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정치의 또 다른 이름
1. 개혁을 향한 열망 그리고 실패
그대가 중도에 버림을 받은 것은 하늘이 그대를 위해 굴레를 벗겨준 일일 터. 아름다운 옥과도 같았어라, 그대가 쏟아냈던 그 문사는. 부귀하고 무능하다면, 그 이름은 마멸되기만 할뿐, 그 누가 기억해주리오? 실로 비범하고 위대하였던 그대의 글. (「유자후 묘지명」,『한유문집』, P.466)
이 글은 당나라 문장가 한유가 자신의 벗 유종원을 위하여 써 준 묘지명이다. 그런데 한유는 왜 묘지명에 “그대가 중도에 버림을 받은 것은 하늘이 그대를 위해 굴레를 벗겨준 일” 이라고 표현했을까? 유종원이 어떤 직책에 있었고, 얼마나 훌륭한 업적을 남겼는지를 쓰지 않고, 중도
에 버림받은 일을 거론한 이유는 뭘까? 도대체 유종원에게 어떤 일이 있었길래, 비범하고 위대한 글을 쓸 수 있었다고 말하는 걸까?
유종원은 집안 대대로 관리를 지내 온 명망가 출신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글 쓰는 재능이 출중해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유종원은 21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중앙 관직생활을 하면서 바라본 풍경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관리들은 백성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정치를 펴기는 커녕,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면서 재물을 도둑질했다. 귀족들은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고, 환관들은 권력을 유지하고자 각종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유종원은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왕숙문’과 ‘왕비’가 추진했던 개혁에 참여하였다. 당시 사회 변화를 꿈꾸는 젊은 인재들은 이 프로젝트에 큰 호응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개혁은 성급하게 진행되었고, 반대파의 역풍을 맞게 되었다. 개혁은 실패로 끝났고 사람들은 사형을 받거나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유종원도 유배의 길에 올랐다. 그의 정치 생명도 이렇게 끝나게 되는 듯 했다.
2. 새로운 길 모색
영주는 장안과는 너무나 다른 곳이었다. 같은 중국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말하는 것, 살아가는 풍습, 심지어 기후까지도 너무나 달랐다. 오랑캐 땅이나 진배없는 그 곳에서 유종원은 자신의 심경을 토로할만한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중앙 최고의 엘리트가 머나먼 벽지에서 누구와 마음이 통했겠는가? 이러한 자신의 심경을 담아 그는 시를 쓰기도 했다.
“주변 산에 나는 새 없고, 모든 길에 인적 끊겼어라.
외로운 배에 도롱이와 삿갓 쓴 늙은이
홀로 눈 내리는 차가운 강에서 낚시질하네.”
유배지에서 유종원은 철저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느끼는 적막감과 외로움. 그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정치에 대한 희망과 미련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의 시에서처럼 주변 산에 새가 없었던 것인지는 의문이다. 인적이 끊긴 것 또한 그의 마음 속 풍경이 아니었을까? 그의 외로움이 그로 하여금 주변을 볼 수 없고, 사람을 볼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평소처럼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매일 똑같이 보였던 풍경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둑한 저녁 광경이 멀리로부터 다가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어도 여전히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정신은 집중되고 육체는 분해되어 만물과 하나가 되었다. 그런 후에 이전의 유람은 유람도 아니었으며 이제야 진정한 유람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유종원전집』2.「시득서산연유기」. P.480)
그는 하인들과 덤불을 베어내고, 들풀을 태우면서 서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서산의 정상에 올라 바라본 풍경. 그것은 더 이상 그 전에 보았던 풍경이 아니었다. 어떻게 매일 바라보았던 풍경이 달리 보일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가 스스로 풀을 베면서 나아갈 길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길을 만드는 과정은 마음이 통하는 교감의 과정이었다. 그 속에서는 외로워할 틈이 없었다.
유종원은 그동안의 자신만의 외로움에 갇힌 채 유유자적하던 유람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떠나게 되었다. 진정한 유람은 다른 이들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함으로써 가능한 것임을 그는 깨달았다. 만물과 하나가 되는 체험은 유종원의 삶에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발 딛고 살아가고 있는 현장에서 백성들과 하나가 되는 교감이야말로 의미 있는 삶이라고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의 문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귀족들이 자신의 문장만을 돋보이기 위해 화려하게 꾸미고 장식하는 변려문 대신 백성들의 감정과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을 썼다. 사람들이 자신의 억눌린 감정을 토해낼 수 있는 글, 불편한 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글이 훌륭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유종원은 “억눌리고 억울한 사연을 벙어리인 양 말 못하게 하고, 눈이 찢어지게 화가 나고 피가 흘러도 한마디도 못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사람들의 감정을 소통시켜 주는 글쓰기를 하고자 했다.
3. 문장, 새로운 정치의 길
유종원은 백성들이 어떤 감정과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글을 썼다. 관리들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는 하지만, 백성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다. 그래서 유종원은 백성들의 감정을 표현해 줄 수 있는 글을 써서 사람들의 생각들을 소통시키고자 하였다.
우선 그는「포사자설」을 통해 가혹한 정치가 백성들에게 얼마나 크나큰 독(毒)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독사를 잡아 세금으로 납부하는 포사자. 그 일로 할아버지도 죽고 아버지도 죽고, 자신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야 하지만 뱀 잡는 일을 포기할 수 없는 포사자의 이야기를 통해 가혹한 정치가 백성들에게 얼마나 크나큰 독(毒)으로 작용하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러한 상황에서 관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지방에서 관리를 지내는 사람으로서 그대는 그 직무에 대해 아십니까? 백성에게 부려지는 존재로서 백성을 부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백성들 가운데 땅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내어 관리를 고용해서 자신들을 공평하게 관장하도록 합니다. 지금 관리들은 백성들에게서 대가를 받고서 그 일에 태만한데 천하가 모두 이렇습니다. 어찌 태만할 뿐이겠습니까? 또 관직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도둑질하기까지 합니다. (『유종원전집』2.「송설존의지임서」. P.322)
그 당시 관리들은 황제가 자신을 임명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백성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백성들을 다스리고, 이래라 저래라 부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종원은 관리란 원래 땅을 가진 백성들이 땅에서 나오는 곡식들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고용된 사람이었다고 생각을 전환시킨다.
유종원에게 정치란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정치란 중앙관직에서 이루어지는 제도 개혁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훌륭한 문장 또한 백성들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유의 물꼬를 터 주는 글. 그것을 읽고 서로가 공감할 수 있다면, 삶이 바뀌지 않을까? 그는 글쓰기를 통해 삶을 바꿀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만들었다. 그것이 유종원의 새로운 정치의 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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