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는 뱀파이어
카프카는 두 번이나 약혼하고, 두 번이나 파혼한 약혼녀 펠리체 바우어 양에게 1912년 9월 20일부터 1917년 10월 16일까지 정말 쉴새 없이 편지를 썼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달라고 요구하면서, 그녀의 편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백방으로 증명하려 애썼습니다. 도대체 카프카는 뭘 하려고 했던 걸까요? 왜 펠리체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국면으로 몰아세웠던 걸까요?
1. 흡혈하는 편지
카프카를 사랑했던 두 사람의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의 편지 쓰기가 도착적이고, 악마적이라면서 ‘흡혈’하는 글쓰기 같다고 했습니다.(들뢰즈·가타리,『카프카』) 카프카가 펠리체에게 편지를 씀으로써, 편지의 도착적이고 악마적인 용법을 체험했다는 것이죠. 사랑을 사랑의 편지로 대체하고, 부부 간의 계약을 악마적인 계약으로 대체하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악마적 계약 속에서 카프카가 펠리체의 힘(피)을 빨아 작품을 써 나갔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흡혈의 이미지에 대해 더 고민해보았습니다. 저 위대한 뱀파이어 드라큐라 백작(브람 스토커)을 떠올리면서 말이죠. 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가 아니라, 영혼의 벗인 막스 브로트에게 쓴 편지가 아니라, 또 다른 연인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유독 펠리체에게 보내는 편지만이 ‘흡혈’의 이미지를 갖는 것인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뱀파이어 드라큐라 씨는 어떤 존재인가요? 우선 그는 죽은 채로 영생을 삽니다. 그는 피를 빨아가며 인류의 지식과 인류의 신체를 초월해 나갑니다. 그가 주로 활동하는 시간은 ‘불면’의 시간이지요. 그런데 드라큐라 씨를 드라큐라 씨로 만들어주는 이유는 단지 이것이 아닙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성(聖)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입니다. 결혼의 활력과 새 생명을 잉태할 에너지를 서서히 앗아가는 존재, 가족으로 다 수렴되는 정염을 빼돌려 자신의 사업을 이루고, 또 다른 가족을 파괴해 나가면서, 희생물에게는 유령과 같은 불멸을 선사하는 존재. 브람 스토커의 드라큐라는 정확히 ‘순결한 부부’의 피를 더럽히기 위해 낮과 밤을 어지럽히는 자입니다.
카프카도 약혼녀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피를 빨았지요. 단 그 피는 펠리체의 것이 아니라 카프카 자신의 피였습니다. 카프카는 자신이 벌이는 나날의 투쟁을 두 자아의 투쟁이라고 설명합니다. 첫 번째 자아는 펠리체가 구현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자아입니다. 즉, 그녀가 뿌리내리려 하는 시민적 삶의 모든 형태를 긍정한 자아. 하지만 그의 두 번째 자아는 “축 늘어질 정도로” 글쓰기에 허기를 느끼고 있으며, 이 자아는 첫 번째 자아가 경험하는 세계의 전부를 파먹으면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카프카는 첫 번째 자아가 두 번째 자아에게 무기력하게 종속되어 있고, 이 둘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펠리체에게 주지시킵니다. 카프카는 순식간에 발병한 폐결핵 때문에 파혼을 결정해야 했을 때도, 결국 이 투쟁에서 두 번째 자아가 첫 번째 자아의 피를 너무 많이 빨아먹고 말았다고 설명합니다. 이 흡혈의 결과 파괴된 것은 첫 번째 자아, 시민적 삶에 뿌리 내린 그의 사랑이었던 것이죠.
예나 지금이나 나의 내면에는 두 자아가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한 자아는 그대가 원했던 것과 거의 같습니다. 그 자아는 그대의 소원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한 것을 계속적인 발전을 통해 달성할 수 있을 겁니다. … 한편 또 다른 자아는 작업만을 생각합니다. 작업은 이 자아의 유일한 걱정거리지요. 작업은 가장 비열한 상상조차도 이 자아에게는 낯설지 않게 만듭니다. […] 이 두 자아가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서로 두 손으로 마구 때리며 덤비는 실제적인 싸움이 아닙니다. 첫 번째 자아는 두 번째 자아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자아는 결코 내적인 이유에서 두 번째 자아를 내동댕이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두 번째 자아가 행복해하면 그 자신도 행복해하지요. 두 번째 자아가 짐작컨대 상실감에 빠져 있으면 첫 번째 자아는 옆에 무릎을 꿇고서 그를 쳐다보기를 원할 뿐입니다.(펠리체 바우어에게 보내는 편지, 1914. 10월 말 11월 초로 추정)
2. 하얀 목의 유혹자들
K는 이렇게 말하더니 달려 나와 그녀(뷔르스트너 양)를 붙잡고는 입에 키스를 하고 그녀의 온 얼굴에도 입을 맞추었다. 마치 목마른 짐승이 마침내 발견한 샘물에 마구 혀를 휘둘러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후에 그는 그녀의 목, 바로 후두 부분에 입을 맞추고 오래도록 입술을 대고 있었다.(프란츠 카프카, 권혁준 옮김,『소송』)
카프카 작품에 등장하는 약혼자들은 가정에 안착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늘 유혹자입니다. 카프카의 첫 작품인, 그가 1904년인 20살 때 썼던 작품 「어느 투쟁의 기록」(1909년 완성? 미완의 유고)도 여자 친구에게 빨려 들어가려는 찰라에서 구출되는 한 사나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소송』이나 『성』의 K들은 길목 길목마다 목을 들이미는 음탕한 여자들을 만나지요. 그런데 이 유혹자들은 모두 ‘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유혹자들은 ‘남자라면 이렇게’, ‘어른이라면 이렇게’, ‘연인이라면 이렇게’, ‘존재한다면 이렇게’ 즉, 삶을 둘러싼 모든 약속들 그런 법들에 딱붙어 사는 존재들이었지요.
카프카의 육감적 여인들을 두 부류로 나누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카프카 최후의 장편 소설 『성』에서 이 유형을 뽑아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프리다처럼 ‘무법’을 꿈꾸는 유혹자입니다. 그녀는 자기를 성가시게 하는 모든 것들을 귀찮아하고,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으로 달아날 궁리만 하는 여인이죠. '법이 없는 세상'만 꿈꾼다는 점에서 그녀는 '법' 없이는 못 사는 존재입니다. 두 번째는 대놓고 법에 저항하는 유혹자입니다. 아말리아는 ‘불의’는 못 참는다면서, 기꺼이 피해자의 위치에 서려고 하는 의협녀였습니다. '나쁜 법'을 '착한 법'으로 바꾸고 싶은 것이 그녀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유혹자들을 대하는 측량사 K의 태도는 뱀파이어를 닮았습니다. 그는 이들의 목을 빨면서, ‘법’의 무자비함과 무차별적 허위를 사유합니다. 그렇지만 결코 그녀들과 평생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K는 프리다를 저 자유의 땅으로 데려가 주지도 않고, 아말리아의 무죄를 변호해주지도 않습니다. 그의 목표는 간단했어요. 법으로부터의 도망이든 그에 대한 적대든, 어쨌든 ‘법’에 얽혀 있는 그녀들의 삶에 불쑥 들어갔다가 휙 헤집고, 슬쩍 빠져 나오기! 그런 뒤에는 어김없이 또 다른 유혹자의 다락방으로 기어들어가기! K는 항상 유혹자, 또다른 유혹자, 그리고 또 유혹자에게 끌리는 남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유혹자란 ‘아, 여기야말로 삶의 한계로구나!’를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K는 온갖 한계를 맛보고, 빨고, 씹어 뱉으면서 쾌락을 느끼려는 뱀파이어입니다.
아래 그림은 에드바르드 뭉크의 <뱀파이어>(1893)입니다. ^^
글_오선민(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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