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세계' 혹은 '세계에 대한 색인표'
요즘 오며가며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읽고 있다. 책상에 앉아서 읽거나, 소파에 누워 읽는 편이 더 좋겠다 싶을 만큼 난해하지만, 괜찮다. 한번 읽을 것도 아니고, 두번 읽을 것도 아니니까. 이미 '전집' 번역으로 한번 읽은 것을 새번역(민음사 세계문학전집판)으로 다시 읽는 중이어서 그래도, 처음보다는 수월하게 읽힌다. 이런 저런 자료를 보니 새 번역이 '더 수월하게' 읽히는 편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오늘의 이야기는 『픽션들』에 관한 것이냐 하면,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책에 관해 리뷰를 쓸 자신이 없다.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러 종류의 번역판본들을 읽는 일에 관한 것이다.
번역된 책들을 여러 가지 다른 번역으로 읽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고 텍스트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재미있는 일이다.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능통하게 하는 외국어가 한가지도 없는 나로서는 단번에 와 닿지 않는 ‘번역은 재창조’라는 말의 의미도 어느 정도 알 것 같기도 하다. 처음 자신의 모국어(외국어)로 글을 쓴 작가의 호흡, 그걸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역자의 호흡이 번역된 책 속에는 녹아들어 있다. ‘호흡’이라고 썼지만, 거기에는 사고방식, 대상을 두고 느끼는 방식 등, 뭐라고 해야 할까, 작가와 역자가 함께 만들어 낸 어떤 ‘총체적인 의식’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하나의 책에 대한 다른 종류의 번역판들은 각각이 고유한 책이다. 그런데 한 종류의 번역판만 볼 때는 그 ‘고유성’이 잘 드러나질 않는다. 그건 ‘같지만 다른 것’, 그러니까 다른 종류의 번역판과의 대조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차이를 읽어내는 게 ‘다른 번역’을 읽는 ‘재미’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여러 종의 번역판이 나와 있는 책들은 대개가 ‘고전’들이다. 사실 현대의 저작들의 경우엔 여러 종이 나오기도 어렵다. 여러 출판사들을 통해서 나오고 있는 ‘세계문학전집’들이 반갑고 고맙다. 아주 유명한 작품의 경우에는 각 전집별로 다 있는 경우도 있다. 어떤 책을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세 번 읽고, 그 이상 반복해서 읽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여러 판본이 있으면 언뜻 지루해질 수도 있는 ‘여러 번 읽기’가 한결 수월해질 수도 있으리라.(나는 최근에 『허클베리핀의 모험』을 그런 식으로 읽었다. 민음사 판, 펭귄클래식 판, ‘주석 달린 시리즈’판으로 세 번!) 어쩌면 그것은 원서를 읽지 못하는 독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비슷한 것이기도 하다.
또 한가지 재미난 점은 그런 식으로 ‘텍스트’를 읽을 때에는 번역된 ‘텍스트’ 자체를 읽는 것뿐 아니라, 원서의 ‘번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메타-텍스트’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저기에서는 저렇게 번역된 말이 여기에서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그게 마침 중요한 번역어여서 역자들은 자신이 왜 그렇게 번역했는지를 ‘후기’에 적어놓는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는 일단 다음 문제고, 바로 그 ‘차이’가 책이 가진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고 나는 생각한다. 심지어 어느 한쪽이 명백한 ‘오역’이더라도 말이다. 둘 다 ‘맞는’ 번역이라면, 아니 어느 쪽도 틀리지 않은 것이라면, 그건 독자 입장 정말이지 짜릿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번역 판본 각각이 작품이 창조한 세계에 달린 ‘인덱스’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마침, 『픽션들』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그 이야기로 끝을 맺어야겠다. 『픽션들』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이 ‘인덱스’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책들의 세계’ 또는 ‘지성의 세계’에 붙인 색인표 같은 것 말이다. 아, 그러고 보면 ‘책’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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