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수 있는 힘
“소동파의 편지를 읽고 나는 기쁨으로 온몸에 땀이 배어나올 지경이었소. 나 같은 늙은이는 이제 이 젊은이에게 자리를 내주어, 그가 문단의 영수(領袖)로 군림하게 해야 할 것 같소.” (『소동파 평전』, 곽정충, 학고방, 72쪽)
지공거 즉, 과거시험 위원장이었던 구양수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뽑은 소식의 편지를 읽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소식이 자신의 바통을 이어받을 인재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구양수는 왜 문장만 보고서 지금 막 과거에 급제한 후배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려 하는 것일까? 문장을 무엇이라 생각했기에 소식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1. 태학체 VS 고문
송나라 초기, 문관 중심의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고자 과거제도를 개편했다. 이 제도로 인해 선비 계층은 유학적 지식과 소양을 쌓았고, 새로운 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신진 세력도 대거 출현했다. 그러나 구양수의 시대에 이르자, 관료들의 기강은 해이해졌고 수험생들은 관직을 녹봉이나 받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사대부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인재를 찾기 어려워진 것. 구양수는 이런 세태의 중심에 사륙변려문이 있다고 보았다.
과거 시험
경성의 국자감 출신 응시생들은 보통 사륙문의 신기하고 괴벽한 언어사용을 추구하고, 전인들의 문구를 끌어와서 시험을 잘 치르고자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륙시문을 “태학체” 문장이라 부른다. 바로 “태학체”의 사륙문은 과거시험에서 합격을 거의 독점하였기 때문에 문단 전체의 분위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동파 평전』, 곽정충, 학고방, 118쪽)
사륙변려문(사륙문)은 국자감 출신의 응시생들이 연마하는 문체라 하여 ‘태학체’라고도 불린다. 사륙문은 4글자와 6글자의 대구를 맞추고 반드시 전고(전례와 고사)를 인용해서 쓴다. 이러한 글쓰기는 형식에 구애되다 보니 내용은 빈약하다. 글의 내용은 작가의 고민으로부터 나오는데 그것이 증발해버린 것. 삶에 대한 고민이 없는 문장, 삶과 글이 분리된 문장, 이것이 구양수가 사륙문을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구양수는 고문(古文)을 쓸 것을 주장했다. 고문은 선진양한(先秦兩漢)의 선비들이 쓰던 문체로 경전에 나타난 성인의 도를 배워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문체로 글을 쓰는 것을 말한다. 고문은 단순히 형식을 연마하는 사륙문과는 다르다. 성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윤리를 만든다. 그렇게 정립한 가치관은 문장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문장은 자신의 도를 싣는 도구인 것.(文以載道) 그러니까 고문을 쓴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수양을 전제로 하고, 그렇게 나온 글은 삶과 일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문을 쓰는 응시생들은 과거시험에서 낙방했다.
시관이 본래 스스로 책임지지 않거니와 천하 사람들 역시 시관을 책망하지 않고 다들 “법도에 맞지 않아서이다.”라고 하니, 불행하게 시관이 기준을 한번 잘못 적용하면 종종 인재를 잃음은 많고 인재를 얻음은 적게 된다.
아, 시관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과연 좋은 법도인가. 어찌 오래되었는데도 바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 더구나 증생의 학업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큰 것은 본래 뛰어나고 그 작은 것에 있어서도 기준이 맞을 만한데 시관이 그를 버렸으니 의아해할 만하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 권18, 수재 증공을 보내는 서문)
시관은 증공이 쓴 고문이 기준 미달이라며 탈락시켰다. 기준이라는 것은 글의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다. 구양수는 구습에 젖어 인재 뽑는 일을 마치 남의 일처럼 대하는 시관들의 태도를 개탄한다. 옛 성인들이 인재를 찾는 것을 급선무로 여긴 것은 인재들이야말로 훌륭한 정치의 근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나라 관료들에게는 좋은 인재를 한 명이라도 더 뽑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은 없다. 구양수가 한유와 유종원 이후로 끊겼던 고문의 바람을 다시 일으키려는 것은 사대부들의 이런 안일한 태도를 전면적으로 쇄신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2. 신념을 지켜내다
문체에 대한 구양수의 고민은 자신이 본 시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에 구양수는 친구의 집에서 너덜너덜해진 한유의 책을 만났다. 10여 살에 지나지 않았지만 책의 기세에 매료되었고, 한유와 같은 태도로 학문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한유 키즈였던 그는 과거시험을 고문으로 보았다. 그런데 고문으로 본 두 번의 시험에서 모두 낙방했다. 땅도, 유산도 없던 구양수는 생계를 위해 관직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문체를 사륙문으로 바꿨고, 문체를 바꾸자마자 합격했다. 비록 관직에 오르기 위해 문체를 바꾸었지만 그 후에는 사륙문을 버렸고 사륙문을 쓰는 집단 내에서 고문을 포기하지 않았다.
드디어 문풍을 바꿔낼 첫 번째 기회가 왔다. 1043년 송나라는 내부적으로 부패가 극심했고, 외부적으로는 주변국들이 끊임없이 송나라를 위협했다. 황제는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는 개혁안을 신하들에게 요구했다. 그 중에 구양수는 학교를 늘리고, 과거시험에서 사륙문을 쓰는 폐단을 없애자는 등의 개혁안을 내놓았다. 다른 관료들도 관료제 개혁, 토지개혁, 노역제 개선 등을 내놓았다. 이러한 개혁안들은 당시 기득권을 가진 귀족 관료와 대지주에게는 불리한 것들이었다.
신은 듣건대 붕당의 설은 예로부터 있었으니, 오직 임금께서는 군자와 송인을 분별하시기를 바랄뿐입니다. 대체로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를 함께하여 붕당을 이루고, 소인은 소인과 더불어 이익을 함께하여 붕당을 이루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신은 소인에게는 붕당이 없고, 군자에게만 붕당이 있다고 여기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소인이 좋아하는 것은 이익과 봉록이고 탐내는 것은 재화입니다. 저들이 이익을 함께할 때에 잠시 서로 붕당을 결성하고 끌어들여 벗으로 삼는 것은 거짓입니다. 이익을 보기에 이르러서는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다투고, 혹 이익이 다 없어져서 교분이 소원하게 되어서는 도리어 서로 해쳐서, 비록 형제 친척이라도 서로 보호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소인에게는 붕당이 없으니, 저들이 잠시 붕당을 이루는 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그렇지 않아서 지키는 것은 도의요, 행하는 것은 충신이요, 아끼는 것은 명예와 절조입니다. 이로써 몸을 닦으면 도를 함께하여 서로 유익하고, 이로써 국가에 일하면 마음을 함께하여 서로 도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이것이 군자의 붕당입니다. 그러므로 인군이 된 자는 소인이 된 짜는 소인의 거짓 붕당을 물리치고 군자의 참된 붕당을 써야 하니, 그렇게 된다면 천하는 다스려질 것입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 권14, 붕당론)
기득권층은 개혁안을 내놓은 이들이 붕당을 결성했다고 공격했다. 하지만 구양수는 군자의 붕당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소인의 붕당과는 다르다고 반대파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도의로써 모이는 군자들의 붕당이야말로 정치에서 쓰여야 하는 붕당이라며 붕당의 성격까지 규정하는 매우 정치적인 글이다. 이렇듯 구양수는 고문을 통해 자신의 뜻을 세우고 바로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현장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발언들을 서슴지 않았다.
정국이 안정된다 싶으니 개혁의 필요성은 희미해졌고 반대파의 공격을 받은 이들은 폄적되거나 전출되었다. 구양수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출된 지역에서 고문을 쓰는 벗들과 자신의 글쓰기를 연마하는 계기로 삼았다.
좌천과 복권을 반복하면서도 고문의 끈을 놓지 않았던 구양수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왔다. 구양수가 중년이 됐을 즈음 황제도 정치의 폐단이 사대부들의 문풍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각을 한다. 1057년에 황제는 구양수에게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지공거의 직책을 맡겼다. 구양수는 “경전의 방법들에 통달하고 고문을 쓸 수 있는”사람을 합격시키겠다고 공표했다. 하지만 응시생들의 저항은 어마어마했다. 시험이 끝난 후 격분한 수험생들이 몰려와 구양수에게 항의를 했고, 죽어 마땅하다고 저주를 퍼붓는 이도 있었다. 이런 사태를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양수는 과감하게 출제 경향을 바꿨다. 문체야말로 사대부의 태도와 나라의 운명을 변화시킬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구양수가 지공거를 맡은 과거시험에서 소식, 소순, 소철, 증공 등 우리가 ‘당송팔대가’라고 부르는 8명의 인물 중 4명이 배출되었다. 구양수는 많은 사람들이 고문으로 출세할 수 없다고 여길 때부터 고문의 씨앗을 품었고, 그 씨앗은 후배들에게 와서 꽃을 활짝 피웠다. 구양수가 아니었다면 과연 우리가 이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사륙변려문을 쓰는 관료 집단 내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결과 이룬 쾌거이다.
3. 곤궁할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
문풍을 바꿔내기 위한 싸움. 그 싸움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고문을 추구하고, 그것을 지켜냈던 벗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미는 나이는 나보다 적으나 내가 고문을 배운 것은 도리어 그보다 뒤이다. 천성 연간에 나는 진사시에 참여하도록 유사에게 천거되어 경사에 가서 보니, 당시의 학자들이 언어, 성운과 대우, 전고 등에 힘을 쏟아 시문이라 하면서 서로 자랑하였는데 자미만은 그의 재옹 목참군 백장과 함께 고시가와 잡문을 지었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비웃었지만 자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뒤에 천자가 시문의 풍조에 대한 폐단을 걱정하여 조서를 내려 학자들에게 고문에 가깝게 글을 쓰도록 면려한니 이를 계기로 시문의 풍조는 차츰 사라지고 학자들은 차츰 고문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유독 자미만은 온 세상이 하지 않았던 시기에 시종일관 스스로 지켜 세속의 호오에 휩쓸리지 않았으니 이른바 특립독행한 선비라 이를 만하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 권17, 소씨의 문집에 대한 서문)
대부분의 선비들이 형식에 맞는 글을 쓰기 위해 고심할 때, 구양수의 벗 소순흠과 그의 형만은 고문으로 글을 지었다. 형제는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문체를 바꾸지 않았다. 문체가 바로 선비의 태도와 연결된다는 것, 이것을 소순흠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구양수는 세속에 흔들리지 않는 그를 ‘특립독행한 선비’라 추켜세운다.
구양수의 또 다른 벗 매요신은 시인이다. 그는 당시에 유행하는 화려하면서도 전고를 많이 쓰는 ‘서곤체’의 시풍을 거부했다.
내가 들으니 세상 사람들은 ‘시인은 영달한 사람은 적고 곤궁한 사람은 많다.’라고 하니 어찌 그렇겠는가. 세상에 전해오는 시는 대부분 옛날 곤궁한 사람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무릇 소유한 재능을 온축하고도 세상에 펴지 못한 선비는 대부분 산속이나 물가에서 스스로 한가하게 살면서 벌레와 물고기, 풀과 나무, 바람과 구름, 새와 짐승들의 모습을 보고서 왕왕 기괴함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내면에 근심과 감분이 켜켜이 쌓이면 원망하고 풍자하는 마음을 일으켜 버림받은 신하와 과부가 내는 한탄을 시로 말하여 보통 사람이 어려운 말들을 묘사하니 대체로 곤궁할수록 더욱 훌륭한 시가 나온다. 그렇다면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곤궁하게 된 뒤라야 훌륭한 시가 나오는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 권17, 매성유의 시집에 대한 서문)
사람들은 시를 쓰면 궁핍해진다고 말하지만 구양수는 이를 뒤집어 궁핍할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고 말한다.(窮而後巧) 곤궁해지는 것은 시를 쓰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에 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요신은 출세하기 위한 글은 쓰지 않았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쓴 시로 인해 명성은 높아져갔다. 하지만 매요신의 시는 좋아하면서도 그의 사람됨을 알아봐주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중앙관직에서 정치를 해보려는 그의 뜻은 매번 좌절되었다. 이런 속에서 시인은 예리하게 세태를 관찰하고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복잡한 감정들을 자신의 시어로 벼려냈다. 자신의 고민을 문장을 통해 펼쳐낸 것.
곤궁할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는 생각은 문체가 다르다는 이유로 과거에 낙방하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뜻을 펼치다 폄적된 구양수 자신의 경험과도 떨어질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궁핍을 문장으로 돌파했고, 그 결과 문풍을 바꿔내었다. 하지만 문풍만 바뀐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내고 시대를 바꿔냈다. 이것이 바로 도를 담은 글쓰기의 힘이 아닐까.
이기원 (문장보감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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