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일용엄니, 정말로 문제는 돈이 아니었네요!
아, 어느덧 추억이 되어 버린 드라마 <프로듀사>에 아들(김수현 분)의 KBS 입사를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가 “우리 작은 아들은 국영방송 KBS의…” 하면 김수현이 옆에서 조그만 목소리로 “아버지, 공영방송…”이라고 바로잡아 웃음을 주던 장면이 있었는데요. 뭐, KBS를 공영방송이라고 한다는 것은 어디서 들어봤다 치고, 우리나라에 국영방송이 있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실 분들이 계실 텐데요. 있더라구요. 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LG유플러스를 이용하는 저희 집에서는 171번, KTV가 100% 정부가 운영하는 채널입디다. 아무리 뒤져봐도 볼 게 없어서 돌리고 돌리고 돌리다가 만나게 되는 채널 중에 하나로 전에는 그야말로 ‘아웃 오브 안중’이었으나, 이번 가을 어느 날부터는 한번 틀게 되면 2시간은 채널 고정이 되어 버리는 마성의 채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저녁 9시 50분경에 방영되는 <전원일기> 때문입니다. <전원일기> 앞 시간에는 <사랑이 뭐길래>를 틀어 주는데 그 시간은 JTBC <뉴스룸>과 겹치기 때문에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그냥 포기했고요, <전원일기>부터 제대로 봅니다. <전원일기>가 끝나면 광고도 없이 바로 <순풍 산부인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리모컨에는 손도 대지 못합니다.
<사랑이 뭐길래> 중에서, 하희라-최민수
네, 아무튼 저는 요즘 <전원일기>를 봅니다. 열심히 보다 보니 어렸을 때에는 잘 몰랐던 양촌리 사정을 하나둘 알게 되기도 하는데요.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오리지널 노총각인 줄 알았던 응삼이가 (2000년 이후에 동네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쌍봉댁 아줌마와 결혼을 하기는 하지만) 사실 돌싱이었다는 사실! 극중에서 장가도 가고, 듬직한 사위 노릇도 하고, 온 동네가 다 알도록 부부싸움도 하는 등 평범한 부부생활을 했으나 알고 보니 상대 여배우가 하차하게 되면서 슬쩍 이혼남이 되었다가 어느새 다시 노총각이 된 사연이 있었더라구요. <전원일기>가 장장 22년간 방영된 드라마이니 그런 사연이 묻히기도 충분합지요. 좌우간 어느 에피소드 하나도 놓칠 것이 없지만 혹 드라마극장에 소개하게 되면 꼭 이것을 골라야지, 한 것은 1986년 1월 7일에 방영된 ‘일용엄니, 부자 됐네’ 편입니다(세상에나, 한글프로그램에서는 ‘일용엄니’에 빨간 줄이 안 가네요. ‘응삼이’는 빨간 줄이 생기는데;;).
마루에 앉아 반찬거리를 다듬고 있던 일용엄니, 갑자기 뽀얀 돼지 새끼 한 마리가 마당으로 들어옵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아이고, 이게 웬일이여, 이게 웬일이여’ 하며 돼지를 붙들려는 찰나, 며느리(복길엄마)가 ‘어머니’를 부릅니다. 네, 꿈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김회장님네 마실 가 있던 일용엄니를 급하게 집으로 부른 일용 부부, 둘이 나란히 일용엄니 앞에 꿇어 앉아 각자 종이 뭉치를 내놓습니다. 복길엄마가 2년간 부은 곗돈 100만원, 일용이가 새우젓 나르는 삯일을 하며 받은 한 달 품삯 20만원(일단 여기서 전 문화충격;; 내가 번 돈을 시어머니한테 고스란히 내놓다니;;;).
전원일기의 익숙한 풍경
그리고 갑자기 생긴 목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두고 긴급 가족회의가 열립니다. 일용엄니는 빚을 갚아라, 복길엄마는 경운기를 바꾸자, 일용이는 집수리를 하자. 물론 120만원으로 이 모든 것을 다 할 순 없지요. 서로 핏대까지 올려 가며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급기야 일용이가 회의테이블(?)을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합니다만 결국 일용이가 다시 돌아와 사태를 정리합니다.
방앗간집 등 빚 상환 70만원, 장모님 용돈 10만원, 복길이 만기 예금 20만원, 이렇게 하면 복길엄마가 탄 곗돈은 다 쓰는 것이지요. 자 이제 남은 20만 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인데요. 상남자 일용은 단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씁시다!” 새가슴 복길엄마는 옆에서 펄쩍 뛰는 가운데 모자의 눈빛이 통하기 시작합니다. “쓰자고?” 그 길로 네 식구, 경운기를 타고 읍내로 고고씽! 일용엄니와 복길엄마의 국밥과 설렁탕 주문을 물리고 호기롭게 돼지불백 3인분과 소주 한 병을 시키는 일용. 네 식구는 즐겁게 먹고 식사 후에는 쇼핑도 합니다. 그래 봤자 일용엄니의 털신 한 켤레 사는 것이었지만요. 그래도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온 복길네 식구들. 그리고 일용엄니 방으로 들어와 기분 좋으시냐 묻는 일용. 말이라고 하나요, 당연하죠. 그런데 더 기분 좋으시라며 일용이가 엄니 손에 돈을 쥐어 드립니다. 복길엄마가 친정어머니에게만 용돈을 드릴 수는 없다며 시어머니에게도 똑같이 용돈을 드리라고 했다는 것(복길엄마는 효부를 넘어 거의 보살입디다). 용돈으로 하고 싶은 거 하시라고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일용에게 일용엄니는 찰떡을 한 가마니 해서 온 동네 떡방아 소리가 다 들리게 떡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일용엄니의 돈 쓰기가 시작됩니다. 일단 절친인 김회장네부터 찾아간 일용엄니는 김회장님에겐 청주와 담배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메주 꽁댕이 하나 주는 일 없어도 꼬리를 흔드는” 고마운 삼월이(개)에겐 과자를 먹으라고 주고요, 노할머니에게는 사탕을 한 보따리와 용돈을 드립니다. 할머니가 돈 있다며 사양하지만 “드리고 싶단 말예유, 지가!” 이렇게 강제로(?) 안깁니다. 금동이와 영남이에게도 동전을 세 개씩이나 주고 김회장댁 큰며느리, 작은며느리에게도 ‘로숑’ 사다 쓰라면서 용돈을 줍니다.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일용네는 마을 토박이가 아니고 남편 없이 어린 일용을 데리고 마을로 들어와 정착을 한 케이스라 사는 데 여유는 없었는데요. 조금이나마 가욋돈이 생기자 일용네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김회장댁에 어떻게든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러고도 생각해 보니 고마운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 이번에는 동네 할아버지 삼총사 분들에게 드릴 술과 안주를 사서 찾아갑니다. 홀몸으로 일용이를 키워내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곡식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땔감을 해다 주기도 해서 감사했다고 인사를 전하는데 할아버지들은 “내가 그랬나?” 하면서 술을 드십니다.
그렇게 한바탕 돈을 잘 ‘쓰고’ 집으로 돌아오니 일용네 마당에서는 떡 치기가 한창입니다. 일용네 내외가 엄니의 소원대로 온 동네가 다 들리도록 떡을 치기로 한 것이죠. 온 동네에 한 집도 빼놓지 않고 떡을 나누어 먹고 평화롭게 끝나면 너무 밋밋하겠지요? 일용엄니는 남은 돈을 탈탈 털어 꿈에서 본 돼지와 똑같이 생긴 새끼 돼지를 사옵니다. ‘요놈을 새끼 쳐서 팔고, 새끼 쳐서 팔아서 복길이 시집보낼 밑천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일용엄니, 부자 됐네’ 편이 막을 내립니다.
그(흥부)의 행위야말로 어떤 대가도, 보상도 바라지 않는 순수증여에 가깝다. 그러니 복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로 대박이 났다. 박 하나하나를 탈 때마다 갖은 보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게 웬 떡! 흥부가 돈타령을 부른다. …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기쁨과 흥분의 상태에서 흥부가 한 말이 뭔 줄 아는가? “건넛마을 가서 형님(놀부)을 불러오라”는 것. 왜? 본때를 보여 주려고? 아니면 복수하려고? 아니다! 형님과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 그뿐 아니다. 이제 부자가 되었으니 자기처럼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겠노라 선언한다. 복을 받자마자 증여의 사이클에 곧바로 결합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존심이자 카리스마다. 대개 자존심이나 카리스마는 남을 누르거나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 객기에 불과하다. 허나 흥부의 카리스마는 그렇지 않다. 어떤 가난도, 또 어떤 부유함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고매한 인격! 제비와 같은 미물과도 ‘통’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씨! 하늘도 감응할 만하다. 어떤 사람도 흥부보다 더 가난하기는 어렵다. 물질적 풍요가 넘쳐나는 지금 이 사회에선 더더욱. 그래서 그의 카리스마는 한층 더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의 카리스마가 주는 진정한 가르침은 또 있다.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 역시 고매한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 구원이라는 문제를 수행자나 성직자들의 몫으로 돌린다. “그런 생각은 인간을 두 종류, 즉 고행자와 세속적인 사람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깨달음은 모든 사람들, 세상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해 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 따라서 당신 주변에 담을 두르면서 ‘나는 그저 속세에서 뒹구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야.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나의 전 존재는 이 여섯 자 몸뚱이뿐인걸’ 하고 말해서는 안 된다.”(비노바 바베, 『버리고, 행복하라』, 198족) 왜냐고? “하느님은 자신을 세 가지 방법으로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들 안에 계시하고, 자연의 거대함 속에 계시하고, 마음 가운데 있는 영혼에 계시한다.”(칼린디, 『비노바 바베』, 407쪽) 흥부는 바로 이것을 증명해 주었다. 아무런 개성도, 재능도 없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도 순수증여를 거뜬히 실천해 낼 수 있다는 것. 그것을 통해 자신도, 세상도 구원할 수 있다는 것, 그걸 깨우쳐 준 것이야말로 흥부가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고미숙,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북드라망
<전원일기>의 일용엄니는 기억하시는 분들은 다 알고 계시겠지만 사실 입이 싸고(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전해서 여러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곤 했지요. 얼마 전 본 에피소드에서는 김회장님의 과거 여자 문제를 속 없이 얘기하는 바람에 김혜자 할머니까지도 울리고 말았지 뭡니까요),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고, 가끔 눈치도 없는 캐릭터였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미워할 수 없었던 건 김수미 할머니(당시에는 할머니도 아니라 아가씨였죠;;)의 연기력뿐만 아니라 저 흥부에 버금가는 일용엄니의 ‘카리스마’ 덕분이었네요. 좌우간 평일 저녁 9시 50분, 시간 되시면 <전원일기> 한 번씩들 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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