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보감 - 글쓰기, 나의 운명 나의 전투
글쓰기는 나의 운명(왜 써야 하는가)
‘글쓰기’는 말만 들어도 힘들고 괴롭다. 무엇을 써야 할지,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하고 두려워서 머리가 하얘지는 경험들을 누구든 한 번 쯤 해봤을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글을 왜 써야 하는 것일까? 당나라 정치가이자 문장가인 한유(韓愈 768~824)는 글쓰기는 피할 수 없는 운명같은 것이라고, 도무지 어쩔 수가 없어서 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운명이라니? 무슨 말인가?
만물은 평정을 얻지 못하면 소리내 운다.(大凡物不得其平則鳴) 초목은 본디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흔들면 소리내 울고, 물은 본디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치면 소리내 운다. 솟구치는 것은 무언가가 그것을 쳤기 때문이고 내달리는 것은 무언가가 그것을 막았기 때문이며 끓어오르는 것은 무언가가 그것에 불질을 했기 때문이다. 금석(金石)은 본디 소리가 없지만 두들기면 소리내 운다. 사람이 말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어쩔 수가 없어서 말을 하는 것이니 노래를 하는 것은 생각이 있어서고 우는 것은 가슴에 품은 바가 있어서다. 입에서 나와 소리가 되는 것들은 모두 평정치 못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맹동야를 보내는 글」 『한유문집1』 361쪽 문학과 지성사)
한유는 우리의 삶이 ‘울음’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외부와 만날 수밖에 없고 그 외부와 관계를 맺으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러면 반드시 희로애락의 감정이 생긴다. 이를 한유는 평정심이 깨진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평정심을 회복하기 위해 그 감정을 어떻게든 풀어낼 수밖에 없다. 말로 풀든 그림으로 풀든 게임으로 풀든. 이 반응을 한유는 ‘울음’이라고 한다.
사람은 울 수밖에 없는 존재. 이 울음을 평생 반복하는 것이 삶일 터이다. 사람뿐이랴? 풀, 나무, 물, 금석, 우주의 만물은 모두 운다. 풀도 나무도 물도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목은 바람을 만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소리를 내며 흔들릴 수밖에 없다. 물도 마찬가지다. 운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거역할 수 없는 실존의 운명!
글쓰기도 한유에게는 울음이다. ‘사람이 내는 소리중 가장 정교한 것이 말인데 말중에서도 문사란 더욱 정교한 것이다’라고 하여 글쓰기가 부득이한 운명임을 말하고 있다. 글쓰기도 평온한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을 풀어내어 평정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삶의 행태라는 것이다. 우리가 에세이를 쓸 때 자신에게 절실한 문제점을 풀어내어 그동안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하는 걸 보면 쉽게 한유의 견해에 동의하게 된다. 아이러니 한 점은 평정심이 많이 깨어질수록 글이 잘 된다는 점(窮苦之言易好). 문제가 심각하고 절실할수록 풀어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 글의 밀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물론 울음에 글쓰기만 있는 것은 아니니 꼭 글쓰기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림이나 영화 혹은 게임 같은 울음에 비해 누구나 할 수 있고 한유의 말처럼 가장 ‘정교’한게 글만한게 있을까? 글은 다른 울음에 비해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고 펜과 종이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 게다가 ‘아’해서 다르고 ‘어’해서 다른게 글이니 잘 울기만 한다면 복잡한 감정을 풀어낼 수가 있다.
써봐야 잘 쓸 수 있다 (어떻게 쓸 것인가)
어차피 울어야 하는게 운명이라면 문제는 ‘잘’ 울어야, 잘 써야 한다는 점이다. 울기만 한다고 감정이 수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유의 제자중에 ‘이익’도 이게 고민이었나보다. 그는 한유에게 편지를 써서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고 물어온다. 이에 대해 한유는 글쓰기 보다 삶을 잘 살 것을 권유한다. 옛날 글을 잘 썼던 사람은 다 삶을 잘 살았던 사람이라면서. 글보다 삶이 우선이라고 한다. 글쓰기는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 삶다워야 글이 글다울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거냐고 다시 되돌아가는 듯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한유의 답. 서두르지 말고 꾸준히 써보라고 한다. 결국 써 봐야 잘 쓸 수 있다는 것. 헐! 하나마나한 대답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한유의 이론을 풀어보면 이렇다. 사람이 글을 쓰지만 글대로 사람이 되어가기도 한다. 그러면 또 삶도 그에 따라 향상된다. 이러기를 반복하면서 사람도 글도 달라져 간다. 예를 들어 삶에서 마무리를 잘 못하는 사람이라면 글쓰기를 할 때도 결론을 못쓰기가 쉽다. 그러나 글을 쓸 때 결론을 꼭 써봄으로써 마무리하기를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힘으로 일상에서도 마무리를 하게 된다. 그 힘으로 또 글도 달라진다. 다시 삶도. 이처럼 삶과 글은 서로 영향을 주면서 달라져간다. 글보다 삶이 더 중요하긴 하지만 글쓰기로 삶을 수양할 수가 있다. 삶과 글의 간극없음! 도문(道文)일치!
글쓰기는 나의 전투
그러나 한유의 시대에는 도가 결여된 변려문이 대세를 이루었다. 삶과 관계없이 글은 잘 쓸 수 있다고 믿었다. 변려문은 4자 6자의 글자를 댓구로 하여 전개되는데 화려한 수사와 리듬의 형식미를 강조한 반면 내용이 부실한 허황한 문체였다. 특히 전고(典故, 특정한 책에 나오는 고사와 관련된 단어)를 많이 썼기 때문 그러한 책을 읽은 귀족사대부들끼리만 통하도록 돼 있었다. 당시에 변려문은 공인된 글쓰기요 표준적인 문체였다. 왕의 조서나 과거시험까지도 변려문으로 통일돼 있었다. 따라서 관직은 변려문을 쓰는 문벌귀족들이 독점해있었다.
한유는 ‘안록산의 난’ 이후에 기울어가는 당나라의 국운이 이러한 변려문의 문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처럼 허황한 문체를 쓰는 귀족들은 삶도, 사람도 그러할 것이니 그런 사람들이 하는 정치가 올바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유는 자신만의 문체를 개척해야 했다. 그는 유가에서 길을 찾았다. 그는 요,순,우,탕,문,무,주공과 같은 중국 고대성인의 삶에 나타난 정신을 쓴 문장, 즉 고문(古文)에서 해답을 찾는다. 그것은 선진양한의 문장이다. 공자가 쓴 유가의 경전들과 맹자, 사마천, 유향, 양웅등의 문장.(사서오경, 『좌전』, 『사기』, 『국어』, 『한서』등) 탄탄한 구성, 쉽고 간결하면서도 견고한 표현,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길이. 그것은 변려문처럼 허황되지 않고 현실에 발을 붙인 탄탄한 문체였다. 한유는 이러한 고문의 문체가 무엇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詞必己出). 삶이 탄탄하고 심플하고 치우치지 않기 때문 글도 그러하다고 본다.
따라서 한유도 그러한 고문의 영향을 받되 그것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자신만의 스타일로 쓰려고 노력한다. 윤리와 개성을 동시에 갖추기. 그는 ‘유정부’라는 제자에게 주는 글에서 ‘옛 성인의 뜻은 본받되 문사는 본받지 말라(師其意 不師其辭)’고 강조한다. 모방하는 쉬운 글쓰기로는 성인의 마음이 자신의 몸에 체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몸에 새겨지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렵다.
모방하지 않고 자신의 문체로 쓰려면 깊이 사유해야 하고 자신의 삶에서 성인의 도가 작동되고 있는지 성찰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文以貫道). 그것은 지난한 일이다. 한유는 말한다. 무척 어려웠다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꺼내 손으로 적어 내려갈 때는 진부한 말을 힘써 없앴소. 아 참으로 어렵기도 했다오.’ 글은 어쩌면 ‘그렇게 애쓰고 더듬거린 흔적’일 뿐인지도 모른다. 채운샘도 오죽하면 그것을 전투라 할까!
자신의 언어에 갇히지 않을 때, 즉 매번 언어의 한계에 마주치며 자신이 속한 언어의 영토를 한 걸음 넘어설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글쓰기는 삶이 된다. 그 ‘한 걸음’을 넘기 위해 자신과의 전투를 무릅써야 하고 기성의 억견(doxa)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상처없는 삶이 없듯이 상처없는 글쓰기도 없다. (채운 『글쓰기와 반시대성,이옥을 읽는다』 133쪽 북드라망 )
새로운 구절 혹은 문장 하나 만들어내는 것을 채운샘은 ‘전투’라 한다. 자신과의 전투. 기성의 억견, 즉 지금까지의 고정관념과 맞서 싸워야하기 때문이다. 억견하나 버리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것. 자신과 전투를 벌일 때 비로소 글쓰기는 삶이 된다고 한다. 실천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치열한 전투를 치렀음에도 전공은 기껏해야 ‘한 걸음’일 뿐이다. 얼마나 변하기가 어려운지를 알 수 있다.
글은 기(氣)로 쓰는 것
그래서일까? 한유는 제자 이익에게 잘 쓰려면 결코 서둘러서는 안된다며 자신은 20년 동안 글쓰기를 해 왔다고 자신의 경험을 말해준다. 오랜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는 4단계로 자신의 글쓰기를 회고한다.
첫단계: 읽는 단계. 유가의 책만 읽었다. 3대 양한의 책. 다른 일에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읽는 일에만 집중,
둘째단계: 써보는 단계. 읽어서 마음에 고인 것을 써보되 진부한 표현 하지 않음. 자신만의 문체로 쓰려고 노력, 가장 어렸웠던 단계.
셋째단계: 드디어 흑백이 드러나서 가려쓸 수 있는 단계
넷째단계: 글이 호방하게 콸콸나옴. 그러나 막바로 쓰지 않고 기다렸다가 평정심으로 순수해졌을 때 쓸 수 있는 자유자재한 단계.
이런 단계를 거치며 한유가 깨달은 것은 글은 기(氣)로 쓴다는 것이다. 도를 확충했을 때 인의의 기운이 몸에 채워졌을 때 글은 나온다는 것. 이처럼 글쓰기 수양을 통해 몸에 채워진 기운을 한유는 기(氣)라고 한다. 글쓰기는 테크닉이 아니라 몸의 문제인 것이다.
기가 성하면 긴 말이건 짧은 말이건 높은 소리건 낮은 소리건 모두 온당해지는 법이오.(氣盛卽言之短長與聲之高下者皆宜) (「답이익서」 『한유문집1』 220쪽)
기가 성하면 어떻게 써야 할지 저절로 알게 된다고 한다. 길게 써야할지 짧게 써야할지, 소리의 높낮이는 어떻게 배치해야할지등. 내용에 맞게 형식도 저절로 갖추어진다는 것. 기세가 세면 글이 세게 나오고 기세가 당당하면 글도 당당해진다. 아름다운 기운으로 가득찰 때는 글도 아름답다. 이러한 도문일치를 한유의 제자 이한은 문이관도(文以貫道)라 했다. 글은 도를 관통해야 한다는 것. 우리도 글을 쓰고 또 다른 사람의 글을 읽어보면 이를 실감하게 된다. 모두 자신의 기(氣)만큼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한유의 첫단계와 둘째단계를 동시에 하고 있는 중이다. 어려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한유는 해내어서 수차례 낙방후에 고문으로 과거를 합격했고 제자들에게 고문을 지도해서 관직에 진출하게 하여 귀족들이 독점했던 관직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글로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 것이다. 이러한 한유와 그의 제자들의 고문글쓰기를 후세인들은 ‘고문운동’이라 부른다.
글을 잘 쓰고 싶은가? 잘 울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읽고 써 볼일이다. 한유가 말하지 않는가? 써봐야 잘 쓸 수 있다고. 기를 채울 수 있다고. 이 또한 운명일 뿐이다.
박정복 (화요 낭송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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