 추상적 관념에 작은 구멍을 내고, 새 숨을 불어넣을 수 있는 장치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취사크 부인이 다시 공연했다. 어제 그녀의 몸은 그녀의 얼굴보다 아름다웠다. 얼굴은 평소보다 가늘어 보였다. 그래서 그녀가 첫 단어를 말하자마자 주름이 잡히는 이마가 매우 눈에 띄었다. 아름답게 윤곽이 잡히고 적절하게 강한 커다란 몸은 어제 그녀의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어렴풋하게 인어나 사이렌 켄타우로스 같은 반인반수들을 생각나게 했다. 그다음에 그녀가 찌푸린 얼굴에 화장으로 얼룩덜룩해진 피부, 그리고 군청색의 반팔 블라우스에 얼룩을 묻힌 상태로 내 앞에 서 있었을 때는 마치 내가 무자비한 관객들의 한가운데 있는 어떤 조각을 향해 연설을 해야 하는 상황 같았다.(일기, 1911.12.19.)


1911년, 12월 말. 카프카는 부분 각각의 부딪침을 통해 장면 전체가, 작품 자체가 들끓는 의미의 용광로가 된다는 점에 착안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문학론을 구상하게 되는데요, 그 이름이 바로 작은 문학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작은 주제들을 문학적으로 다룰 때 재미가 있다. 그것들의 범위는 약간의 열광만으로 충분할 수 있는 정도라야 하고, 논쟁적인 전망이나 근거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문학적으로 의도된 욕설들이 처음에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좀 더 분위기가 강해지게 되면 욕설들이 날아다닌다. 큰 문학에서는 아래에서 벌어지는 것에 불과한 사건, 건물로 비유하자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 지하실 정도에 해당하는 사건도 여기서는 완전히 조명을 받으며 벌어지고, 큰 문학에서는 사람들이 잠시 모여드는 정도에 불과한 것도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일기, 1911.12.26.)


여기에서 말하는 큰 문학이란 ‘독일 문학’, ‘체코 문학’, ‘유대 문학’입니다. 당시 프라하에는 이 세 개의 문학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지배자 독일의 문학과 피지배자 체코의 문학, 그리고 피지배자의 피지배자 유태인 문학. 그런데 비록 그 규모(작가의 수, 작품의 양, 다른 문학에 대한 파급력)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카프카가 보기에 이들은 모두 큰 문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셋 모두는 개별 작가의 말과, 도처의 온 풍경을 ‘민족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취약한 작은 민족일수록 ‘더 큰’ 민족 정신을 드러내고자 애쓰고 있었습니다.


작은 민족의 기억이라고 해서 큰 민족의 기억보다 작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작은 민족의 기억은 그들의 소재를 훨씬 더 철저하게 소화할 수 있다. 물론 문학사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의 수가 더 적긴 하지만, 여기서는 문학이 문학사의 관심사라기보다는 민족 전체의 관심사이고, 따라서 문학의 보존이 완전히 순수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민족의 민족의식이 그 개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주어지는 문학에 대해서는 항상 배우고, 보호하고, 옹호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설령 그것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옹호할 태세는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일기, 1911.12.25.)


오직 동부 유태인들이 쓰는 이디시어만이 그 어떤 단단한 땅에도 뿌리 내리기를 원치 않았지요. 언어란 원래 움직이는 것이며, 인간 역시 땅에 붙들려 사는 존재일 수는 없다는 것이 이 떠돌이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존재는 움직인다, 풍경을 펼쳐내며 살아간다! 낱말 하나하나는 이미 국경을 넘나들며, 마음 속에는 국가나 신에 의지하고 싶지 않은 색색깔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인간이란 제도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물고기! 그래서 카프카는 자신이 써야할 것은 바로 작은 문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작은 민족의 커다란 민족의식에는 반대! 그 어떤 원대한 대의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작은 주제와 말의 부분적 강세를 살리는 작은 글쓰기를 하리라. 비록 카프카가 장편 소설을 쓰기는 했지만, 이후에 그가 기본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언어의 작은 운동이었습니다.


사기꾼의 탈을 벗긴 화자는 마지막에 고급 주택의 파티장으로 돌아갑니다. 산책길이 아닌, 고급 주택이란 어디일까요? 작가 카프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저 고상한 괴테가 주인으로 있는 독일문학입니다. 화자가 산책자와 헤어지고 난 뒤 자신감을 갖고 향연장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카프카 또한 작은 문학을 실천하기 위해 독일문학의 성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주저앉지 않고, 넘어지지도 않고, 여전히, 멀리서 사람들을 새롭게 웃기고 울리는 K. 결국 K는 성 아래 마을의 사기꾼이 되지요.


그리고 나는 그들 덕택에 처음으로 어떤 불굴의 모습을 보게 되었으며, 이제는 그것을 내 자신 속에서 느끼기 시작할 정도로 이 지구상에 그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아직도 다른 사람과 마주서 있을 수 있는가! 사람들이 이미 그들로부터 떠나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이미 오래 전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잡을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어떻게 주저앉지 않는가,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여전히, 멀리서이긴 하지만, 설득하는 눈빛으로 사람을 바라보는가! 게다가 그들의 수단이란 언제나 똑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들 앞에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널찍하게 자리를 잡고, 우리들이 가려고 애쓰는 곳으로부터 우리들을 돌려놓으려고 노력했으며, 그 대신 우리들에게 그들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던 방 하나를 마련해주었다. 또한 쌓인 감정이 우리들 마음속에 마침내 우뚝 일어나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포옹으로 받아들여 그 안에 먼저 얼굴을 파묻으며 몸을 던져 오는 것이었다.(「사냥꾼의 탈을 벗기다」


'땅에서 땅으로' 옮겨 다니는 유태인의 운명을 표현한 유태계 미국인 작가 Todros Geller의 작품



글_오선민(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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