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같은 생각을 하자”는 요구는
스스로를 번뇌에 빠뜨리는 길
상대는 나처럼 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습관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는 것은 내가 보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한테 옳다고 보여도 상대방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옳다’라는 것도 사람마다 순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질문하고 지켜보면서 생각을 바꾸는 것이 행을 닦는 것(수행修行)이며, 수행이 익어진 것이 습관이 됩니다.
따라서 자기와 타인의 습관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시비가 분명한 것이 아니면 생각의 습관이 ‘다르다’라고 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생각의 차이에서 접점을 찾아갈 뿐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같은 생각을 하자고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은 스스로 번뇌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습관과 생각이 ‘나’라는 조건에서 만들어진 것인 줄 알고, 이를 토대로 다른 사람을 보는 생각의 길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 정화,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 : 정화스님의 마음 멘토링』, 북드라망, 2017, 25쪽.
한 집에서 여러 명과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 질문자가 같이 사는 친구와 부딪힘이 생길 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고민에 정화스님께서 해주신 대답의 일부분이다. (실상이야 어떻든)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자”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다”라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대사회에서 어찌 보면 ‘다름을 인정하라’는 평범한 조언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에게 이 조언은 ‘습관을 어떻게 볼 것이냐’, 그리고 “같은 생각을 하자고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은 스스로 번뇌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라는 부분이 크게 와 닿았고, 결국 ‘평범해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조언’이 되었다.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자’며 ‘생각의 다름’에 대해 관용적이고 포용적 자세를 갖추는 것을 ‘시민’의 덕목으로 당연시하지만 ‘옳다’는 생각을 전하는 사람이 ‘상대’가 아니라 ‘내’가 되면 이야기가 종종 달라지곤 한다. 요행히(?) 그 ‘올바름’에 대한 것이 거대담론이랄지 이념적인 것에 대한 문제(예컨대 평등의 문제, 정치의 문제, 분배의 문제, 젠더 문제……)의 범주에 있다면 ‘나’도 얼마든지 ‘올바른 의식의 소유자’로서 “그래, 그 점이 내 생각과 다르구나, 하지만 이런 점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다” 식으로 ‘쿨’하게 물러설 수 있다. 그러나 그 ‘올바름’에 대한 것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작은 문제들(청소, 정리, 점심으로 무엇을 먹느냐, 어느 길로 가느냐, 언제 연락을 하느냐……)의 범주에 있다면 ‘나’는 금방 “지금 이게 맞는 거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는 식으로 나가기 일쑤다.
실제로 이 책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에는 정리정돈과 청소를 하지 않는 남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아내의 고민도 실려 있는데, 아내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청소를 해놓으면 깨끗하고 기분 좋게 일을 시작할 수 있지 않느냐며, 늘 지저분한 상태의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에 스님께서는 청소를 하면 깨끗해서 기분이 좋은 것은 아내의 상태이고, 남편은 다를 수 있음을 말씀해 주신다. ‘정리정돈을 말끔하게 한 뒤’ 공부든 일이든 하게 되면 더 좋다라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있지만, 이것 역시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면 미리미리 해놓는 편이다. 머릿속에 대략 ‘한 달의 계획 > 일주일의 계획 > 그날의 계획’이 대략이나마 늘 그려져 있고, 그 계획에 따라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꼭 닥치지 않았더라도 짬이 있을 때 미리 해놓는다. 그러면 혹시 하는 과정에 오류가 생겨도 수정할 시간도 있고, 중간에 일정이 변경되어도 맞출 수가 있으며, 무엇보다 내 마음이 그렇게 해야 편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내 습관이 늘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오랜 시간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꼭 닥쳐야 그 일을 하는 친구들도 만나게 마련이다(사실 이런 습관인 친구들이 더 많다). 미리 해두면 편할 텐데 “진짜 왜 저럴깡~” 싶어서 처음에는 조언이랍시고 건네기도 했고, 간혹 마감에 닥쳐 해온 일이 결국 다시 해야 할 수준일 때 짜증도 나고 했었는데… 어느 순간에는 그냥 아예 그런 부분을 못 본 체하거나 포기하게 되었다(안 그러면 그 친구와 사이가 나빠질 것 같아서;;).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맞다’, ‘내 방식이 올바르다’는 생각을 버린 것은 당연히 아니고, 시간이 지나다 보니, 내가 말한다고 해서 상대가 바뀌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괜히 말해서 서로 기분만 나쁠 일을 만들지 말자, 정도의 편의적 발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런데 앞의 스님의 조언을 보며 내 생각은 ‘나’라는 조건에서 만들어진 내 습관일 뿐이라는 말에, 그리고 그렇게 상대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내 생각대로 따라주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번뇌로 몰아넣는 것이라는 말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왜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나에게 좋은 일이라고 이렇게 해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나와 맞지 않는 조언이라며 종종 흘려듣고 적지 않게 짜증내면서… 똑같은 행동을 친구나 동료들에게 하고 있을까, 그리고 예컨대 성적 소수자에 대해 ‘정상’을 들먹이며 ‘바꾸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을 감추지 않으면서, 나는 나와 다른 습관을 가진 사람에게 내 생각의 ‘정상’을 거론하며 ‘바꾸면 좋다’고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달라진 생각으로 내 몸과 마음이 세팅되지 않는다. 여전히 순간순간 답답하고 때로 짜증이나 화가 난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강도는 현저히 낮아졌고, 그 시간은 짧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님 말씀대로 “질문하고 지켜보면서 생각을 바꾸는 것이 행을 닦는 것”이 곧 수행(修行)이라면 나는 일상에서 ‘수행’하는 ‘수도자’가 되고 싶다. 남 탓하지 않고, 나의 올바름으로 남을 억압하지 않고, 남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최대한 번뇌할 일을 스스로 짓지 않으면서 사는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하여 요즘은 상대가, 특히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 내 마음에 들도록 행동했으면, ‘나의 올바름’에 맞추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 혼잣말로 되뇐다. ‘스스로 번뇌를 짓지 말자, 내가 또 번뇌의 무덤을 파고 있구나.’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 - 정화 지음/북드라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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