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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카프카와 함께

시간아 멈추어라, 도주로가 여린다

by 북드라망 2018. 3. 8.

시간아 멈추어라, 도주로가 여린다  



돌연한 출발과 영원한 지연 


#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갑옷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누웠는데, 머리를 약간 쳐들면 반원으로 된 갈색의 배가 활 모양의 단단한 마디들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보였고, 배 위의 이불은 그대로 덮여 있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나머지 몸뚱이 크기에 비해 비참할 정도로 가느다란 다리가 눈앞에서 힘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일까’(『변신』)




카프카가 바라본 세계에서 시간은 어떻게 흐를까요? 사건은 모두 ‘어느날 아침’ 갑자기 일어납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그레고르는 ‘오늘’, 이유없이, 갑충의 몸으로 침대에서 일어나지요. 요제프 K는 ‘순식간에’ 방안으로 들이닥친 공무원들 덕분에 소송의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먼 곳에서 ‘문득’ 울리는 종소리, 사나이는 말 등에 휙 몸을 싣고 빈 몸으로 길을 나섭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고 ‘그저’ 돌아서서 창문 너머로 몸을 날리기도 해요. 응급환자에게 달려갈 수 없는 눈 내리는 밤의 시골 공의(公醫)는 또 어떤가요? ‘아! 너무나 고통스럽구나!’ 라고 ‘생각하자마자’, 그는 쓰지 않던 돼지 우리에서 걸어나오는 두 필의 말과 마주하게 됩니다. 말 등에 앉아볼까? 생각하기 무섭게 벌써 환자의 집 앞이죠. 눈밭에 앉아 있던 말이 콧김을 내뿜으며 벌떡 일어서듯, 시간은 끈금없이 불쑥 솟아나와, 집 대문을 산산조각 내면서, 낯선 풍경을 펼쳐냅니다.


# 위독한 환자가 십 마일쯤 떨어진 마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한 눈보라가 그와 나 사이의 먼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 그 순간 나는 마부가 달려들어 나의 집 대문을 부수고 산산조각 내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나의 눈과 귀는 모든 감각 기관으로 똑같이 밀려드는 마차의 질주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뿐이었다. 왜냐하면 마치 환자의 집 마당이 바로 내 대문 앞에 열려져 있는 것처럼 나는 그곳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말들은 조용히 서 있었다. 눈보라는 멈추었고, 달빛이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시골 의사」)


그런데 이토록 급박하게 시작된 여행에서 존재는 결코 목적지에 이르지 못합니다. 진료가 끝난 뒤에도 시골 의사는 자신의 집으로 귀환할 수 없습니다. 성 밖으로 황명을 전달해야 하는 칙사는 최후의 문에 이를 수가 없고요. 카를 로스만은 아마도 만년 쯤 아메리카 대륙을 해매지 않을까요? 측량사 K또한 심판자이신 성주 베스트베스트 백작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에라이, 죽어버릴까요? 하지만 죽어서도 여행은 끝나지 않습니다. 사냥꾼 그라쿠스는 현세의 배와 비현세의 사공을 데리고 섬에서 섬으로, 바다에서 바다로 아직도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거든요. 카프카의 세계에서 인물들은 떠날 수는 있지만, 도착할 수는 없습니다. 더는 ‘지금’을 참을 수 없어!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떠나게 되지만, 도착하자마자 ‘여기’는 부정되지요. 그래서 카프카의 존재들에게 생은 언제나 한 점으로 집약됩니다. 오직 지금뿐! 학술원의 원숭이 빨간 페터처럼 말이예요. 페터는 ‘바다’라든가 ‘허공’과 같은 공간적 이미지로 제시되지만 자유를 거부했거든요.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발디딜 수 있는 ‘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신 페터는 ‘지금’이라는 출구를 만들 것을 권했지요. 페터는 인간의 그물에도 원숭이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존재였습니다.


# “주인나리, 말을 타고 어디로 가시나요?” “모른다” 하고 나는 말했다. “다만 여기를 떠나는 거야. 다만 여기를 떠나는 거야. 끊임없이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그래야 나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네.” “그러시다면 나리께서는 목적지를 아신단 말씀인가요?” 그가 물었다. “그렇다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했잖는가. ‘여기에서 떠나는 것,’ 그것이 나의 목적지일세.”(「돌연한 출발」)



2. 아빠와 재칼의 공통점  


카프카가 인과 따위는 없는, 각각 한 점으로만 된 시간과 각기 별개로 작동하는 장면으로 된 작품을 쓰려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카프카는 과거라고 하는 과중한 무게와 미래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양 앞에서 기겁했던 것 같습니다. 과거에서 미래로의 연속이라는 욕망의 근저에는 어딘지 피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요. 카프카의 시간관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가장의 근심」과 「재칼과 아랍인」입니다. 모두 『시골의사』(1919)라는 단편집에 실려 있습니다. 먼저 가장의 이야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가장은 오드라데크라는 괴물체를 싫어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예요. 먼저, 그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 수 없어서입니다. 기원없는 존재 오드라데크.


# 어떤 이들은 오드라데크Odradek라는 말이 슬라브어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을 근거로 이 말의 형성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이 말이 독일어에서 나온 것이고, 다만 슬라브어의 영향을 받은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두 가지 해석의 불확실성으로 미루어 보아 그 어느것도 정확하지 못할뿐더러, 게다가 이들 해석으로는 그 말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 꼬라지 때문입니다.


# 그것은 우선 납작한 별 모양의 실타래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실이 감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다만 끊겨진 채 서로 엉키고 매듭지어진, 여러 모양과 색깔의 낡은 실타래 조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하나의 실패만이 아니라 별의 중간에는 횡으로 작은 막대가 돌출해 있고, 이 막대기와 맞닿아 오른쪽 모서리에 또 하나의 막대기가 있다. 이쪽 면에서 보면 이 두 번째 막대기의 도움으로, 다른 쪽 면에서 보면 별이 발하는 빛으로 인해, 이 전체 모양은 마치 두 개의 다리로 서듯 곧추 설 수 있다.(「가장의 근심」)


부서진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 굴러다니다가 묻혀온 것인지 모를 실타래며, 덕지덕지붙은 먼지 뭉치들. 정신없는 움직임, 바닥과 천장을 가리지 않고 기어다니는 경박한 천성. 작고 어지럽게 생긴 기이한 물체! 쓸모라고는 찾을 수가 없군요. 딱 어린이의 장난감 모양입니다. 아이들은 길가를 구르는 도토리만 보아도 기상천외의 놀이를 발명해내지요. 하지만 같은 도토리를 갖고 놀더라도 매번 규칙이 바뀝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휙! 언제 그랬냐는 듯 도토리를 두고 달아나지요. 이처럼 장난감 나라에서는 똑같은 일이 두 번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드라데크도 기원과 목적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반복을 모르고, 원인과 결과라는 시간 연속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녀석이 사는 곳은 “정해지지 않은 집”입니다.




아버지가 오드라데크가 싫은 것은 당연합니다. ‘아버지’는 기원의 이름이니까요. 아들의 아들을, 그 아들의 아들을 끊임없이 찍어낼 수 있는 존재. 출발과 종착점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꿰어버리면서 동질적이고도 거대한 가족원을 완성하는 존재. 아버지는 자신이 설계하는 완전하고 거대한 시간의 원을 어지럽히는 오드라데크가 견딜 수 없습니다.


「재칼과 아랍인」에는 아버지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어머니가 나옵니다. 사막 재칼의 무리는 언제부터인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우두머리를 갖고 있으며, 항상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그들의 어머니도 그를 기다렸고, 그녀의 어머니도, 또 그녀의 모든 어머니들로부터 모든 재칼의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피에서 피로 이어지는 이 순혈한 재칼 무리는 날마다 메시아에게로 다가갑니다. 최후의 투쟁 속에 온 종족을 이간질시키던 싸움이 끝나고 평화가 도래하리니! 그들의 오랜 열망은 바로 이것이지요. ‘순결해진 수평선 하나를 갖고 싶다!’


하지만 재칼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막에는 언제나 아랍인이 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아랍인은 ‘순수’한 것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재칼을 자기들의 ‘개’라고까지 생각합니다. 혈통에 집착하는 것들의 울부짖음은 그저 연극이며, 슬쩍 보고 지나쳐야 하는 애완동물의 재롱같은 것! 아랍인들은 피에 굶주린 재칼에게 죽은 낙타 한 마리를 던져주면서 그저 지켜봅니다. 낯선 것들에 대한 그들의 증오를, 피를 마셔야 충족되는 그들의 끔찍한 집착을. 카프카는 낙타를 뜯느라 정신을 잃는 재칼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렸습니다. 기원에 주박당한 짐승, 목적을 향해서 토해내는 징그럽게 뜨거운 피. 그들은 시체와 함께 산을 이루면서 사막을 피로 물들입니다.


# 재칼들은 하나하나가 마치 밧줄에 묶여 어쩔 수 없이 잡아당겨지듯이, 몸을 뒤로 빼면서, 배를 땅바닥에 질질 끌면서 다가왔다. 그것들은 아랍인들을 잊어버렸다. 증오심도 잊어버렸다.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고 있는 시체의 현존이 모든 것을 녹여버렸고, 다만 그것들을 매료시켰다. 벌써 한 마리가 목에 달라붙었고 단번에 동맥을 찾아냈다. 가망이 없어도 거대한 불을 어떻게 해서든지 끄려고 미친 듯이 뿜어대는 작은 펌프처럼, 그것의 몸의 모든 근육은 제자리에서 늘어나기도 하고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자 이미 모두가 같은 일을 하면서 그것들은 시체 위에 산을 이루고 있었다.(「재칼과 아랍인」)



3. 도주로 위를 흐르는 붉은 피  


단편집 『시골의사』의 부제는 ‘아버지께 바칩니다’입니다. 카프카는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부채감을 편지로 쓰기도 했고(물론 아버지께 드리지는 않았습니다만), 친구들과 연인에게 부자 관계의 피로를 토로하기도 했으며, 직접 『선고』,『화부』,『변신』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부자 갈등을 다루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돌연함’을 키워드로 『시골의사』를 살펴보면, 이 부제가 ‘시간에게 바칩니다’로 읽히게 됩니다. 어쩌면 카프카의 문학 전체에서 그토록 열렬히 호명되고 있는 ‘아버지’는 헤르만 카프카가 아니라 시간의 아버지, 기원의 대명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의 근심」이나 「재칼과 아랍인」이 시간의 통시적 연쇄에 대한 분석이라면, 「형제 살해」같은 작품은 시간의 공시적 전개에 관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작품에서 살인자 슈마르는, 기다리는 아내에게로 걸어가던 형제 베제를 칼로 찔러 죽입니다. 베제는 이제 아버지가 될 수 없겠지요. 슈마르는 피를 더럽힌 존재가 되어 세상을 떠돌게 될 것입니다. 아들이 아들을 낳고, 아버지가 아버지가 되는 시간 속의 관계란 서로의 피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 시체를 뜯어먹으면서 시체와 한 덩어리가 되고마는 재칼처럼, 형제또한 서로에게 끔찍해지고 맙니다. 하지만 슈마르는 흘러서 낯설어진 형제의 피를 보며 날아갈 듯한 기분을 느끼지요. 아버지에서 아들로, 또 아들로 영원히 흘려 보내야 할 피를 길바닥에 새어 나가게 한 이 기쁨!


# “해치웠어”하고 슈마르는 말하며, 칼을, 불필요해진 피범벅의 찌꺼기를 옆집 현관을 향해 던졌다. “살인의 축복! 흐르는 낯선 피를 통한 해소, 날아갈 듯한 기분! 베제, 밤의 유령 같은 늙은이, 친구, 술집 동아리, 너의 피는 어두운 길바닥에서 새어 나가고 있다. 너는 어째서 피로 가득 채워진 간단한 주머니가 못 되는지, 내가 네 위에 올라앉으면 완전히 사라져버릴 수 있는 그런 주머니말이다.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피의 꿈들이 실현될 만큼 성숙한 것은 아니었다. 너의 무거운 찌꺼기가 여기에 놓여 있다. 이미 단 한걸음도 걸어갈 수 없는 상태로. 네가 너의 찌꺼기를 통해 묻고 싶은 무언의 질문은 무엇인가?(「형제 살해」)


오드라데크처럼 천장도 바닥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 매순간 다른 곳으로 튀어가 버리는 움직임! 카프카의 돌연한 출발, 영원한 유예는 도도히 흐르는 저 원대한 시간의 흐름에 구멍을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떠나고, 또 떠나면서 시간의 도주로를 만들자! 골목길의 아이처럼 떠들고 웃으면서, 엉덩이 뒤로 어디서 부는지 모를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면서!


# 우리를, 다른 사람들인 우리를 그래도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유지해준다. 즉 우리의 무위도식 거의 전부를, 우리는 그들을 균형 속에 위아래로 흘러가게 하면서 우리 직업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가. 미래가 양에 있어서 우월한 것을 과거는 무게로 대체한다. 그리고 그들의 끝에서는 양쪽을 정말 더 이상 구분할 수가 없다. 가장 이른 청소년 시절은 나중에는 미래처럼 밝아질 것이고, 미래의 끝은 원래는 우리의 모든 탄식과 더불어 이미 경험한 것이고 과거인 것이다. 이 원은 이렇게 거의 완결된다. 우리는 이 원의 주위를 따라가고 있다. 이 원은 이제 우리들 것이다. 하지만 이 원은 우리가 붙들고 있는 동안에 한해서만 우리 것이다. 우리가 한 번만이라도 옆으로 비켜서면 이미 그를 공간 안으로 잃어버린 것이다. 어떤 자기망각 속에 그리고 경악으로, 놀라움으로, 피곤해서, 산만함 속에 비켜서게 되면 말이다. 이제껏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코를 파묻고 있었다. 지금 과거에 헤엄쳤던 사람이고, 현재 산책하는 사람인 우리는 물러섰고 실패했다. 우리는 법 밖에 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런데도 누구나가 우리를 법에 따라 취급한다.[일기, 1910]


글_오선민(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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