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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

필사筆寫, 노트와 펜은 마음의 훈련장

by 북드라망 2017. 12. 18.

필사筆寫, 노트와 펜은 마음의 훈련장


'필사'는 말 그대로 '베껴쓰는' 것이다. 이 단순한 일에도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한다면 사실 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필사가 가진 '단순함' 덕분인지 때문인지, 어쨌든 '단순'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요소가 한가지만 들어와도 필사 작업 전체가 무의미한 일이 되거나 안 하는 게 더 좋은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내용에 집중하면 '속도'는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그런데 그것도 한계가 있다. 필사는 눈으로 쫓으며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동작'을 요구한다. 눈은 원본의 글자들을 쫓아야 하고, 동시에 내가 쓰고 있는 글자들이 잘 써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주로 쓰는 쪽의 손과 팔을 이용해서 노트에 글자를 옮겨가야 한다. 그런 와중에 책의 내용에 대한 집중력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쓰는 '속도'가 어느 임계점을 넘어가는 순간, 쓰고 있는 책의 내용은 날아가고 쓰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만다. 중,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내주셨던 '깜지 숙제'를 생각해 보면 쉽다. 외우려고 쓰는 '깜지'인데 외우는 것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종이를 채우는 데만 혈안이 되었던 그 '깜지' 말이다. 


또 한가지 '빨리 쓰기'를 피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필사'를 왜 하는지 생각해 보면 쉽다. '작가 지망생'이 아닌 보통 사람의 '필사'는 무엇보다 '다른' 속도를 일상에 도입한다. 빠르고, 빠른 현대인의 삶의 속도를 의도적으로 다운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쉽게 말해 '느림'을 즐기는 것이다. 


_ '정지'! 그렇다.일단, 한번 멈출 필요가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느리게, 느리게 다시 출발하자.

'느림'을 즐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바쁠 때는 느끼고 생각할 겨를이 없다.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으로 일상적인 '과업'을 수행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일'을 할 때뿐이 아니다. 쉬기 위해, 쉴 곳으로 이동 할 때도 빨리 움직여야 하고, 밥을 먹어야 할 때도 재빠르게 자리를 잡지 않으면 수저를 쥐어볼 기회도 갖기 어려운 것이 도시인의 삶이다. 집에 돌아온 후에는 어떨까? 빨리 씻고, 빨리 밥을 먹어야 한다. 본방을 사수해야 하니까. 그렇게 대부분의 일상은 각자의 리듬과는 상관없는 '외부'의 시간들로 채워지고 만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느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반응'할 뿐이다. '반응'이 반복되면 어떨까? 다들 각자를 돌아보자. 어쩌면 우리는 느린 속도로 무언가를 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굼뜨다고 지적을 받는 사람조차 자신의 '느림'을 인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늘 '바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필사'는 느림을 '즐기는' 행위라기 보다는, 차라리 '느림'을 훈련하는 것이라고 하는게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주의할 점은 느려지는 것은 '늘어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바쁘게 살 수 있는 만큼 우리는 쉽게 늘어진다. 누구보다도 잘 늘어질 수 있다. 둘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보다 '집중력'이다. 이때의 집중력은 바쁠 때의 집중력과는 완전히 다르다. 현대인의 '바쁨'이 빠른 '반응'들로 채워져 있는 만큼 그때 필요한 집중력은 '나'를 향해 닥쳐오는 외부의 촉발들에 대한 '집중력'이다. 반면에 '느림'과 쌍을 이루는 '집중력'은 철저히 내면으로 향해 있어야 한다. 어떤 문장을 써나갈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서와 생각에 집중해야 하고, 손의 움직임과 이제 막 쓰여진 글자의 모양이 내게 주는 만족감에 집중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써가는 와중에 어떤 생각들이 나에게서 일어나고 있는지 집중해야 한다.(약간 어려운 느낌이 있는데, '나'의 정서, 생각, 신체를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느리게 쓰는 가운데,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 이것이 필사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훈련이 지향하는 바는 '소중한 나'를 잘 쉬게 하고, 스스로를 더 잘 알게 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우리는 남에 대해 무지한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하다. 이와 같은 이중의 무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모르는데, 남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수 있을까? 사람은 각자 다르지만, 그렇게 다른 만큼 비슷하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하는 것일 확률이 높고,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내 마음의 움직임을 느끼는 훈련이 향하는 곳은 남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탐구'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탐구인 셈이다. 필사를 시작하는 순간 나의 주의력이 얼마나 약골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얼마나 많은 '반응'들로 일상을 채워왔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_ 노트와 펜, 그리고 눈 앞에 놓인 책 한권이면 된다.



이런 식의 '훈련'에 초점을 맞춰 필사를 하는 데에는 소설이나 동양고전, 불경이 좋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등장하는 소설과 내 마음이 공명하는 공간, 스승과 제자의 대화와 내 생각이 공명하는 그 공간 사이에 놓여진 빈 노트와 펜이야 말로 '마음의 훈련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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